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테일 (최의형 기자)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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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생각하게 만드는 MMORPG, 검은사막

플레이어는 게임의 주체인가 관람자인가

오랜만이라고 했지만, 최근 몇 년 간 플레이했던 MMORPG 중에서는 처음이 아닐까 한다. 비록 초반 잠깐이지만, 펄어비스의 <검은사막>은 플레이어가 특정 퀘스트를 선택할 때 고민할 여지를 만든다. 과연 이 선택이 좋을까, 저 선택이 좋을까? 그런 결정의 피드백이 플레이어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처음부터 플레이어의 고민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20레벨 중반까지 플레이한 결과 확실치 않다. 다만 흑정령이 지속해서 플레이어를 고민하게 만든다면 <검은사막>은 RPG라는 장르 명칭을 충실히 따르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존재, 흑정령.

  

 

 

ㆍ클릭 클릭 클릭! 지겹지 않은가?

 

언제부턴가 MMO를 플레이할 때 퀘스트 창에 나오는 버튼은 무조건 클릭 연타, 혹은 스킵으로 넘기고 닥사, 대화, 퀘 보상받고 또 다른 NPC에게 가서 클릭 연타를 반복하지 않았나?

 

적어도 필자가 몇 년 간 플레이했던 대부분의 MMO들은 그랬다. 퀘스트 내용은 거기서 거기고 감동과 재미도 없다. 캐릭터에 대한 감정 이입? 당연히 될 리가 없다. 여기에는 퀘스트, 텍스트의 내용과 그에 따른 몰입도 문제도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낼 때 어떤 이야기로 어떻게 플롯을 잡아서 읽는 이의 시선을 잡을지 전문적인 고민이 없으니 결과도 없을 수밖에. 

 


▲ 하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까는 플롯의 문제다.

  

하지만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퀘스트 플롯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지금은 선택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클릭클릭클릭으로 대변되는 대부분의 MMO들은 제작진이 공들여 만든 게임 세계로 플레이어를 몰입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다.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정해진 대로 흘러가고 그 세계 안에서 하나의 주체가 아닌, 관람자로 전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제작진이 만들어 놓은 대로 따라가면 된다. 재미가 있고 없고는 모르겠다. 일단 쉽다.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퀘스트를 거부하거나, 포기하거나, 보상 아이템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 <테라>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역시나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 보니 플레이어는 자신의 캐릭터가 속한 게임 속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거나 자신이 영향받을 사안에 대해서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관여하지 못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는 것이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MMO에서는 위와 같이 플레이가 대부분이었다. 일방통행로를 따라가며 그저 클릭만 하면 되는 것이다.

 

 

 

ㆍNPC를 방해하는 검은사막 흑정령의 존재

 

<검은사막>을 플레이하면서 가장 눈여겨본 것은 흑정령이라는 존재였다. 흑정령은 캐릭터를 쫓아다니며 메인 퀘스트를 주고, 캐릭터를 인도(?)하는 존재다. '나와 계약하지 않을래?'라는 느낌인데, 그런 면에서는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에 등장하는 '큐베'와도 비슷해 보인다.

  

 

▲ 흑정령과 함께 다니는 캐릭터의 운명은...? 

 

 

특히 흥미 있었던 부분은 흑정령이 간간이 튀어나와 NPC들이 준 퀘스트를 방해하는 부분이었다. 해당 NPC가 준 일을 하지 말고 다른 걸 하자는 식이다. 예를 들어 겁쟁이 농장주가 배달을 부탁한 짐을 다른 곳에 팔아버리자고 이야기한다.

 

플레이어는 고민하게 된다. NPC가 준 퀘스트를 완료할까, 아니면 흑정령이 준 퀘스트를 진행할까? 위에서 느꼈겠지만, 흑정령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흑정령의 말을 들으면 자신의 캐릭터에게 더 이득이 될 것 같다.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

 

 

▲ 흑정령은 다른 NPC의 퀘스트를 방해하고, 플레이어는 선택한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캐릭터의 행동을 결정하는 이런 부분들이 플레이어를 게임의 세계로 몰입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일방통행로를 쫓아가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길을 결정해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게임에 더 관심을 갖게 마련이고 그 선택 때문에 벌어질 일과 결과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그 피드백을 자신의 캐릭터가 고스란히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아주 기초적이지만, 재밌는 방식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다른 페이지를 펼쳐야 하는 게임북(?)이 있고, 수많은 어드벤쳐 게임이 이런 식이다. 나이 좀 있는 남성 게이머라면 알만한 <이사쿠>(유작)를 예로 들면, 선택에 따라서 특정 장면을 목격할 수도, 난관을 벗어날 수도, 위기에 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바뀌는 것이다. 결국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주는 힌트에 집중하게 되고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게 된다.

 

 

▲ 야겜이지만, 어드벤쳐 장르의 특징과 음침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이사쿠>.
 

 

MMO를 비롯해 많은 게임이 고민하는 부분은 플레이어가 어떻게 게임에 몰입하도록 만들까 하는 요소다. 화려한 그래픽과 매력적인 캐릭터, 훌륭한 세계관은 기반 사업에 불과하다. 플레이어들이 게임에 관심을 갖게 만들 수단이 필요하다. 특히 MMO라면 캐릭터가 존재하는 환상의 세계로 플레이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검은사막>의 흑정령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플레이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플레이어들을 단순한 관람자에서 그 게임의 주체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다.

 

 

 

ㆍ플레이어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게임들

 

대부분의 MMO에서 만났던 캐릭터들은 매우 평면적이다. 게임에서 시키는 대로 진행하고 그것을 반복한다. MMO 다음에 어떤 글자가 붙어 있던가? 다들 알고 있듯이 RPG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이미 장르화된 단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클릭만 해대는 게임에 RPG라는 타이틀을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본다.

 

<엘더스크롤: 스카이림>(이하 스카이림)의 예를 들어보자. 물론 이 게임은 MMO가 아니다. 하지만 RPG라는 맥락에서 MMORPG들이 배워야 할 요소가 존재한다. 롤플레잉이라는 것 자체가 역할 연기를 뜻하며, RPG라는 장르가 TRPG(PnP RPG)에서 시작된 건 게임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RPG는 결국 가상의 캐릭터에 자신을 대입시켜 연기하는 게임이다. 단순히 사냥하고 아이템 줍고 레벨업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 RP는 특정 상황, 특정 캐릭터를 설정하고 연기하는 것을 뜻한다.

 

 

<스카이림>을 비롯한 <엘더스크롤> 시리즈는 높은 자유도로 일본 RPG에 익숙한 유저들에게 멘붕을 선사하지만 역할 연기라는 RPG의 면에서는 탁월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경비병에게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NPC를 죽이는 것도 가능하고 소매치기도 가능하다. 특정 아이템을 입수해야 한다면 대화를 통해 얻을 수도 있고, 훔칠 수도 있다. 선택은 플레이어의 몫이며 그 피드백은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받는다.

 

<스카이림>을 플레이하다 보면 이런 장면을 만날 수 있다. 다수의 무장 경비병이 한 명의 쓰러진 NPC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쓰러진 NPC는 살려달라고 외치고, 무장 경비병들은 강압적인 태도로 자신들의 일에 상관하면 당신도 다칠 거라고 경고한다. 이제 플레이어는 선택을 할 차례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울 것인가? 무장 경비병들과 충돌은 껄끄러우니 그냥 지나칠 것인가?

 

<스카이림>에서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여러 요소가 바뀐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 후에 받을 수 있는 퀘스트나 정보 등의 요소들도 변화한다. 그렇다 보니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게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알아내며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점점 게임 안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 선택과 피드백의 연속인 <엘더스크롤> 시리즈.

 

  

80년대에 유행했던 어드벤쳐 게임들도 위와 비슷한 요소를 갖고 있다. 게임의 흐름은 정해져 있지만 그 안에서 플레이어는 계속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게임은 배드 엔딩이 될 수도 있고 해피 엔딩이 될 수도 있다. 옳은 답,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플레이어는 고민하고 많은 정보를 입수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그 게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게임 속 세계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ㆍ흑정령이 플레이어를 검은사막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검은사막>으로 돌아와 보자. <검은사막>의 NPC들은 매우 세밀하다. 하나하나 대화를 해 본 유저라면 알겠지만, 뻔한 이야기를 하는 NPC는 매우 드물다. 똑같이 복붙된 텍스트를 내뱉는 경비병도 아직 보지 못했다. 어떤 NPC는 자신의 아들을 걱정하고, 어떤 NPC는 도시의 패권을 차지할 고민을 하고 있다. 물론 다른 게임의 NPC들도 이런 걱정을 하고 있지만, <검은사막>에서는 좀 더 짜임새 있게 NPC들이 구성되어 있다. 물론 세부적인 부분들에서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공을 들였다는 느낌은 충분하다.

 

흑정령은 이렇게 정성들여 만들어진 세계에 플레이어를 몰입시킬 수 있는 존재다. 게임에서는 시스템을 통해 NPC 모두를 클릭하고 그들과 대화를 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플레이어가 NPC들에게 관심을 갖고, 나아가 <검은사막>의 세상에 흥미를 갖는 것은 한시적일 것이다. NPC를 찾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이야기 여력을 높이고 특정 보상을 받기 위한 클릭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 NPC와 대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검은사막>의 세계에 유저를 몰입시키기 위해서 아닌가?
 

 

하지만 게임 초반에 볼 수 있었던 흑정령의 대화와 퀘스트는 어떨까? 잠시지만 흑정령은 플레이어에게 갈등의 요소를 제공하고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플레이어가 캐릭터에게 자신을 투영할 틈을 만든 것이다. <검은사막>이 게임의 세계로 유저들을 더 몰입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선택의 요소가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피드백이 플레이어들에게 바로 전해질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 게임을 진행할수록 흑정령은 변화한다. 캐릭터에게도 피드백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또 예를 들어 보자. 농장을 운영하는 한 여인이 농장 주위의 곰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그 퀘스트를 수락하면 흑정령이 튀어나와 하찮은 곰을 잡지 말고 더 강한 곰을 잡자고 이야기한다. 플레이어는 선택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결과는 다소 아쉽다. 흑정령의 퀘스트를 완료했을 때 농장의 아이들이 곰의 습격에 죽었다는 메시지를 보게 된다면 어떨까? 혹은 공헌도가 하락한다면? 플레이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피드백을 바로 받기 때문에 무언가를 선택할 때 더 신중한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런 고민과 행동은 결국 자신의 캐릭터에 투영되고 캐릭터에 대한 애착을 쌓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선택에 따라 캐릭터의 외형이 바뀌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흑정령이 원하는 대로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서서히 캐릭터의 외형이 변경되는 것이다. 다크서클이 생길 수도 있겠고, 머리카락 색이 붉게 물들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몸 주위에서 검은 오라가 발생한다거나. 당장은 그 변화에 대해 확신할 수 없겠지만, 플레이어는 자신의 행동에 따라 결국 어떤 결과가 발생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결과가 궁금하다면 흑정령의 퀘스트를 쫓아갈 테고, 자신의 캐릭터가 변하는 것이 싫다면 흑정령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 캐릭터는 플레이어가 가장 아끼는 것이다. 캐릭터에게 피드백을 주는 것은 그만큼 효과적이다. 

 

  

아쉽게도 25레벨 가까이 진행하면서 흑정령이 다른 퀘스트를 방해하며 선택지를 제공하는 경우는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흑정령을 이용해 좀 더 다양한 선택지와 그에 대한 피드백을 플레이어들에게 제공한다면 어떨까? 클릭클릭클릭을 벗어나 플레이어를 고민하게 하고 좀 더 RPG다운 모습을 구축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생각하게 만들고 기대하게 만드는 <검은사막>이 MMORPG들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역할 연기라는 면을 일깨워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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