일본의 성인 게임 업계는 알게 모르게 역사가 길다. MS-DOS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 해에도 수백 개의 타이틀이 쏟아져나와 유저의 지갑을 털어간다. 국내에선 불법 음란물로 분류되지만, 일본에서는 당당한 게임의 한 장르로서 PC게임계를 주름잡은 것이 일본의 성인 게임인 '에로게'. 한국에서는 '*미연시'라 불리는 게임이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줄임말이지만, 왜 시뮬레이션인지는 모르겠다. 장르상으로는 어드벤처인데...)
하지만 현재 일본의 에로게 시장은 그리 순탄치 않다. 매출은 점점 줄고, 전성기에 비해 인기 타이틀도 찾아보기 어렵다. 시대를 앞선 '모에' 코드로 오타쿠 시장을 이끌어가던 것도 옛말이다. 소비자는 에로게 외에도 즐길 거리가 많이 생겼고, 에로게는 시장 주류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에로게 시장이 불경기를 맞이하게 된 이유에 대해, 업계 경력 21년 차 시나리오 라이터 카가미 히로유키(鏡裕之) 씨는 업계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한다. 히트작의 성공 사례를 무작정 따라가려 했던 업계의 움직임이, 결과적으로 에로게 시장을 위축시켰다는 것이다.
■ 고예산 게임은 라이트 노벨과, 저예산 게임은 동인 게임과 경쟁하게 됐다
2004년, 비주얼 노벨 제작 툴인 '키리키리 엔진'이 떠오르며 해당 엔진으로 제작된 동인 게임 <Fate/Stay Night(이하 Fate)>가 공전절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에로게 업계에 두 가지 바람이 불어왔다.
▲ <Fate/Stay Night>는 여러 가지 의미로 업계에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는 스토리 중시의 게임만을 선호하게 되는 현상이다.
에로게의 스토리 중시 풍조 자체는 1997년의 <투 하트>, 1999년 <Kanon>, 2000년 <Air> 등의 히트작이 '눈물계 게임'(감동적인 스토리로 눈물을 뽑는 게임) 붐을 일으키며 이미 시작된 바 있다. 2000년에 발매되어 호평받은 <Phantom> 역시 스토리를 중시한 타이틀이다.
2004년의 <Fate>는 이런 흐름을 단번에 메이저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감동적이고 장대한 스토리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보며, 수많은 개발사가 동일한 노선, 스토리를 중시한 게임 제작에 뛰어들었다.
'게임이기에 가능한 것', 게임성을 줄여가면서까지 스토리에만 집중하는 게임이 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에로게는 게임이라기보다 소설에 가까운 매체가 되어갔다. 그 결과 에로게는 라이트 노벨과 시장을 다투는 사이가 되었다.
결과는? 참패했다. 라이트 노벨은 600엔이면 한 권을 살 수 있고 작가의 필력도 높다. 반면 에로게는 6,000엔 정도로 비싼 데다가 시나리오 라이터의 평균적인 집필력도 라이트 노벨보다 떨어진다. 단순히 스토리의 재미를 추구한다면 더 싸고 구성도 탄탄한 라이트 노벨에 사람이 몰리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 에로게와 라이트 노벨과의 시장 경쟁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Fate>가 불러일으킨 또 하나의 바람은, 동인 게임 시장이 크게 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동인 게임인 <Fate>의 성공을 통해 너도나도 동인 게임 제작에 뛰어들게 된 흐름이다.
<Fate>는 비주얼 노벨 제작 툴인 키리키리 엔진으로 개발됐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점 때문에 이전부터 중소 개발사에서도 자주 사용해왔는데, <Fate>의 성공과 함께 일반 유저들에게도 무료 개발 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덕분에 게임 제작의 진입장벽이 매우 낮아지고 수많은 유저가 동인 게임을 만들어 세상에 공개했다. 그 대부분은 2,000엔 이하의 저가격대 게임으로, 소비자층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에로게'라는 일종의 브랜드로 인식되게 됐다.
그리고 그 동인 게임들은 업계의 저예산 게임, 소위 말하는 '뽕빨계 게임'(야한 요소만을 주로 내세운 게임)과 시장에서 경쟁하기 시작했다. 퀄리티 면에선 업계가 살짝 앞서도, 가격 면에선 동인 게임이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개발사에서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는 다양한 아이디어까지 갖추고.
▲ 동인 게임이 경쟁력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경쟁 구도가 추가됐다.
■ 경제적인 요인과 시장의 변화
2008년, 미국의 대형 투자 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금융 위기 '리먼 쇼크'는 일본의 에로게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굳이 에로게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소비자가 게임에 투자할 수 있는 돈이 크게 줄었다.
게다가 시장 경쟁에서는 라이트 노벨에게 밀려나기까지 해, 자연히 매출이 감소하고 에로게를 판매하는 곳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에로게는 소비자층의 시야에 노출될 기회를 점점 잃어갔다.
비슷한 시기, 3G 환경의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시장이 격변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휴대용 소설책도 사멸했다. 소비자의 한정된 돈과 시간을 둘러싼 각종 업계의 배틀로얄에서 승리한 것은 스마트폰이었다. 그리고 남은 파이를 다른 시장이 나눠 먹은 형태가 됐다.
사람들이 PC보다 모바일에 투자하는 시간이 늘수록, PC를 기반으로 하는 에로게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 결과 일본에서의 PC의 위치는 '많이 플레이하지 않는 콘솔 기기' 정도의 위치로 떨어졌다.
물론 PC 사용자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노트북 PC가 보급되면서 PC 사용자 자체는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2011년 '맥북 에어'가 등장하면서 노트북 PC에서 'CD-ROM' 드라이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CD나 DVD를 주요 매체로 하는 에로게에 있어 이는 치명적인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 스마트폰의 등장은 많은 업계에 있어서 '충격' 그 자체였다.
경제적, 시장 변화적 요인으로 인한 매출 감소는 에로게 업계에 다른 연쇄 작용까지 불러일으켰다. 바로 킬러 타이틀의 감소다. 최근에도 <그리자이아> 시리즈 등 크게 히트한 타이틀이 간간히 나오고는 있지만, 그 수는 매우 적다.
에로게의 전성기에는 주목할만한 타이틀이 자주 등장해 소비자의 이목을 계속해서 집중시켰다. 킬러 타이틀을 보고 모여든 소비자의 힘으로 시장이 유지되고 확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업계의 불황과 함께 킬러 타이틀이 적어지고, 이는 소비자를 지속적으로 이끌 힘이 줄어드는 결과로 연결됐다. 자연히 소비자의 발길도 멀어져만 간다. 스마트폰의 침투, 노트북에서 CD의 옵션화라는 역품 속에서 킬러 타이틀의 감소는 그 자체로도 또 하나의 큰 역풍으로 작용했다.
▲ <그리자이아> 시리즈처럼 킬러 타이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수는 매우 줄었다.
위는 <그리자이아의 낙원> 게임판(왼쪽)과 TV 애니메이션판(오른쪽).
■ 대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욕구가 불러온 볼륨 인플레이션
위에서 설명한 '스토리 중시 풍조'와 '환경의 변화'보다 먼저 시작되어, 현재에 와서 역풍으로 작용하는 존재가 있다. 그것이 바로 '볼륨 인플레이션'이다.
볼륨 인플레이션은 2000년 <Air>가 큰 히트를 치며, 그리고 DVD라는 매체가 등장하며 발생하기 시작했다.
▲ 볼륨 인플레이션의 방아쇠가 된 <Air>. 팬들뿐만 아니라 업계에도 큰 의미로 각인됐다.
우선 첫 번째로 살펴볼 이유인 <Air>는 발매 당시 시나리오 텍스트 용량이 1mb를 넘는 '대작'이었다. 많은 개발사는 <Air>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너도나도 감동적인 스토리와 어마어마한 물량의 시나리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체가 700mb짜리 CD-ROM이었다면 시나리오 분량을 그만큼 늘릴 만한 개발사는 많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나리오 양을 늘릴수록 그에 따른 음성 데이터의 용량은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다. 당장 <Air>만 해도 CD 2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여기에 시나리오를 더 늘리면 CD 장수는 더 늘어난다.
CD의 단가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CD 3장짜리 타이틀'이라는 점은 개발사, 특히 경영자에게 있어선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DVD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4.7기가에 달하는 용량에, 1장당 단가는 CD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매체가 나온 것이다.
그 결과 <Air>의 히트에 영향을 받은 개발사는 DVD의 용량에 힘입어 점점 더 시나리오 분량을 늘려갔다. 볼륨 인플레이션이 업계에 퍼져나가기 시작한 시점이다.
▲ DVD가 나온 시점에서, 더이상 <Air>를 따라가려는 업계를 막을 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부작용이 드러났다. 텍스트가 늘어난다는 것은 음성 녹음에 따른 비용, CG 제작에 따른 비용 등이 함께 늘어난다는 의미다. 업계가 볼륨 인플레이션에 빠져들수록 중소 개발사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또한, 위에서 설명한 경제적인 위기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소비자들이 '한정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모바일게임에 빠져드는 것에 비해, 플레이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에로게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 게임을 즐길 시간이 부족한 소비자에게, 대량의 텍스트를 내세운 에로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 소비자는 시나리오가 길고 플레이 부담이 큰 PC 에로게보다, 짧게 즐기는 모바일게임을 택했다.
이러한 볼륨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소비자의 의견을 걸러내지 못한 업계의 책임도 있다. 2000년대 중반, 소비자의 목소리 중 컸던 것은 "시나리오가 짧다", "좀 더 시나리오를 늘려라"였다. 당시 모 개발사의 사장은 "개별 루트가 아닌 공통 루트에만도 400kb를 썼는데도 짧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2000년 <Air>의 1mb에서 시작해, 2005년에는 1.5mb가 당연시되고, 2009년경에는 2mb가 당연시됐다. 요즘은 2mb에 달하는 텍스트도 짧다는 얘기를 듣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라우드 마이너리티', 즉, 목소리가 큰 소수의 의견이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오히려 사일런트 메이저리티(침묵하는 대다수)의 의견은 "스토리가 너무 길어서 지루해"였다.
▲ '목소리가 큰 소수'와 '침묵하는 대다수'를 구분하지 못한 것은 업계의 큰 실수 중 하나였다.
에로게 업계는 침묵하는 대다수 대신, 목소리가 큰 소수의 의견을 충실하게 따랐다. "시나리오 볼륨 ○○mb!!"라고 광고하는 쪽이 소비자에게 어필하기 쉬워 개발사가 그쪽으로 몰려든 것도 있다. 혹은, 시나리오가 짧다는 얘기를 듣는 게 싫어서 이를 회피하기 위함도 없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시나리오가 길어도 그만큼 재미있다면, 즉, 스토리 밀도가 높다면 볼륨 인플레이션이 악영향만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볼륨 인플레이션은 단순히 스토리 길이만 늘여 밀도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강하게 작용해 버렸다.
시나리오 용량 2mb에 달하는 이야기의 플롯을 컨트롤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많은 소비자가 에로게에서 "쓸데없이 길고 지루해"같은 인상을 받게 됐고, 그것이 2000년대 후반 들어 시장 쇠퇴를 가속화시킨 요인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 유저의 니즈도 변한다. 하지만 용량에 대한 변화가 과연 '누구나 원하던 것'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 본 기사는 카가미 히로유키 씨의 허가를 받아, 칼럼 '에로게가 팔리지 않게 된 7가지 이유'와 '볼륨 인플레이션과 고객 감소'를 정리,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 원문 보러 가기) |
카가미 히로유키 (鏡裕之) 1995년부터 에로게 업계에서 활약한 시나리오 라이터. <MILK 졍키> 시리즈, <거유 판타지> 시리즈 등 다수의 게임 시나리오를 맡았으며, <마녀에게 터치>, <고1이지만 이세계 성주로 부임했습니다> 등의 라이트 노벨을 집필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