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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코로나19] 우리에게 '세이브', '로드' 버튼이 있다면

'시티즈 스카이라인'으로 보는 재난 대응 시스템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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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석(우티) 2020-03-06 13:52:59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재난 상황에서는 이성과 시스템이 공포와 혐오보다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적 마스크'도, '드라이브 스루' 검진소도 과거엔 없었던 시스템이죠.

 

재난 대응 시스템을 잘 구현된 게임으로 <시티즈 스카이라인>을 꼽을 수 있습니다. 2015년 출시된 <시티즈 스카이라인>은 도시를 운영하는 시장이 되어 인프라를 구축하고 시민의 생활을 돌보는 시티 빌더입니다. 재난 상황을 시뮬레이팅하는 '대피모드'는 <심시티> 시리즈보다 고도화된 기능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5년 동안 <시티즈 스카이라인>에 푹 빠진 한 게이머가 기고문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이윤과 생명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일이 게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며, 이를 통해 생각할 만한 지점들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외부 원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고= 한민성(사회학을 전공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시티즈 스카이라인> 팬), 편집=디스이즈게임 김재석 기자

 

 


 

# 코로나19 재난에 맞서는 행정 시스템

 

긴급 재난 문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힘차게 울리고 뉴스에 나오는 공무원들이 노란 민방위 점퍼를 입고 있다. 연일 급증하는 코로나19 확진자 수에 국가 자원이 총동원됐다. 기초군사훈련을 위해 논산에 가야 할 공중보건의들은 대구로 떠났고, 간호사관학교 4학년 생도들은 조기 임관하여 전원 대구로 파견되었다. 

 

공공 마스크 확보를 위한 대책이 마련됐지만, 여전히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하고, 연일 급증하는 환자를 수용할 병상도 넉넉하지 않다. 그러니 자원 배분 과정이 아주 매끄럽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진자 동선이 지자체 홈페이지와 재난 문자를 통해 실시간으로 뿌려지고, '드라이브 스루' 방식의 선별진료소가 도입되어 각지에 도입되는 등 철밥통인 줄 알았던 공무원들이 이렇게 기동성 있게 움직이는 것은 쉽게 보기 어려운 일이다. 

 

'드라이브 스루' 방식의 차량이용 선별진료소 (출처: 서울시)

사회가 만들어 내는 복잡성에 매료되어 사회학과에 진학했던 본인 같은 '시스템 오타쿠'로서는 이 관료제의 역동적 움직임을 마치 '밀덕이 장비의 택티컬함에 감탄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으로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게임에서도 이런 재난대비 시스템을 세울 수 있을까? 재난 상황을 다룬 게임은 많지만 행정적 의미의 '재난 대비'를 가장 전술적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게임은 아마 <시티즈 스카이라인>일 것이다. 물론 행정 시스템이 완전히 우리나라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미국의 연방제 행정 시스템에 비유할 수 있는 <시티즈 스카이라인>은 재난에 맞서 당신이 시장으로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구현됐다.

 

<시티즈 스카이라인>의 플레이어는 시장이 되어 도시를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만드는 것뿐 아니라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재난 대비에도 신경 써야 한다. 만약 당신이 재난 대비에 콘셉트를 맞추어 게임을 진행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시티즈 스카이라인> 은 파도 파도 콘텐츠가 나오는 본격 민방위 게임이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니다.

 

3월 2일, 코로나19 선별진료소 확대에 관해 브리핑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박 시장이 입은 옷은 '민방위복'이다. (출처: 서울시)


# 본격 민방위 게임 <시티즈 스카이라인>

<시티즈 스카이라인>을 플레이하다 보면, 환경오염이나 식수오염, 병원 부족으로 인한 보건 재난부터 쓰나미, 홍수, 대형 산불이나 지진, 운석 충돌, 토네이도, 전신주 낙뢰, 폭설, 혹한, 싱크홀 등 수많은 재난을 마주하게 된다. 

 

지진이나 씽크홀로 인해 강줄기가 바뀌거나 댐이 무너져 홍수가 올 수도 있고, 재난으로 도로나 전력망이 끊겨 힘들여 구축한 재난 대응 시스템이 무용지물이 되는 등 복합적인 재난 상황도 일어난다.

 

재난 발생 시 긴급 재난 문자를 뿌리기 위한 무선 안테나. 음영지역이 생기지 않게 적절한 위치에 심어야 한다.

단순히 병원과 소방서를 확충하는 것을 넘어서, 도로망 단절을 대비한 닥터헬기와 전문 구조헬기, 소방헬기를 준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재난 대응을 위한 비상 통신망, 백업 전력망을 갖추는 것 또한 필수다.

 

재난 상황이 길어질 것을 대비해, 재난 기간 동안 시민들을 대피시킬 대피소를 지어야 한다. 또한, 대피소에 충분한 식량과 물자를 비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어야 하고, 수송과 유통을 위한 도로나 철도망이 있어야 한다. 공장이 없으면 화물항이나 화물공항을 통해 국경 밖에서라도 들여와야 한다.

 

시설만 짓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재난 대비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야 한다.

재난 대응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고, 운반하고, 배분해야 한다. (출처: 식약처)

 

쓰나미 위험이 잦은 해안가나 홍수가 잦은 강변 마을이라면 방파제와 배수로, 비상용 펌프 시스템도 갖추어야 한다. 산불 위험이 잦은 숲 속 마을이라면 어디선가 피어 오를지 모를 연기를 감시할 산불 감시 탑과 소방차가 갈 수 없는 산 속 깊은 곳까지 물을 뿌릴 소방헬기 기지를 지어야 하고, 소방용수 확보를 위한 저수지까지 마련해야 한다. 재난을 대비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건 재난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다. 

 

재난을 ‘방지’하거나 ‘방치’할 수 있는 법령도 선포할 수 있다. 화재경보기를 무료화하는 법령을 통해 대형 화재를 예방할 수 있고, 무너진 건물의 생존자 수색보다 재건축을 우선 하는 법령으로 생존자 수색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약할 수도 있다.

 

이렇게 모든 재난대비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추려면 아주 많은 예산이 소요된다. 돈이 궁한 게임 초반에는 이런 재난대비, 예측, 대피 시스템 구축은 언감생심이다. 그저 재난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도시가 성장하여 여윳돈이 생기고, 도시의 성장에 따라 늘어가는 화재와 질병에 소방차와 앰뷸런스 몇 대를 가지고 동분서주하는 소방관들과 구급대원이 안쓰럽게 느껴진다면, 바로 그때가 재난대비 계획을 세우고 재난 대비 관련 시설을 확충할 때다.

 

하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대형 재난을 몇 번 겪고 나서야 재난 대비 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사스를 겪고 질병관리본부를 만들고, 메르스를 겪고 시스템을 정비한 한국처럼.

 

 
# 대피모드 버튼, 결단의 무게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에 대응 계획을 세우는 것과 재난이 일어날지 모르니 대피령을 내리는 것은 도시 행정의 관점에서 완전히 다른 일이다. 플레이어가 지진 경보계나 기상 레이더, 쓰나미 경고 부표 같은 재난 사전 예측 시설을 충분히 깔아 두었다면 재난이 일어나기 전 "도시 어딘가에 재난이 예측되었습니다"라는 사전 경고를 받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예측의 형태는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언제나 모호하기 마련이다. "도시 어딘가에 토네이도가 발생할 예정입니다"는 식이다.

 

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도시가 멈춘다

재난 예보를 확인한 당신이 <시티즈 스카이라인>의 '대피모드'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당신이 깔아둔 비상 통신망을 통해 도시 전역에 사이렌과 "즉시 가까운 대피소로 피난하라"는 재난방송이 울려 퍼진다. 한국인에겐 익숙할 ‘민방위’ 태세다.

 

당신의 재난방송이 긴급 통신망을 타고 울려 퍼지는 동안, 도시는 모든 생산 기능을 멈추고 당신이 이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매뉴얼에 따라 재난 대응 태세로 전환할 것이다. 당신이 도심에 마련해둔 대피시설에서는 시설과 떨어진 곳에 사는 시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한 버스가 출발할 것이다.

 

대피소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시민을 위해 피난  버스의 노선을 설정할 수도 있다

재난 대비를 위해 도시가 멈추면 생산이 없으니 세금 수입도 제로가 된다. 모든 경제 수치는 마이너스로 변한다. 당신이 힘들게 모아둔 도시 재정은 순식간에 불타기 시작한다. 

 

당신이 (게임 시간으로) 수십 년간 동안 쌓아둔 도시 금고가 재난 발생 3~4주 만에 바닥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의 도시는 파산해 중앙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해야 할지 모른다. 재난은 언제나 확률이지만, 도시를 멈춤으로써 입는 경제적 피해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숫자로 떨어진다.

 

긴급 피난 명령의 경제적 대가는 크다

도시 어딘가 떨어진다고 예보된 운석이 도시 한가운데를 피해 한적한 공터에 떨어질 수도 있고, 도시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토네이도가 저 멀리 송전탑 몇 개만 부수고 소멸할 수도 있다. 운석이나 토네이도가 도시 한가운데로 떨어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단순히 경제 논리로만 따지자면, 도시를 멈춰서 드는 비용이 재난으로 인한 인적손실의 비용보다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순히 더 많은 돈을 금고에 쌓아두는 게 플레이어의 목적이라면 재난이 임박했다는 과학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별일 없을 테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라는 방송을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시티즈 스카이라인> '대피모드'의 비용은 정말 비싸다.

 

재해 감지 시설에 의해 감지된 자연재해의 예상 사망률이 1% 남짓으로 예측된다면, 당신은 도시를 재정적 파탄에 이르게 할 ‘대피' 버튼을 누를 것인가? 운이 없다면 1%보다 많은 시민이 죽겠지만 사실 이 게임은 도시를 멈추는 비용보다는 장례비가 훨씬 저렴하다. 

 

'겨우' 인구의 1% 남짓한 희생 가능성 때문에 대피 경보를 내린다면, 당신이 수년간 공들여 준비해왔던 스포츠 대회나 로켓 발사를 취소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티즈 스카이라인>엔 민주주의가 구현되어있지 않기에 시민들 좀 죽었다고 하더라도 시장 직을 계속해나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코앞에 닥쳐온 재난을 숨길 것인가?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한 명의 시민이라도 더 구해낼 것인가?

불안에 떨고 있는 시민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우리에게 세이브&로드 버튼이 있다면

 

장례비는 병원비보다 저렴하다

고백하자면 난 <시티즈 스카이라인>의 시장으로서 예측시스템의 경보를 무시하고 재난이 도시의 문을 두드리는 최후의 순간이 올 때까지 대피를 시키지 않았던 적이 더 많았다. 

 

실제 도심 한가운데로 재난이 떨어질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현실적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긴 하지만, 솔직히 힘들게 모은 예산을 ‘긴급 피난 명령’으로 날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티즈 스카이라인>에는 세이브&로드 버튼이 있다. 이 버튼은 공짜다.

 

세이브&로드 버튼이 없는 현실사회는 이보다 더 복잡한 요소들이 얽혀있다. 올림픽 같은 대형 행사를 준비하고 있을 수도 있고, 선거를 앞두고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할 수도 있다. 사이비 종교 단체나 백신 거부론자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 상황을 통제 불가능한 지경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코로나19라는 재난에 맞서 한국 사회는 그간 여러 재난을 겪으며 구축해둔 매뉴얼과 가용 자원들을 총동원하고 있다. 한국은 비슷한 상황인 주변국에 비해 훨씬 많은 정보를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우리가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서 태어나 살면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재난의 기억이 우리의 머릿속에 세이브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이브&로드 버튼이 있는 <시티즈 스카이라인>처럼 과거로 돌아가 비극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나 살면서 겪었던 어처구니없는 비극과 슬픔이라는 기억을 돌이켜 다가올 재난을 대비 할 수 있다. 우리의 오늘은 과거의 총합이고, 지금의 재난 대응은 과거의 아픔에서 오는 반응이다. 이는 '사회적 면역'의 작동이다.

 

한국사회는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코로나19와 총력전'이라는 버튼을 누르기로 했다. 코로나19의 근원지인 중국을 제외하면 그 어떤 다른 나라보다 많은 행정적 자원을 재난 대응에 투여하고 있으며, 이는 하루 1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검사자 수로 증명된다. 고위 공직자 몇몇의 과감한 결단이라기보다는 같은 재난을 다신 겪지 않겠다는 시민 의지의 작동이다. 

 

코로나19가 빠르게 종식되어 "철저히 준비한다면,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라는 재난 대비의 모범사례로 우리 기억 속에 세이브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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