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기업의 신제품이 동일 기업 기존 제품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가는 현상을 자기잠식(cannibalization)이라고 말한다. 부정적 어감이 강하지만 자기잠식이 언제나 나쁘기만 한 현상은 아니다. 특히 게임 업계에서는 기존 작품의 팬들이 차기작으로 문제 없이 이주할 경우 이를 ‘성공’으로 간주할 때도 많다.
그런데 다이스의 <배틀필드> 시리즈 최신작 <배틀필드 2042>을 둘러싼 상황은 ‘성공적 자기잠식’으로 평가하기 좀처럼 어렵다. 오히려 ‘역(逆) 자기잠식’이라고 일컬을 만한 현상까지 포착되고 있다.
2021년 있었던 <배틀필드 2042> 정보 공개 및 게임 출시가 <배틀필드 4>, <배틀필드 1>, <배틀필드 5> 등 시리즈 기존 작품에 미친 영향을 ‘최대 동시접속자’ 수 데이터를 통해 분석해봤다. 다이스의 야심작이었던 <배틀필드 2042>가 현재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스팀 이용자 수 데이터를 제공하는 ‘스팀DB’의 그래프를 보면, <배틀필드 4>의 유저 급증 현상이 가장 먼저 두드러진다. 2021년 6월 9일까지 최대 6,000명 정도를 유지하던 <배틀필드 4>의 동시접속자 수는 <배틀필드 2042> 트레일러가 처음 공개된 6월 10일 7,000명을 돌파, 13일에는 11,801명으로 정점에 달해 기존대비 약 2배 증가했다.
이렇게 증가한 <배틀필드 4> 유저 수는 약 한 달 뒤에야 예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배틀필드 4>가 당시 기준으로 8년 된 작품이라는 점, 정상 작동하는 서버가 많지 않았다는 점, 핵 유저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놀랄 만한 결과다. 개발사 다이스는 이런 팬 호응에 맞추어 <배틀필드 4>의 서버를 일시적으로 증설하기도 했다.
더 최근 타이틀인 <배틀필드 1>, <배틀필드 5>에서도 6월 10일 기점으로 유저가 증가했지만 <배틀필드 4>만큼 극적인 수준은 아니다. 여기에는 <배틀필드 2042>와 <배틀필드 4>의 유사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배틀필드 2>부터 <배틀필드 4>까지 약 10여 년의 시간 동안 시리즈는 현대 배경을 유지하다가 <배틀필드 1>에서 시대극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일각에서는 시리즈가 다시 현대로 돌아오길 바라는 염원을 늘 표현해왔다. 이런 와중 <배틀필드 2042>의 배경이 현대로 확인되면서 좀 더 오랜 타이틀인 <배틀필드 4>에도 힘이 실렸던 것으로 파악된다.
7월 이후로도 세 작품에 공통으로 두 번씩 유의미한 유저수 증가가 나타난다. 먼저 각각의 게임이 ‘무료 주말’ 이벤트를 진행했던 시점에 5~6배의 유저 증가가 이루어졌다. 각각 1만 2,000명, 4만 3,000명, 7만 6,000명가량의 동접자 수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두 번째로는 <배틀필드 2042> 오픈 베타 테스트가 예고된 9월 30일을 기점으로 세 게임 모두에서 증가세가 시작됐다. 그리고 오픈 베타가 실제로 진행된 10월 6일~9일까지 동반 상승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후 10월 16~17일경에 동접자 수 피크를 기록했다가 다시 하락세를 그렸다.
그런데 <배틀필드 1>과 <배틀필드 5>는 하락 이후에도 <배틀필드 2042> 출시 이전과 비교해 동접자가 많이 늘어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년 전 동일 시점의 이용자 수와 큰 격차를 보인다. <배틀필드 1>의 2022년 1월 11일 최대 동시접속자 수는 7,748명으로, 정확히 1년 전 수치인 3,924명과 비교해 97% 증가해 약 두 배가 됐다.
<배틀필드 5>의 경우는 더욱더 극적이다. <배틀필드 5>의 2021년 1월 11일 최대 동접자 수는 4,746명으로, 전작인 <배틀필드 1>의 이용자 수(3,924명)와 비교해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반면 2022년 1월 11일 기준 최대 동접자 수는 2만 1,781명이다. 후속작 출시 여파로 유저 수가 약 4.5배로 늘어난 것이다.
신작 출시 소식으로 기대에 부푼 시리즈 팬들이 기존 작품을 다시 찾는 현상 자체는 일반적이다. 이렇게 높아진 관심이 신작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기만 한다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정작 <배틀필드 2042>의 이용자 수는 끝없는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다이스로서는 <배틀필드 5>와 <배틀필드 1>의 새로운 인기에 웃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배틀필드 2042>는 출시 당일인 2021년 11월 19일 10만 5,397명의 최대 동시 접속자 수를 기록했다. 시리즈 최대 성공작으로 꼽히는 <배틀필드 1>이 베타 테스트 당시 약 9만 명, 정식 출시 이후 최대 16만 명의 동접자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실망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후 완성도 및 게임 디자인 이슈로 동접자 수는 무서운 속도로 감소 중이다. 출시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2월 16일 동접자가 5분의 1 수준에 이르렀을 때 다이스는 ‘무료 플레이 주말’ 행사를 진행해 동접자를 약 2.5배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행사 종료와 함께 다시 감소가 시작됐고, 어제인 1월 11일 결국 9,046명에 도달하면서 1만 명 방어에 실패하고 말았다.
통계를 종합해보면, <배틀필드 2042>는 시리즈 기존 게임들의 인기를 부활시킬 정도로 화제를 모았으면서도 정작 자체 유저 풀은 유지하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특히 라이브서비스형 BM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됐던 만큼 유저 풀 붕괴는 치명적이다.
물론 <배틀필드 2042>의 판매량은 적지 않다. 그러나 막대한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을 정도인지는 불분명하다. <배틀필드 2042>의 제작비는 현재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2013년 제작된 <배틀필드 4>에는 1억 달러(약 1,192억 원)가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8년이 지난 시점에 훨씬 큰 규모로 제작된 <배틀필드 2042>의 경우 그 이상의 비용이 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와중 시리즈 팬들은 “<배틀필드 2042>는 포기하고 중단된 <배틀필드 5> 업데이트에나 다시 몰두하라”고 말하는 등 <배틀필드 2042>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상황이다. 과연 <배틀필드 2042>는 앞으로 형제들을 다시 제치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다이스의 행보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