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눈보라사와 M모 케이블TV 채널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그 곳.
이전 이야기 ☞ ① ‘태초에 공용농장이 있었다’ ② ‘대하먹튀사극, 맨 VS 서리범’
하늘로 치솟은 새하얀 건물. 어디론가 다급히 전화를 거는 피곤한 얼굴의 사람들. 밖과 달리 고요한 법정 내부. 변호사와 검사의 나지막한 논쟁이 오간 후 법복을 입은 판사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얼마까지 알아보셨어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법정의 모습… 은 뻥이고. 경찰서, 병원, 오락실(!), 디스이즈게임(!?)과 더불어 인생을 살면서 되도록 안 갈수록 좋다는 법정의 모습이다. 맨 마지막에 어딘지 이상한 문장이 붙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기분 탓으로 치고 넘어가자.
아무튼 <아키에이지>에도 법정이 있다. 그것도 24시간 상시 열려 있는 ‘오픈 마인드’의 법정이.
기행 주제에 게임 제목조차 쓰지 않다 보니 ‘님이 하는 그 게임 재미있어 보이는데 뭔가요?’라는 쪽지도 2건이나 받은 한낮의 ‘아키에이지’ 귀농일지. 오늘의 주제는 재판이다. 땅땅땅!
뜨거웠던 그와의 만남
태초(OBT)부터 시작된 서리꾼과의 전쟁. 하도 심고 뽑히다 보니 이제 언제 어디서 심으면 누가 뽑아간다는 것을 슬슬 알게 됐을 무렵, 내 앞에 홀연히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다른 서리꾼과 달랐다. 보통 주인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일반적인 서리꾼과 달리 그는 (남의) 작물이 성장을 마치는 2시간 뒤 다시 찾아와 그것들을 수거해 갈 것이라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자신이 발견한 (일용할) 서리 작물에 대한 기쁨을 담아 현란한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요즘 전문 서리꾼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공개서리꾼’이었다.
2시간 뒤, 다 자란 농작물 앞에 돌아온 그는 가지런한 자세로 손을 모으고 기도를 시작했다.
“SONG님, 오늘도 정의로운 서리꾼이 되는 걸 용서해 주세요. 룰루팡. 룰루피. 룰루…”
아, 진짜 인간적으로 더 이상 못 쓰겠다. 아무튼 기도를 마친 그는 정의로운(?) 서리를 위한 검정색 전문 서리복장으로 갈아입었고, 아쉬운 듯 이렇게 말했다.
“아, 머리만 묶을 수 있으면 딱인데.”
정정하겠다. 그는 요즘 전문 서리꾼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공개서리꾼’이었다. 그것도 정신이 반쯤 나간. 그리고 어릴 적 <천X소X 네X>를 감명깊게 본.
저 먼 곳에서 필자를 도발 중인 녀석. 따라가서 접사를 시도했으나 날틀 실력 부족으로….
어서 와~ 법정은 처음이지?
<아키에이지>의 재판에는 유저가 직접 배심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필요한 준비가 있는데 일단 범죄점수가 높지 않아야 하고 레벨 30 이상의 배심원 퀘스트를 끝내야 한다.
이 배심원 퀘스트는 유저의 정의감과 범죄심판에 대한 의무감을 고양시켜 이후의 판결에서도 보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해주…기는 개뿔. 그냥 멋모르고 해적 편을 들었던 어리석은 NPC를 구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귀찮은 퀘스트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NPC의 말이라면 일체의 의심도 하지 않고 따르는 우리의 ‘호구스트’ 주인공은 죄인의 말만 철썩 같이 믿고 그를 위해 해적의 편이라 의심되는 경비병 살해(…), 배심원에게 강제적인 동의서 받기(…) 등의 사소한(…)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본 재판장은 ‘오오, 이런 정의로운 청년이 있다니’ 하고 감복하며 배심원 자격을 준다는 훈훈한 이야기다.
심지어 저 죄인 청년은 자기 친구가 죽었는데 자기 증인이 없음부터 걱정하는, 지극히 타의 모범이 되는 현실적인 상황인식을 보여준다. 몇 번이나 말하는 거지만 <아키에이지>는 정말 ‘이상한 부분’에 한해서는 굉장히 사실적이다.
덕분에 초창기에는 배심원 퀘스트를 위해 오스테라에서는 한때 사람들이 눈을 번뜩이며 씨가 마른 경비병의 재생성을 기다리는 광경이 연출됐다. 저기서 공포에 걸린 채 불꽃송이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활활 타오르는 경비경처럼 훈훈하고도 따뜻하구나.
여차, 저차, 차차차! 아차 이건 표… 아무튼 해서 배심원 자격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재판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재판은 범죄수치가 올라 현상수배 중인 유저가 죽었을 때 자동으로 법정으로 이동돼 열리며, 로그인한 배심원들이 순서에 맞춰 5명씩 참가한다.
고로 재판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배심원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 그래서 기다렸다. 기다렸다. 아, 많이 기다렸다. 그래, 또 기다렸다. 다시 기다려….
아오! 대기자 2,300 명 뚫고 들어오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배심원 한번 하기 위해 다시 1,200 명을 기다리라고? 이게 무슨 월말에 은행에 공과금 내러 대기표 400장 뚫고 들어갔더니 잔돈을 10 원짜리로 거슬러주는 소리야?
차라리 이 시간에 내가 나가서 현상수배범을 잡고 말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다시 사냥터로 돌아가는 순간. 내게 첫 배심원 초대장이 날아왔다.
…….
이젠 ‘드립’도 지쳤다.
나의 형량을 그에게 알리지 말라
<아키에이지>의 재판은 1분 동안 범죄내역을 보고, 10분 동안 배심원이 피고를 심리하며, 1분 동안 다시 피고가 최후변론을 하고, 배심원이 판결을 내리면, 이에 따라 NPC 재판장이 형을 선고하는 방식이다. 판결은 무죄와 5가지 시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배심원이 내린 시간을 평균해서 형이 선고된다. 200분 형을 받았다면 감옥에 갇혀 200분 동안 가만히 있어야 하는 셈이다.
죄에 비해 시간이 적어 보이지만 로그아웃을 제외한 접속시간만 형기로 인정하고, 유죄 횟수에 따라 다음 재판에서 시간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에 피고 입장에서는 판결이 굉장히 중요하다. 최근에는 유죄로 4,200분을 선고받은 유저도 나왔다.
다만 <아키에이지>의 법정은 ‘실명’이다. 아니, 아니, 눈이 머는 그거 말고. 피고와 배심원이 오손도손 아이디를 생생하게 보며 재판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법정에서는 전투를 제외하면 채팅과 이동, 아이템 거래(!)까지 가능하다. 심지어 법정 구석에는 깨알같이 ‘배심원에 야유를 보내며 던지기 위한 돌’도 마련돼 있다. 덕분에 정말 별별 일이 다 생기는데….
사례 ① 협박
아이디가 노출되다 보니 협박은 기본이다. 특히 거대 원정대의 이름을 이용해 배심원을 협박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날도 그랬다. 일반적으로 피고는 판결결과만 알 수 있고 누가 얼마나 형량을 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연대책임을 물어 유죄가 나오면 배심원들을 모두 사냥도 못할 정도로 계속 따라다니며 죽이겠다고 한 것. 다만 여기에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피고(Lv14): 나 유죄 때리면 너희들 앞으로 몸 성히 사냥 못한다. 각오해 둬.
배심원(Lv40): (시큰둥하게) 네. 그러세요.
… 앞서 말했듯 배심원의 첫 번째 요건은 레벨 30이다.
그래도 이 용감한 피고는 탈옥 후 5명의 배심원 모두를 자신이 있는 지역으로 불렀으며, 아는 형님을 동원해 배심원들 모두를 쓸어버리겠다고 계속 외쳐 댔다. 시끄러움에 지친 필자와 다른 한 명의 배심원은 못 이기는 척 (이제 레벨 15가 된) 피고를 찾아갔으나 정작 초보자 보호지역이라 서로 눈만 멀뚱멀뚱 뜬 채 아무도 때리지 못했다는 슬픈 이야기.
사례 ② 언어의 소중함
지금은 고쳐졌지만 OBT 초창기에 <아키에이지>는 상대편 대륙의 농작물을 캐도 서리로 취급받았다. 특히 다른 대륙에서 해당 대륙 유저에게 죽으면 자기 대륙이 아닌 해당 대륙 법정으로 끌려가는 버그도 있었다.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서대륙 피고: #%$#^#$#$%%$#
동대륙 배심원 1: 아니, 무슨 말을 하라고요.
서대륙 피고: %%$#@!@#!!
동대륙 배심원 2: 진정하고 알아 듣게 말을 하라고요.
서대륙 피고: %%$@&&^$$##
동대륙 배심원 3: 이 사람 안 되겠네. 최고형!
서대륙 피고: ㅠㅠ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나중에 알아보니 다행히(?) 감옥은 서대륙으로 갔다고 하더라.
동대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
사례 ③ ‘묘청법’
지난 화에서도 말했지만 <아키에이지> 유저들은 유난히 ‘묘목의 생존권’에 민감하다. 서리는 엄연히 게임 내 콘텐츠고 이를 막기 위한 농장도 있는 만큼 이해해줄 수 있지만 이득도 없는 묘목을 자신의 노동력까지 써가며 뽑는 건 말 그대로 다른 유저를 괴롭히기 위한 행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 그리고 묘목만 80그루를 뽑은 피고가 법정에 왔다.
피고: 이 묘리타(묘목 + 로리타)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말려고 난 계속….
배심원들: 최고형.
필자가 지금까지 본 법원 판결 중 제일 빠르게, 한마음 한뜻으로 끝난 법정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묘청법 적용 대상.
원수는 외나무 다리, 아니, 법정에서 만난다
그렇게 법정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놈을 만났다! 나에게 첫 살인을 안겨준 댄스 서리범! 알고 보니 우리 사이트 독자였다는 귓속말을 받은 것도 같지만 이제 그런 건 상관없어! 판사봉은 나의 손에 있다. 내가 곧 정의다. 으하하하하하.
범죄점수 396점. 죄목은 서리 및 묘목 뽑아내기 60회. 게다가 <아키에이지>의 어떤 법보다도 위대해 보이는 묘청법을 위반했고 배심원과 같은 원정대 사람도 죽였다. 보통이라면 들을 것도 없이 최고형이다. 하지만 완전을 기하기 위해 다른 배심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필자: 저놈을 보세요. 얼굴만 봐도 흉폭함이 느껴지지 않나요?
배심원 1: 아니, 페레 얼굴이 거기서 거기지, 게다가 당신 얼굴도 만만치 않….
필자: 저기 짝다리 짚은 것 좀 봐요. 와. 비매너다. 쟤.
배심원 2: 저기, 페레는 원래 역관절이라….
필자: 헐. 게다가 신성한 법정에 칼까지 차고 들어옴.
배심원 3: (뭘까 이놈은?)
로즈마리를 유난히 싫어했던 그 녀석.
뭐 이런 식이다. 아무튼 이런 완벽한(?) 덫 속에서 필자는 녀석을 기다렸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1분의 최후변론.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녀석을 보며 통쾌해하고 있을 때, 녀석이 입을 열었다.
‘배심원 님들, 나무 안 필요하세요?’
영문을 모르는 녀석의 행동에 모두는 잠시 말을 잃었고. 녀석은 말을 이어 갔다.
‘제가 200그루 정도 남은 장소를 알고 있는데… 거기 벼락맞은 나무도 못 캐고 그냥 왔는데….’
아니, 이게 무슨 꿈에서 할아버지가 인자한 얼굴로 로또 번호 읊어 주시는 소리란 말인가! 모름지기 <아키에이지>에서 나무란 현실세계의 석유만큼이나 중요한 것. 현실에 아랍 석유부자가 있다면 <아키에이지>에는 은사시통나무부자가 있다는 말이 오갈 정도다.
특히 드문드문 나타나는 벼락맞은 나무는 인생역전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로또 그 자체다. 오죽하면 벼락은 랜덤하게 친다고 개발사에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무 벼락 한 번 맞혀 보겠다고 산꼭대기에 나무 한 그루 덩그러니 심고 혹시나 누가 훔쳐갈까 10시간을 기다리고, 원대륙 몬스터 사이에서 맞아 죽으면서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설치하고 있겠는가?
필자가 녀석의 예상치 못한 급습에 놀라있을 때, 녀석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 물론 무죄가 돼서 나가야 가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겠지만….’
아아, 녀석은 범죄계의 제갈공명! 재판계의 이창호! …그렇게 필자의 중추신경을 타고 올라간 쇼크는 대뇌피질에 직접간섭을 시작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 신성한 법정은 사라지고 배심원 모두가 피고의 놀라운 서리능력을 칭송하는 기현상을 볼 수 있었다.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법정은 녀석을 신으로 모시기 시작했고, 필자의 최고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은 무죄로 방면됐다. 그리고 필자가 완벽한 패배감에 젖어 있을 때 녀석은 다시 필자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나는 네가 지난 밤에 심은 묘목의 위치를 알고 있다.’
안녕 <아키에이지>, 그동안 즐거웠어. 안녕. 내 파란만장했던 야외농사의 일상이여. 그렇게 필자는 화려했던 <아키에이지>의 생을 접고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근데 생각해 보니 이게 내 일이구나. 그래서 돌아왔다. 어?
아무튼 굴욕 속에 받은 건 배심원 10회 참석 기념품인 망치 하나. 그리고 그날 밤에는 농사를 짓느라 빌린 돈 때문에 빚쟁이들에게 쫓겨 원대륙으로 떠나는 괴상한 페레의 그림자를 봤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 온다. –끝-
(정말 안 맞는 탓에) 숨막히는 공중전. 그렇다. 나는 사실 파일럿이었던 것이다.
훈훈한 엔딩.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