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군주>라는 모바일 RPG가 출시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다. 자동전투가 있고, 영웅을 키우기 위해 던전을 돌고, 던전을 돌기위해 영웅을 키우는, <도탑전기> 류의 ‘흔한 게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게임, 막상 해보니 ‘흔한 게임’이 아니다. 다른 모바일 RPG에서 하던 버릇대로 자동전투 걸어놓고 딴짓 하다가 보면 어느새 패배 화면이 반겨준다. 본 기자의 경우 플레이 첫날, 일반 던전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3장 2스테이지에서 첫 패배 화면을 보았다.
자동전투가 있지만 자동전투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 희한한 게임 <심연의 군주>. 도대체 이 게임의 정체가 뭘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디스이즈게임이 직접 플레이해 봤다.
■ 잊고 있던 직접 조작 공략의 맛, 스토리 던전
일반 모바일 RPG에서 일반 던전은 게임 진행의 기초이자 발판이다. 그래서 유저가 일반 던전 때문에 이탈하지 않도록, 영웅 레벨/등급 등의 소위 ‘스펙’만 갖춰지면 자동전투로 무난히 클리어 할 수 있다.
하지만 <심연의 군주>에서 일반 던전인 ‘스토리 던전’은 그렇지 않다. 무난히 스펙을 갖추고 자동전투로 진행하다 보면 얼마 못 가서 금방 막힌다. ‘단순히 운이 없어서 한 번 그런 건가?’ 싶어 몇 번을 다시 자동전투로 도전해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유저는 황당한 마음을 추스르고 전투 화면을 처음부터 끝나지 보고 나면 깨닫는다. ‘뭐야 이거, 직접 조작해야 클리어할 수 있는 스테이지잖아?’
유저가 직접 함정을 피하도록 만들어진 위 던전처럼, <심연의 군주> 스토리 던전은 다른 모바일 RPG에서 보기 힘든 구성을 가지고 있다. 스테이지 상당수는 고유의 ‘공략법’이 있고, 그 공략법을 따르지 않으면 단순히 스펙이 높은 것과 자동전투만으로는 클리어 되지 않는다.
길고 지루하게 글로 설명하면 와 닿지않을 테니, 실제 스토리 던전의 스테이지들을 짧은 동영상으로 확인해보자.
위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피하지 않으면 진행이 안 되는 트랩, 물리/마법 공격이 통하지 않는 적, 보스를 강화하거나 치유하는 후방 몬스터, 제한 시간 동안 보호해야 하는 NPC, 맞으면 귀찮은 광역 장판 공격, 모습이 보이지 않아 광역 스킬로 공격해야 하는 은신 몬스터 등 다양한 장애물이 스테이지를 어렵고 까다롭게 만든다. 주로 자동전투에 불리한 방향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런 자동전투로 깨지지 않는 던전을 직접 조작으로 클리어하고 얻는 기쁨은 상상 이상이다. 단순히 어려운 장애물을 넘었을 때 느껴지는 기쁨을 넘어서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손에 넣은 승리의 성취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 자신을 꽤나 고생시킨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보는 클리어 화면은 더 특별하다.
하지만 마냥 어렵고 까다롭기만 하면 유저가 스트레스 받거나 좌절을 느끼게 되어, 결국 게임을 그만두기까지 이른다. 다행히 <심연의 군주>는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를 공들여 게임 내에 배치해놨다.
가장 크게 눈에 띄는 요소는 전투 내의 ‘연출’이다. 만일 어떤 장애물이 있다면, 그 장애물이 어떤 위치에 어떤 크기로 있는지 등을 알아야 도전할 마음이 생기게 된다. 넘을 가능성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무모하게 도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연의 군주>는 장애물의 정보를 유저에게 전달하기 위해 연출을 강화했다. 장애물은 맵과 구분하기 쉽고, 적의 스킬(광역 장판/보스 강화/보스 치료)도 언제 쓰고 어떤 효과를 주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덕분에 한 번 부딪혀보면 클리어 ‘각’이 쉽게 보인다.
실패의 부담을 줄이고 재도전을 유도하는 안전장치는 이외에도 많다. 스테이지 입장 화면과 패배 화면에서 간단한 공략 팁을 알려준다거나, 패배화면에서 해당 스테이지를 공략해놓은 공식 카페 페이지로 연결해주거나, 입장 행동력이 얼마든지 간에 패배하면 1만 소모된다.
이렇게 여러 겹으로 설치된 안전장치들은 유저가 살짝 휘청거리기만 해도 옆에서 잡아주므로, 넘어져서 다칠 걱정 없이 마음껏 도전하여 결국에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 뚫어야 한다 vs 막아야 한다, 공방전
<심연의 군주>에는 스토리 던전 외에도, 최근 모바일 RPG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마을 콘텐츠가 있다. 생산 건물을 지어 자원을 획득하고, 방어 건물과 방어 병력을 배치하여 침략을 막고, 공격 병력으로 다른 마을을 침략하는 등 기본에 충실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 기본 위에, <심연의 군주> 특유의 ‘전략’과 ‘공략’을 얹은 것이 바로 공방전 콘텐츠다.
공방전은 인공지능이 지키는 다른 유저의 마을을 침략하고, 그 결과에 따라 방어 측 자원을 약탈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단순한 콘텐츠다. 하지만 방어 건물과 병력 간 서로 물고 물리는 상성 관계 때문에 그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각각 다섯 종류의 방어 건물과 병사는 공격 형태, 사거리, 체력 등이 전부 다르므로 가위바위보처럼 상성 관계가 생긴다. 예를 들면 사거리는 짧지만 공격력이 높은 화염 타워는, 근접 병사&영웅에 강하고 원거리 병사&영웅에 약하다. 그리고 체력이 높은 방패병은 대부분의 병사와 건물의 공격을 잘 버티지만, 발리스타 타워의 밀어내기에 힘을 못 쓴다.
제한된 공간에 방어 건물을 짓고 제한된 슬롯에 방어 병사와 영웅을 넣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상성 관계는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 이 상성 관계 덕분에, 공격 측과 방어 측의 배치에 따라 전투 시작 전에 이미 승부가 결정되기도 한다.
전투가 시작되면 스토리 던전처럼 직접 조작을 통한 공략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전투 시작 전에 아무리 전략을 잘 짰다고 해도, 자동전투로 쉽게 이길 정도로 공방전이 만만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정거리가 짧은 방어건물이 많다면 원거리 영웅으로 교체해야 하는 간단한 상황, 생산 건물을 방패막이로 앞세운 방어 건물은 직접 타겟팅해서 먼저 철거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 등은 자동전투가 아닌 직접 조작으로만 대처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조작 덕분에 불리한 상황을 뒤집고 이겼다면 스토리 던전에서와 비슷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바로 그 느낌말이다.
■ 유통기한이 지나면 급격히 흐려지는 재미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심연의 군주>는 다른 게임과 달리 까다롭고 어려운 장애물을 직접 넘어야만 느껴지는 ‘성취감’을 주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리고 이 성취감은 재미로써 유저에게 꽤 잘 전달되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성취감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같은 과정을 반복했을 때 동일한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한 번 극복한 장애물은 더이상 장애물이 될 수 없고, 그 순간 성취감의 ‘유통기한’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일회성에 가까운 성취감을 제공하는 게임은, 유저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제시해줘야 하며 그 사이사이에 유저가 지치지 않도록 섬세하게 케어해줘야 한다. 어떻게든 유저가 재미의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느끼지 않도록 말이다.
그렇다면 <심연의 군주>는 유통기한에 대한 대처를 잘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대처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메인 콘텐츠이자 핵심 콘텐츠인 스토리 던전이다. 성취감의 유통기한이 끝난 과거 스테이지에 유저가 들어갈 이유는 없으니, 유저는 더 높은 단계의 스테이지에 도전한다. 당연히 높아진 적 능력치에 맞춰 영웅을 육성해야 하는데, 유저는 그러기 위해 과거 스테이지를 반복 클리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과거 스테이지를 클리어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 유저는, 자연스럽게 손쉬운 소탕과 자동전투를 선택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자동전투를 사용하지 않고 얻는 재미를 위해, 자동전투를 적극 사용해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수동전투가 자동전투보다 더 가치 있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각각 고유한 장점이 있으므로 둘 다 가치가 있지만,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양립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수동전투의 재미를 극대화한 <심연의 군주>의 매력 때문에 플레이하는 유저에게, 자동전투를 적극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위화감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자동전투를 통한 파밍의 시간이 짧은 플레이 초반에는 괜찮지만, 적의 능력치가 높아져 파밍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후반에는 위화감을 느끼기 쉽다.
물론 위화감이 들어도 자동전투와 파밍이 재미있기만 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심연의 군주>의 자동전투와 파밍은 재미 요소가 높지 않다. 무한던전이라는 대량의 골드 수급처가 있으므로 골드를 모으는 재미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며, 스토리 던전에서는 낮은 등급의 장비만 나오므로 득템의 재미조차 느끼기 힘들다.
결국 유저에 따라 그 시점은 다르겠지만, 총 120개의 스토리 던전을 진행하면서 성취감보다 스트레스가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 높은 확률로 온다. 유저가 <심연의 군주>가 주는 재미의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느끼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말이다.
공방전도 유통기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분명히 공격 측과 방어 측의 경우의 수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므로 중복되지 않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나올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전략을 통한 공략이 의미가 있으며 재미있게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그 즐거움의 유통기한은 초중반까지다. 공격 측과 방어 측의 전략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일종의 장애물이다. 다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초반에는 공/방 쪽 전략이 다양하므로, 다양한 장애물을 넘어서는 성취감이 크게 느껴져서 재미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방전은 실시간 PVP 전투가 아니라 방어 측이 인공지능인 PVE 전투. 패턴화된 인공지능이 상대라면 효율이 특히 높은 전략이 반드시 나온다. 결국 중후반에 접어들면 공방전의 전략은 소수의 몇 개로 압축되고, 양쪽의 전략이 어느 정도 고정되면 장애물로서의 유통기한은 끝난다.
설상가상으로 공방전은 유통기한이 끝났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가볍게 클리어할 수 있는 콘텐츠도 아니다. 보상이 짭짤한 편이라 매일 일정 회수를 클리어 해야 하는데, 승리 조건이 적 건물을 전부 부수는 것이라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른 콘텐츠가 1~2분 정도만 소모되는 데 비해, 공방전은 전투력이 비슷해도 3~5분이나 소모되므로 체감 시간은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유저가 느끼기에 중후반의 공방전은, 성취감 없이 의무적으로 클리어해야 하지만 시간마저 오래 걸리는 지루한 콘텐츠가 된다.
■ 기대가 있기 때문에 아쉬운 법. 앞으로가 중요한 <심연의 군주>
<심연의 군주>에서 얻을 수 있는 '직접 조작을 통한 공략의 성취감'은 최근 모바일 RPG 중에서도 상당히 귀하다.
다른 모바일 RPG도 유저에게 성취감을 주긴 하지만, 그것은 게임 속 캐릭터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진 성취감이다. 그와 달리 <심연의 군주>의 성취감은 유저 본인의 개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모바일 RPG에 녹여내기 힘든 후자의 성취감을 선택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나아가 유의미한 결과물을 낸 것은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다.
마지막에 이런저런 아쉬운 점을 언급하긴 했지만, 이것들이 <심연의 군주>의 근본적인 재미인 성취감을 깎아내리는 건 아니다. 단지 성취감을 지속해서 제공해야 하는 측면에서 ‘뒷심’이 부족할 뿐. 그래서 단점들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공략이 필요한 던전을 더 많이 추가한, 자동전투를 통한 영웅 육성의 스트레스를 좀 더 줄인, 갈수록 지루해지는 공방전을 지루해지지 않게 보강한 <심연의 군주>은 어떤 모습일까?
모든 모바일 RPG가 그렇듯 <심연의 군주>도 서비스가 끝날 때까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서비스를 하는 동안에는 장점을 더 발전시킬 수 있고, 단점을 보완해 나갈 수 있다. 수많은 모바일 RPG의 홍수 속에,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심연의 군주>의 앞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