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게임 <켄시>(Kenshi)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개발자 '크리스 헌트'(Chris Hunt)를 필두로 12년 동안 개발된 <켄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무대로 펼쳐지는 매우 자유분방한 롤플레잉 게임이다. 앞서 수식하기도 했지만, 게임은 모든 개발 리소스를 '자유도'에 올인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해진 스토리나 틀 없는 놀라운 자유도와 리얼리티를 강조했다.
작품 특유의 자유도와 리얼리티 등은 인터넷 방송이나 커뮤니티 등에서 화두로 올라 그 자체로 유명세를 얻기도 했고, 여기서 풍기는 매력에 흠뻑 빠져 <켄시>를 직접 플레이하며 출시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즐기고 있는 유저도 더러 있다. 흥미와 달리 막상 플레이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에서 잊힐 무렵, <켄시>를 다시 접한 건 예상외로 스마일게이트 '스토브'를 통해서였다.
방대한 자유도 속 특정 진입장벽만 넘어서면 '재밌다'는 말로 표현하기 부족한 게임, '압도적으로 긍정적'이라는 스팀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 어렵기는 하지만 재밌음은 분명하다는 <켄시>. 이유를 불문하고 계속 눈에 밟히기도, 또 호평이 이어지는 작품을 보며, 어쩌면 지금이 <켄시>를 플레이할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했다.
앞서 <켄시>를 설명하며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무대로 펼쳐지는 자유분방한 롤플레잉 게임이라고 칭했듯, 게임은 '자유도'를 빼고 얘기하면 설명할 게 없을 정도로 이를 강조한 모습이 특징이다. 한마디로 '그냥 내가 상상하고 생각하는 플레이를 모두 할 수 있는 자유도 엄-청 높은 게임'이 <켄시>다.
그러면 <켄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작품 설명에 따르면 ▲ 나라를 다스리는 왕 ▲ 악명높은 도적단의 두목 ▲ 도시를 만들고 확장해 대륙의 상권을 거머쥔 무역 상인 등 소개만 들어도 흥미진진한 모험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요소를 구현해뒀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도 이와 같은 요소를 그대로 즐길 수 있다. 여기에 대규모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이 되어 상대 세력과 전쟁을 펼칠 수도 있고, '빌딩' 요소를 통해 나만의 야영지나 타운을 만들어 세력을 견고히 하거나 학살의 근거지를 만드는 등의 플레이도 가능하다. 어떤 인생을 즐기고 정할지는 '나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이 이렇다 보니 플레이 전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해뒀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어떤 플레이를 펼치는 게 좋을까?' 등으로 말이다. 온갖 생각을 했고 혼자 흡족해하며 '이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겠지?'라고 기승전결 감동의 성공 신화를 써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은 세계가 두려워할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무역인이 되는 일. 시작은 미진했으나 끝은 창대할 거라는 다짐 속 '장돌뱅이'의 삶을 시작했다.
장돌뱅이 생활을 시작한 지 20초가 조금 지났을까, 놀랍게도 나는 노예가 됐다.
그 어떤 비유나 돈벌이 생활의 척박함을 칭하는 말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노예가 됐다. 왜 노예가 됐는지 영문도 몰랐고, 그저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처음 보는 사람이 다가와 나를 구타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노예가 됐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걸까, 정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장돌뱅이는커녕 쇠창살 안에 들어가 무거운 족쇄에 묶인 노예 한 명만 있을 뿐이었다.
불행 속 다행으로 주인공 장돌뱅이는 판매용으로 쟁여둔 '줄톱'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부터 살아야 물건도 판다는 생각에 줄톱으로 족쇄를 끊고 무사히 노예상의 손아귀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자유다!". 생각도 없이 빼앗긴 자유를 다시 찾는다는 일이 이토록 즐거울까.
하지만 즐거움은 찰나와 같다고 누군가 그랬다. 그렇게 노예 탈출 5초도 지나지 않아 나는 나를 구타한 노예상에게 다시 폭행당해 불구가 됐고,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장돌뱅이의 '대무역상'의 꿈은 하루를 넘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저물었다.
이대로 노예가 될 수만은 없다. 아무리 세상이 적당히 망한 뒤라고는 하지만, 게임 시작 20초 만에 노예가 된다는 건 무기 하나 없는 장돌뱅이가 그만큼 나약하다는 설명뿐이 안 되는 일이다.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의 방법은 딱 하나, 그렇다, 내가 직접 노예상이 되는 일이다. 결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찌 됐건 상인은 상인. 엇나간 장돌뱅이의 꿈은 '노예 부호'의 삶으로 타락했다.
그렇게 새로운 모습과 이름으로 다시금 세상에 내려온 장돌뱅이는 푼돈을 모아 방어구를 사고, 필드에 널린 시체를 뒤져 무기를 얻는 등으로 나름의 '생존구실'에 힘썼다. 문제는 캐릭터의 능력치를 키우는 질적 성장이 아닌 장비 몇 개 챙겼다는 일 정도로 나는 이즈음 '이 정도면 나름 나도 강해진 거 아닌가?'라는 오만에 빠졌다는 거다.
든든한 짐꾼 소와 무장한 노예상의 조합에 두려움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켄시>의 세상은 넓고, 멀티 플레이 게임이 아님에도 나보다 강하고 악독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넘쳐났다. 그렇게 두려움 없이 '노예상의 첫 희생자'를 찾으며 필드를 탐사하던 나는 '인간 사냥꾼' 무리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정말 한없이 나약한 존재인 주인공. 이처럼 <켄시>에서 유저는 어떤 플레이 환경을 선택하더라도 '한없이 나약한 존재의 주인공'을 마주함은 달라지지 않는다. 즉, 쉽사리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거나 혼자 싸웠다가는 하늘나라로 거처를 옮기거나 노예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뿐이다.
때문에 처음에 뭘 해야 할지 몰라 '일단 얘부터 때려보자'라고 했다가는 사지가 성한 곳 없이 맞기 마련. 더구나 <켄시> 전투는 공격을 지시한다고 해서 즉각 반응하고 때리는 형태가 아닌 보유 능력치에 따라 실시간으로 진행하는 자동 전투다. 전투마저 '내 마음대로,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나는 너무도 나약했고, 함께하는 동료들도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비싼 값을 주고 고용한 노예도 내가 약하다는 걸 눈치채고 "가족을 찾아 떠날 거야"라는 외마디와 함께 도망가기 바빴다. 더구나 곡괭이로 광물을 캐내는 일도 혼자서는 한세월이 걸려도 성한 광물 하나 얻기 힘들었으며, 그렇게 얻은 광물 하나 팔아봐야 지친 몸 달래는 육포 하나 사기 힘들었다. 장돌뱅이는 대체 어떻게 대박을 꿈꿀 수 있을까.
거듭하는 질문 속 돌아본 내 모습. 강자가 넘쳐나는 '힘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는 사회에서 약자의 처지는 너무도 처참하다. 그러던 문득 내가 '약자'의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에 있어 기존 여느 RPG처럼 '주류의 삶'을 경험하려 처음부터 무리하고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닌가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약할 때 직접 싸우면 진다, '나약하다면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왜 이제야 들었을까'하고 탄식하며 이내 물건 공수를 '직접'하는 게 힘드니 '간접'으로 공수하기를 택했다. 그렇게 난 세상을 떠도는 이름 없는 무사 무리, 혹은 경비병들의 뒤를 밟으며 이들의 전투로부터 나오는 전리품을 콩고물 삼아 주워 먹고 되팔기 시작했다.
내가 따라붙는 무리는 언제라고 할 것 없이 곱등이를 닮은 '방방이'의 습격에 전투에 빠지기도 했고, 무법자 무리를 만나 대규모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전투 후 시체들을 파밍하며 난 물자를 손쉽게 수급했다. 때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강자 무리의 시선이 따갑기는 했지만, 나약한 나에게 '선택권'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렇게 수급한 물건을 돈으로 바꾸고 또 수급을 이어가며 어느덧 '큰돈'을 만지기 시작했다. '다들 이렇게 시작하고 있을까?'라는 생각 속 돈이 어느 정도 모여 나만의 플레이가 가능해졌다는 생각과 함께 또다시 사건이 이어졌다.
따라다니는 무리를 지속 바꾼 나는 파밍 중 '지금 따라다니고 있는 무리원의 시체'를 파밍 하는 실수를 범했다. 순간의 실수 속 죽은 동료를 뒤지는 어느 못된 존재를 파악하고 분노한 무리는 삽시간에 나에게 달려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집단 구타 속 예전이었다면 힘 한번 못 쓰고 죽었을 거지만, 파밍도 성장도 착실하게 한 덕분인지 다리 한쪽과 짐꾼 소를 잃은 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짐꾼을 잃어버린 장돌뱅이가 됐다는 사실에 다리를 잃은 것보다 더 큰 허무함이 밀려왔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와 '마을에서 빨리 치료부터 받자'는 생각이 함께 들 무렵, 피 냄새를 어디서 맡고 온 건지 노예상 무리가 나를 에워싸 구타를 시작했고, 삽시간에 나는 또다시 노예가 되어버렸다.
여기까지 <켄시>를 플레이하며 나름대로 인상 깊은 순간이라 생각한 부분을 정리해봤다. 장돌뱅이의 삶은 피폐하고 위험했으며 어느 순간에도 '숨돌릴 틈'은 없었다. 이는 단순히 나약한 '장돌뱅이'라서 어려운 걸까? 그건 아니다. 다른 삶은 힘들면 더 힘들었지 '조금 더 쉽다'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전설의 무기'를 얻은 누군가는 '정말로 전설의 무기만 얻은 사람'이지 강자가 아니었고, '식인종 사냥꾼'은 우후죽순 몰려오는 끔찍한 수의 식인종에게 반대로 '사냥' 당할 뿐이었다. 이외 팔 한쪽을 잃고 사막에 버려진 '막장'은 문자 그대로의 상황을 마주할 뿐. <켄시> 속 어떤 삶에도 쉬운 길은 없다. 그저 처참함과 고난 속 '나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처럼 <켄시>는 '자유도'에 올인한 게임성을 선사하는 건 물론, 매 순간 '처참함'과 '나약함'을 직면하게 만든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주인공'이라고 강하지 않기에 능력치는 물론 아주 처음부터 하나씩 키워가는 요소가 필수다.
힘을 키우기 위해 몸에 짐을 잔뜩 지니고 돌아다녀 '건강한 신체'를 만들거나, 구타당하고 살아남기를 반복해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몸'을 가지는 등으로 말이다. 그도 어렵다면 당장 함께하는 '구성원의 머릿수'를 늘리는 것도 생존 방법일 수 있다.
<켄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반복 플레이인 이른바 '노가다 플레이'가 필수다. 방대한 자유도와 퀘스트 없는 세계 속 캐릭터를 어떤 콘셉트로 잡고 나아갈지 고민하는 건 물론, 어떤 방식으로 성장할지도 함께 고민하고 이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기존 오픈 월드 RPG 등에서 플레이하던 방법대로 눈에 보이는 존재와 싸우고 이를 통해 강해지는 등 플레이를 생각하고 시도한다면 늘어가는 주검과 함께 허무함도 같이 쌓일 뿐이다.
오랜 시간 <켄시>를 즐겼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켄시>가 가지고 있는 요소의 10분의 1, 아니 '즐겼다'라는 말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적은 분량을 플레이했을 수 있다. <켄시>는 너무도 많은 요소를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요소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앞서 더 많은 준비와 경험이 필요하다.
물론, 높은 자유도와 놀라운 리얼리티라는 뚜렷한 특징에서부터 시작하는 '진입장벽' 역시 분명하다. '너무 많은 자유'와 '세심한 리얼리티'는 끌림을 만드는 동시에 플레이 중은 물론, 플레이 전부터 두려움의 존재로 자리할 수 있다.
더구나 '퀘스트'나 '스토리' 등 플레이에 원동력이 되는 요소가 없다 보니 플레이어 개인의 '성취감'이 다른 게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게 사실이다. 또한 2000년대 초반 잘 나오지도 않는 컴퓨터 시디롬을 억지로 열어 어렵게 설치해 즐기던 어느 이름 없는 게임이 생각나는 조촐한 그래픽, 특별한 '전투 컨트롤'이 필요한 게 아닌 그냥 어려운 자동 전투, 죽으면서 배워보는 게임성 등 진입장벽을 높이는 재료도 양껏 어우러져 있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켄시>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시작하기까지 갖은 진입장벽으로 시작이 어려운 건 물론, 그렇게 게임을 구동해도 초반부를 넘기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플레이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죽어도 허무함만 밀려오기보다, 진심으로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다른 도전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은 <켄시>가 '롤플레잉'으로의 재미를 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켄시>는 플레이하기 전과 플레이를 하는 중, 플레이하고 난 뒤 모두 '대체 뭘까 이 게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임이었다. 재미가 없어서 나오는 그런 질문이나 되물음이 아니다. 그저 궁금하고 더 알아보고 싶으며, 세계를 더 들여다보고 싶은 그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대체 뭘까'라는 질문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말하는 '진입장벽만 넘으면 정말 재밌다'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척박한 황무지에 발을 들인다. 세상 누구도 내 편이 아니고 나 역시 그렇다. 끝없는 자유와 리얼리티를 만끽하고 싶은 유저에게 <켄시>는 '롤플레잉에 충실한 놀 거리'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때문에 그런 유저라면 이 황무지에 발을 들이는 일,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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