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팩이 계속 나와도, 무대를 바꿔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는 <WoW>였습니다. 미국 블리자드 본사에서 체험한 새로운 확장팩 <판다리아의 안개>는 <WoW>가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메인 스토리에 집중하고 자신의 행동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 가는 주변상황을 보여주는 진행방식은 플레이어가 이야기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왔고, 미니게임을 통해 지나친 반복전투도 피했습니다. 등장인물의 갈등과 원치 않는 전쟁준비를 통한 찝찝함도 안겨줬죠.
다만, 너무 단순하게 바뀐 특성 시스템과 지나치게 획일화된 진행 때문에 약간의 답답함도 느꼈습니다. 지난 15일(미국시간) 블리자드 본사에서 4시간 동안 <판다리아의 안개>의 최신 버전을 플레이해 봤습니다. /어바인(미국)=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스톰스타우트 던전에서는 첸과 함께 전투를 벌일 수도 있습니다.
■ 미쳐 가는 가로쉬, 전쟁을 준비하라!
<판다리아의 안개> 체험은 약 4시간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원활한 플레이를 위해 모든 직업의 레벨 85짜리 캐릭터가 준비돼 있었고, 진영은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선택한 캐릭터는 레벨 85의 호드 판다렌 수도사입니다. 따라서 이번 체험기 역시 호드 플레이어의 입장에 맞춰져 있습니다.
<판다리아의 안개>는 성난 가로쉬의 보고와 함께 시작됩니다. 오그리마의 수장 가로쉬는 다른 호드 대도시의 재정악화를 보며 크게 분노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롭게 발견된 대륙인 판다리아로 향하던 자신의 배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가로쉬는 보고담당자를 집어 던진 후 플레이어와 부관 나즈그림 장군에게 자신의 배를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배 안에 가로쉬가 숨겨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즈그림과 플레이어는 항해를 시작하지만 난데없는 폭풍우에 배를 잃고 판다리아의 옥림 북쪽에 추락하게 됩니다. 본격적인 판다리아 모험의 시작이죠.
나즈그림 장군을 포함한 생존자들을 구해 정비를 마치고 나면 모두들 호드 본국으로 연락을 취할 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고 미지의 종족이 살고 있는 판다리아를 소수의 생존자만으로 탐험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결국 나즈그림 장군은 주변의 멍청해 보이는 원숭이 종족 ‘호젠’을 꼬셔서 아군으로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호젠을 꼬시는 일은 쉽지만 ‘찝찝’합니다. 일부러 덫을 만들어 호젠을 가둔 후 시치미를 뚝 떼며 나타나 호젠을 풀어주고 선심을 사는 방법이죠.
플레이어의 잔꾀에 넘어간 호젠은 마을에 오크 생존자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나즈그림은 이곳을 토대로 본격적인 판다리아 정찰을 시작합니다. 그때 생존자들이 호젠의 적대세력인 양서류 인간 ‘진위’들이 얼라이언스와 손잡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호젠과 호드, 진위와 얼라이언스 연합의 충돌이 시작됩니다.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에너지 ‘샤’가 판다리아를 감싸고 가로쉬는 얼라이언스를 꺾기 위해 살육기계에 가까운 수준의 병사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머나먼 대륙인 판다리아에서도 전쟁의 불길이 일어납니다. 여기까지가 <판다리아의 안개>의 초반 이야기입니다.
블리자드는 <판다리아의 안개>를 통해 분쟁과 폭력의 나쁜 점들을 보여주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있지만 나름대로 평화롭던) 판다리아 대륙은 호드와 얼라이언스의 침입으로 전쟁에 휩싸이고, 판다리아의 토착민족들은 최전선에서 싸우기 시작합니다.
이번 체험판에서는 즐길 수 없었지만 이후 전쟁이 지속되면서 판다리아의 위기는 점점 심해질 예정됩니다. 여기에 전쟁에 미친 가로쉬의 변화도 보여줍니다. 플레이어는 토착민족을 선동해서 전쟁에 뛰어들게 하는 과정의 선봉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마냥 세상을 구한 용자가 아니라 ‘어딘가 현실적이면서도 찝찝한 이야기’입니다.
■ 확실해진 메인 스토리와 미니게임 천국
<리치왕의 분노>에서 순간적인 인스턴스 지역을 만들고, <대격변>에서 다양한 미니게임과 인 게임 영상을 선보였던 시나리오 전개방식은 <판다리아의 안개>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판다리아의 안개>에서는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변화하는 주변환경을 시시각각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판다리아에 막 도착했을 때 적대적이던 호젠들은 환심을 살수록 친하게 바뀌고, 이야기에 따라 마을이 생겨나고 NPC도 늘어납니다.
미니게임 방식의 퀘스트도 대폭 늘었습니다. 블리자드가 완전히 재미를 붙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4시간 동안 약 10개의 미니게임 퀘스트가 나오더군요.
미니게임의 진행방식도 다양합니다. 다른 NPC의 시점에서 게임을 진행하는 건 기본이고 판다렌을 만나서 정신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명상하거나, 아군 정찰병이 목적지점에 도착할 수 있도록 적을 저격하고, 번지점프를 이용해 절벽 아래의 아이템을 건져와야 합니다. 수련과정에서 통나무를 오가며 전투를 벌이고, 빠르게 물 위를 달리는 정령을 붙잡는 미니게임도 있죠.
전투와 미니게임의 분량을 적절히 섞고, 매번 다른 종류의 미니게임을 배치함으로써 주객이 전도되거나 미니게임에 오히려 질리는 경우도 방지했습니다. 목적지까지 이동하면서 몬스터를 처치하고 목적지에서는 미니게임을 하는 방식이랄까요?
특히 이야기 처리에도 많은 공을 들였는데요, 호드와 얼라이언스 모두 유난히 과거의 일을 보여주는 미니게임 방식의 퀘스트가 많습니다. 영상으로 틀어주면 전부 넘기니까 아예 게임의 일부로 만든 듯한 느낌이 팍팍 듭니다.
여기에 게임도 메인 스토리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퀘스트 내용을 일일이 읽지 않아도’ 스토리가 술술 머릿속에 들어옵니다. 다만 게임의 자유도는 확 낮아졌습니다. 메인 퀘스트를 풀지 않으면 다음 퀘스트는커녕 NPC조차(심지어는 마을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한 탓에 좋든 싫은 스토리만 따라가야 하죠.
실제로 체험판에서는 호드의 일부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없는 버그가 있었는데요, 그 순간 게임진행이 아예 막혀버렸습니다. 좋게 말하면 머리에 잘 들어오는 스토리이고 나쁘게 말하면 소소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즐기는 재미가 사라졌다고나 할까요. 물론 확장팩의 초반 부분이니 일부러 획일화된 진행을 보여줄 가능성도 있습니다.
■ 차별화가 뚜렷해진 전문화와 특성
새롭게 바뀐 특성은 확실히 ‘달라졌다’는 느낌을 줍니다. <판다리아의 안개>에서는 기존의 특성 트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전문화와 새로운 특성 시스템이 채웠습니다. 모든 캐릭터는 레벨 10에 직업에 따라 준비된 3가지 전문화 중 하나를 골라야 합니다. 기존의 특성 탭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전문화에 따라 같은 직업이라도 배우는 기술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전사가 무기 전문화를 선택하면 필사의 일격, 격돌, 소용돌이, 제압 등을 배우지만 분노 전문화를 선택하면 피의 갈증, 분노의 강타, 티탄의 손아귀 등을 배웁니다. 물론 전문화와 상관없이 공통으로 쓸 수 있는 스킬도 있습니다.
전문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10가지 이상 바뀌기 때문에 기존의 특성보다 확실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특성일 때 이 스킬을 쓰면 좋다’는 수준에서 ‘이 전문화에서는 이 스킬만 써야 한다’는 수준으로 바뀐 거니까요.
같은 직업을 아예 3개의 세분화된 직업으로 나눈 셈이랄까요? 물론 전문화도 특성과 마찬가지로 캐릭터마다 2개씩 선택할 수 있고 언제든지 초기화할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선택만 하는 셈이죠.
캐릭터의 차이를 결정짓던 특성은 매우 단순해졌습니다. 특성은 레벨 15마다 하나씩 주어지며 3가지 특성 중 하나를 무조건 선택해야 합니다. 판다렌의 예를 들면 레벨 15에는 구르기를 쓸 때 소비하는 기를 없애는 직감, 구르기를 할 때마다 10%씩 이동속도를 올리는 셀레리티, 더 멀리 구르기를 할 수 있는 모멘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레벨 45에는 마비 거리를 늘리는 데들리리치와 전방의 적을 기절시키는 차징옥스웨이브, 주변의 적을 모두 쓰러트리는 레그스윕 중 하나를 배울 수 있죠. 이 밖에도 자신이 모을 수 있는 공력의 한계를 높이거나 공력을 강제로 올리는 특성 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블리자드는 이른바 ‘국민특성트리’가 싫어서 특성을 개편했다고 밝혔는데요, 레벨마다 사용법은 달라도 특성의 효과들이 ‘결국은 비슷한’ 탓에 이전보다는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의 특성이 종류는 많아도 획일화된 몇 가지만 쓰였다면 이번 특성은 아예 선택의 폭을 줄이고 대신 모든 선택이 사용될 수 있도록 유도한 느낌입니다. 물론 블리자드의 예상대로 될지는 <판다리아의 안개>의 레이드가 활성화 돼봐야 알 수 있겠죠.
우람한 체격을 가진 호드 진영의 판다렌.
■ 연계기와 독특한 스킬의 재미, 수도사
수도사는 작년 블리즈컨과 지스타에서 공개됐던 모습과 약간은 달라졌습니다. 우선 다른 직업처럼 일반공격이 다시 생겼고 라이트포스와 다크포스가 공력이라는 하나의 게이지로 통일됐습니다. 덕분에 조금은 ‘평범한 직업’이 된 느낌도 들더군요.
기본적으로는 기 혹은 마나를 사용해 공력을 모으고 이렇게 쌓인 공력으로 적에게 강력한 스킬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도적과 비슷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공력이 쌓이는 방식이죠.
수도사는 양조·경공·환술 3가지 전문화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습니다. 양조는 방어, 경공은 공격, 환술은 치유에 특화된 특성이죠. 혼자서 탱커와 힐러, 딜러가 모두 가능하다는 뜻인데요, 역할이 확실한 만큼 전문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스킬도 매우 달라집니다. 심지어 환술은 기 대신 마나를 사용할 정도죠.
다만 어떤 전문화 트리를 타더라도 스킬과 스킬이 이어지는 ‘연계’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수도사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양조 전문화를 선택한 후에는 무기 막기 이후 흑풍각을 공력의 소비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범의 장풍을 사용한 후에는 방어자세가 5% 강력해지죠. 경공 전문화에서는 때려눕히기 이후 일정확률로 흑풍각과 범의 장풍을 공력 소모 없이 쓸 수 있습니다.
특히 경공 전문화에서는 연계기가 발동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쉴 새 없이 적을 때린 후 추가공격을 이어 나갈 수 있습니다.
수도사는 상황에 따라 효율이 달라지는 스킬이 많습니다. 공격능력이 전혀 없는 구르기를 쓰면 상황에 맞춰 잽싸게 상대방의 뒤를 잡거나 전투에서 벗어날 수 있고, 비룡각은 정면을 향해 엄청난 거리를 빠르게 날아갑니다. 사용 후 한 번 더 발동하면 그 자리에서 주변의 적을 내려찍죠.
이 밖에도 주변의 적을 공격하는 회전 학다리차기, 자신보다 생명력이 적은 몬스터를 한 방에 처치하는 죽음의 손길, 적을 그 자리에 고정시키는 옥화난만 등은 잘 쓰면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하면 안 쓴 것보다도 못한 스킬들입니다. 덕분에 콘트롤에 따라 전투효율이 많이 달라집니다.
탐 칠튼 게임 디렉터가 “격투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들에게 사랑 받는 캐릭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이유를 알겠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