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저의 경우는 게임에 막 눈을 떴을 때(?) 일본어나 영어를 모르면 제대로 즐길 수 있는 RPG가 없었습니다. 그땐 지금처럼 조기 교육 열풍도 불지 않았어요. 공략집을 뒤져 가며, 대화집으로 스토리를 억지로 알아 가며 플레이했던 것이 전부였지요.
그래서 저는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 합니다. 제가 한글로 즐긴 최초의 RPG였으니까요. 깔끔한 그래픽과 위트 넘치는 손노리의 개그는 어린 시절의 저를 손노리 팬으로 만들었습니다. <어스토니시아 온라인>(이하 어스토 온라인)은 그래서 더 기대하던 게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체험기는 과거 <어스토> 원작을 즐겼던 관점에서 써 보려고 합니다. /디스이즈게임 권영웅 기자
■ 추억은 방울방울~
<어스토 온라인>은 로그인 화면에서부터 추억을 자극합니다. 몇 년 전에 GP32 버전으로 다시 즐겼던 탓일까요? 아직도 귀에 익숙한 그 음악은 제게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가 아무 생각 말고 일단 즐기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심지어 효과음마저 그랬습니다. 흔한 효과음 같지만 배경음악에 동화되어 느낌이 사뭇 달랐거든요.
이린지스 마을에서 처음 시작하면 익숙한 이름의 NPC들이 반겨 줍니다. 한때 내가 조종하는 ‘로이드’와 함께 ‘트러만’과 사투를 벌였던 ‘호리스’가 엄청난 몸짱이 되어 있습니다. 이 녀석, 엄청 소심했는데, 세월이 흐르니 성격도 그렇고 외모도 훈남으로 변했네요.
도구상인을 하고 있는 호리스의 아내 ‘카린’ 역시 무척 예쁩니다. 목숨 걸고 트러만 물리치고 루비 찾아서 딸의 병을 고쳐 줬더니, 물 한 병을 사례랍시고 줬던 짠돌이 촌장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원작을 플레이했던 이들이라면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더군요.
연약하던 호리스가 달라졌어요.
불법복제는 안 된다며 패스워드를 물어보던 패스맨도 매우 귀여운 모습으로 유저를 반겨 줍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결국 불법복제를 막지 못 했던 패스맨은 이제 불법복제가 없는 ‘온라인’ 게임에서 ‘문방구’를 열었습니다. 지금은 ‘딱지’만 팔고 있는데, 추후 문방구라는 콘셉트에 맞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물건을 팔 것이라고 하니 기대해 보겠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요소가 필드의 상자입니다. 일본식 RPG를 즐기다 보면 마을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상자 열어서 아이템 얻잖아요? <어스토 온라인>도 그런 부분이 구현되어 있습니다. 필드에 존재하는 ‘상자’를 ‘열쇠’로 열 수 있습니다. 상자의 색깔에 따라 나오는 아이템이 달라서 기대하게 만들기도 하고, 처음 상자를 발견했을 때는 기분도 좋아요. 다만, 상자의 위치가 고정인 것 같은데, 랜덤하게 등장하는 상자도 있으면 좋겠어요. 오픈 이후 조금만 지나면 ‘상자 위치 정보’가 다 공개되며 신선한 맛이 떨어질 듯합니다.
온라인 게임은 불법 복제가 안 되니까 안심하세요~.
■ 넘치는 손노리 센스
<어스토 온라인>은 손노리의 센스로 가득합니다. 스킬 이름만 봐도 그렇죠. 드워프 전사의 스킬명은 전부 영화나 드라마 패러디입니다. ‘보고 또 치고’ – 기본 공격력 X 2.0이라는 막강한 스킬입니다. 스킬 이름처럼 힘차게 후려치더니 계속 칩니다. 마구 칩니다. 가만 보니까 이 드워프 할아버지 표정도 뭔가 ‘므흣한’ 것이 개그 캐릭터 같습니다. 나중에 아바타 의상을 보니 개그 캐릭터가 맞습니다. 원작에서도 드워프인 랜달프가 개그를 하더니, 역시 <어스토 온라인>에서도 드워프가 개그 캐릭터로 입지를 굳히는 것 같습니다.
개그 캐릭터 드워프의 위엄.
그리고 클레릭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크한 도시녀 스타일에 ‘츤데레’까지 합쳐진 ‘여신 포스’를 물씬 풍기는 캐릭터입니다. 예쁘장하게 생겨서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성직자면서 그런 도도함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퀘스트 도중 대사나 스킬 모션 및 음성 모두 도도하고 시크합니다.
‘츤데레’한 면도 있습니다. NPC들이 퀘스트를 주면서 ‘제발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면 대답은 차갑게 하면서도 결국 다 들어주거든요. 그래서 더욱 매력적입니다. 실제로 테스트 도중 클레릭의 매력에 흠뻑 빠져 스쿼드 구성을 3클레릭으로 하는 유저들도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클레릭은 손노리 개발진의 ‘덕력’을 엿볼 수 있는 캐릭터 같습니다. 유저들의 욕구를 이렇게 만족시켜주는 경우 흔치 않거든요. 개발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었기에 이런 좋은 반응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시크한 표정이라니.
■ 개성 있고 예쁜 그래픽
클레릭이 매력적인 이유는 캐릭터가 예쁘기 때문입니다. 쉘 쉐이딩으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마치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입니다. ‘반질반질’ 광이 나지 않아 따스한 느낌이 듭니다. 커스터마이징은 그리 자유로운 편은 아닙니다만, 헤어스타일이나 색깔을 변경했을 때 개성이 확실히 드러난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합니다. 앞으로 커스터마이징 자유도를 더 높이면 캐릭터성이 더 뚜렷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캐릭터와 배경의 어울림은 다소 이질감이 납니다. 캐릭터와 오브젝트는 쉘 쉐이딩인데 배경은 ‘반질반질’한 텍스쳐를 사용했거든요. 물론, 조금 시간이 지나면 캐릭터와 오브젝트가 돋보이는 그런 느낌도 듭니다. 결국 유저 취향 차이일 것 같은데요.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살짝 수정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캐릭터와 배경 사이에 이질감이 약간 느껴진다.
장비 아이템의 디자인도 저 레벨 아이템인데도 나름 멋있는 모습입니다. 저 레벨 아이템이라고 ‘없어 보이는’ 느낌이 아닙니다. 고 레벨로 가면 갈수록 더 멋있어집니다. 자꾸 고급 아이템을 입어 보고 싶어지더군요. 아바타 아이템으로 꾸미기도 가능해 멋진 캐릭터가 나옵니다.
캐릭터 움직임도 자연스럽습니다. 이동 모션과 실제 이동 거리가 잘 맞아떨어져, 어색한 느낌이 없어요. 전투 액션도 적절한 효과음과 모션을 사용해 무게감이 있습니다.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었던 손맛 부분을 적절하게 해결한 느낌입니다.
저레벨 아이템도 멋지고, 아바타 적용되니 더 예쁜 클레릭 여신.
■ 개성 있는 퀘스트 진행
처음 <어스토 온라인>을 시작하면 다른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진행을 하게 됩니다. NPC들의 부탁을 들어 주는 거죠. 개고기 모아 와라, 나비 좀 잡아 줘 등등. 하지만 레벨이 3~4쯤 되면 손노리의 센스가 묻어있는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편지 배달 퀘스트를 위해 목적지로 달려가는데, 갑자기 자신의 캐릭터가 “한 번 까볼까?”하며 선택지가 나와요. 뭐 어떤 것을 선택하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NPC 대사가 달라지는 효과가 있어요. 이때부터 온라인 게임이 아니라 패키지 게임을 하는 느낌을 받기 시작합니다.
퀘스트를 진행하며 주고 받는 대화에서도 온라인 게임의 아바타가 아닌, 내 ‘캐릭터’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동료를 영입하게 되면 동료들이 퀘스트를 줍니다. “어디 좀 가자.” “내가 진행하던 일이 있는데 이거 하고 가자” “장사 해서 돈 벌면 10배로 갚아줄게” 같이 동료가 직접 제안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흥미로웠습니다.
여신님이 가자고 하는데 당연히 가야지요.
퀘스트 도중 채집 결과물을 가져오라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일 오브젝트에 채집 도구를 바꿔 채집하는 것이나, ‘특수 채집’에서 미니 게임을 통해 채집하는 부분은 신선함보다는 번거로운 느낌이었습니다. 특수 채집을 원할 때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확률적으로 발동하는 특수 채집’으로 얻을 수 있는 재료라는 점이 랜덤 요소로 너무 강하게 작용합니다. 특수 채집과 일반 채집을 유저가 선택할 수 있다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
꼭 필요할 때는 잘 안 뜨는 특수 채집.
■ 턴 방식 전투 시스템의 장단점
<어스토 온라인>의 전투는 ‘턴 방식’입니다. 온라인 게임에 턴 방식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아틀란티카>에서 훌륭히 구현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었죠. <어스토 온라인>이 턴 방식을 선택한 것은 화려한 연출과 전략성을 잡기 위한 의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꽤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캐릭터의 모션이 시원시원하고 손맛이 살아 있어 전투가 흥미롭습니다. 스킬 사용 장면의 연출도 훌륭하고, 스킬 이름도 재미있습니다. 나름 치밀한 전략도 필요합니다.
특히 미션 시스템이 재미있습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턴 방식 전투에 ‘일반 공격만 써서 승리’, ‘스킬만 써서 승리’, ‘방어에 성공하기’, ‘4라운드 안에 승리하기’ 등의 미션이 돌발적으로 제시되어 전투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미션을 완수할 경우 보상 금액이나 경험치를 3~4배, 심지어 10배 이상 뻥튀기해 줘서 동기 부여도 확실합니다.
딱지 시스템 역시 흥미있는 요소인 것 같습니다. 수집성과 효율성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시스템인데, 딱지창에서 보이는 모습이 너무 작습니다. 직접 전투에서 사용할 경우 크게 보이긴 하지만, 콜렉션으로 모아 가는 딱지 정보 창에서도 크게 보이면 수집 욕구가 더 자극되지 않을까요.
전투 시작이나 끝에서 캐릭터들이 내뱉는 대사도 흥미롭지만, 아직 하나 뿐이라 금방 지겨워집니다. 전투 돌입 전 상황이나 전투 결과에 따라 대사가 달라지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힘겹게 이겼다면 “힘들었다”라는 반응이, 쉽게 이겼다면 “너무 쉽잖아?”, 그리고 HP가 적은 상태에서 전투에 돌입하면 ‘위기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스킬 사용 연출은 꽤 박력이 있습니다.
턴 방식 전투의 단점도 많습니다. 전투에서 턴 순서를 알기 힘들다거나, 스쿼드 내 캐릭터 위치 차이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 치명적입니다. 당연히 전면에 전사나 기사를 세우고 클레릭 같은 클래스를 후열에 둬 공격을 방지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요. 후열에 있어도 맞습니다. 후열에서는 방어력이 높아지긴 하지만, 얻어 맞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단점입니다.
물론 기사 스킬로 방어해 준다거나 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스쿼드 구성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조금 아쉽네요. 차라리 일반 근접 공격은 전면에서 봉쇄해 주는 것이 가능하지만, 일부 스킬이나 원거리 공격이 막은 것을 무시하고 후열을 공격할 수 있었으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략성이 생기거든요.
또, 택틱스 타임에 캐릭터 행동을 결정하는데, 턴 순서가 표시되지 않습니다. 몇 번 플레이하다 보면 대충 감이 잡히긴 합니다만, 파티 사냥에 들어가면 예측이 어렵죠. 적 1회 아군 1회 등으로 반복되는 진행 패턴도 다소 아쉬워요. 캐릭터 능력치에 따라 아군 3명이 먼저 다 때리고 그 후에 맞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순서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먼저 행동하는 지 알아야 전략을 짤 것 아닌가!
스킬의 마나(MP) 소모량과 회복제의 밸런싱도 필요합니다. 소모 MP가 크기 때문에, 스킬 사용이 꺼려집니다. 전투 중에는 ‘턴’을 소비해야 MP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도 스킬 사용을 자제하게 만듭니다. 물론 이것을 수정해 달라고 말하긴 힘들겠죠. 회복제의 사용도 ‘전략’의 일부니까요.
하지만 전투 후 소모된 HP와 MP를 빠르게 회복하게 해 주는 수단이 있으면 어떨까요? 전투 중에는 전략적으로 사용하게 하고,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투에는 긴장감을 주는 겁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을 때는 안정감을 주는 거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물빵’처럼 전투 후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전투 중 스킬 사용에 부담이 없을 것입니다.
전투 후 HP/MP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 수정해야 할 불편 요소들
<어스토 온라인>은 아직 유저 피드백이 충분하지 않은 탓인지, 불편한 점이 곳곳에 눈에 뜁니다. 일단 ‘점프’가 안 됩니다. ‘아니 왜 점프가 필요한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만, 마을에서 이동할 때 점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죠. 자그마한 장애물을 돌아가는 것과 훌쩍 뛰어 넘어가는 것, 뭐가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또, ‘길이 아니면 갈 수 없다’는 점 때문에 필드 맵의 자유도가 너무 낮습니다.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에 넓은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지나가요. 언덕과 언덕 사이에 있는 길을 갈 때도 언덕에 조금이라도 걸리면 못 지나갑니다.
이동 키를 누르고 있을 때는 다른 어떤 버튼도 작동하지 않는 점도 답답합니다. 보통 MMORPG를 플레이할 때 이동하며 지도를 열어 위치를 파악하거나 하는데, <어스토 온라인>은 그게 안되요. 지도를 열고 이동하면 되지만 역시 답답합니다.
자동 이동 시스템도 지원하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조금만 먼 곳을 클릭해도 ‘너무 멀거나 갈 수 없는 지역입니다’라고 나옵니다. 편하게 해 줄 것이라면 확실히 편하게 해 줘야죠. 어중간하면 차라리 불편한 것보다 더 큰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들은 대폭 수정되어야 할 요소들이 아닐까요.
길이 있는 것 같은데 왜 못가나요?
■ 오픈이 기다려진다. 단, 충분한 담금질 후에
<어스토 온라인>은 오픈 이후 손노리 팬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이 충분하고, 손노리 팬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온라인 게임을 원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오픈이 기다려집니다.
하지만, 충분히 담금질하여 단점을 개선하고, 가장 중요한 콘텐츠를 충분히 확보한 후에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국내 유저들의 무시무시한 콘텐츠 소비 속도를 따라가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이렇게 패키지 성향이 강한 온라인 게임은 더욱 그렇겠죠.
지금으로서는 장기적으로 어떤 재미로 <어스토 온라인>을 플레이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패키지 게임의 향수를 자극하지만, 그 외에 무엇을 통해 ‘롱런’할지 감이 잘 안 잡히거든요.
반대로, 말하면 장기적인 콘텐츠만 확보한다면 멋진 온라인 게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스토 온라인>의 다음 테스트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힘내요~ 패스맨!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