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한 달 전 <테세우스 프로토콜>을 소개하던 해외 커뮤니티 글 중엔 '지금까지 카드 게임에 부족했던 건 미소녀와 총이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카드 게임 마니아 입장에선 이 말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미소녀 카드 게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타이틀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총기 전투 설정도 이미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니컬한 생각과는 다르게 손은 이미 스팀 페이지로 향했고 지난 12월엔 베타 버전을, 1월엔 얼리 액세스 버전을 플레이했다. 로그라이트 덱빌딩 게임 <테세우스 프로토콜>은 대체 어떤 매력이 있는 게임인지 직접 들여다보고 판단하자는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이번 리뷰는 <테세우스 프로토콜>의 얼리 액세스 버전을 기준으로 작성했다.
<테세우스 프로토콜>은 10장의 기본 덱으로 시작해 턴제 배틀로 스테이지를 진행하며, 카드 세트를 선택해 더 강한 덱을 만들어 적을 상대하는 싱글 플레이 게임이다. 로그라이트 답게 랜덤한 보상을 얻으며 플레이하는 구조는 잘 살리면서도 <테세우스 프로토콜>만이 가진 독특한 시스템을 많이 담았다.
기본 체력 100이 0이 되는 순간 패배하며 스테이지 진행은 그 자리에서 끝난다. 개별 전투 안에선 체력 외에도 카드나 아이템, 장비 효과 등을 활용해 얻을 수 있는 실드와 아머가 있다. 실드와 아머는 수비적인 플레이에만 사용되지 않고, 보유한 실드 수치의 반만큼 적에게 대미지를 주는 등 공격적인 전술에도 사용된다.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체력 관리가 꽤 어렵기 때문에 전투 내내 공격과 방어를 모두 잘 챙겨야 한다.
전투 중에는 '덱'(Draw pile)과 '버려진 카드(Discarded)', '소진된 카드(Exhaust pile)' 3곳에 카드가 보관된다. 턴이 시작될 때 덱에서 카드를 뽑아 패 5장을 쥐고 시작하고, 사용한 카드 외에 손에 남아있는 카드는 턴이 끝날 때 모두 버려진다. 일반 카드는 효과를 발동하고 나면 버려지고, 소진이라는 키워드가 있는 카드는 효과 발동 이후 소진된 카드 뭉치로 들어간다. 덱이 한 사이클을 돌고 나면 버려진 카드들은 덱으로 돌아가 다시 드로우 되고, 한번 소진된 카드는 다시 사용할 수 없다.
<유희왕> 시리즈의 묘지, 제외 개념과 유사한 이 키워드들은 비슷한 활용 방식도 보여준다. 버려진 카드와 소진된 카드 수에 따라 효과가 강해지는 카드도 있고, 소진된 카드 일부를 다시 패로 가져오는 특수 효과도 존재한다.
기본 캐릭터인 샬롯은 총을 두 자루 소유한 채 시작하며, 전투 중엔 카드 효과 외에도 무기를 사용한 공격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패에 있는 카드를 길게 우클릭하면 카드를 무기 장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장전에 사용된 카드는 소진된다. 최대 장전 스택보다 더 많이 장전해 과부하 상태로 만들어 큰 대미지로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무기는 공격 이후 쿨다운 상태가 되며 일정 턴 동안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보상으로 얻는 '데이터 모듈'을 활용해 무기의 칩세팅을 강화하는 로그라이트 요소도 있다. 칩세팅은 단순한 대미지 강화 외에도 '무기를 사용할 때마다', '무기가 과부하 상태일 때', '쿨다운 턴 수를 늘리는 대신 더 큰 대미지를 주는' 등 여러 조건으로 무기 활용 전략을 다양하게 만든다.
액션 포인트는 한 턴에 3코스트 주어지며, 각 카드 좌상단에는 액션 포인트 코스트가 적혀있다. 카드 군은 크게 빨간색의 공격 카드, 파란색의 실드 카드, 노란색의 불릿(총알) 카드로 나뉘며, 아군이나 적에게 카드를 드래그하여 대상을 지정해 사용한다. 우클릭을 활용한 무기 장전의 경우 카드 우상단에 장전 코스트가 표시되며, 무기를 활용한 장전과 공격은 액션 포인트를 소모하지 않는다.
<테세우스 프로토콜>은 후방, 중간, 전방으로 나뉘는 위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동에는 액션 포인트 1코스트가 소모되며 위치에 따라 적에게 받는 대미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근접전(Melee)라는 키워드가 있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적만 공격할 수 있는 카드들이 있는데, 대상 지정이 강제되는 대신 효과가 더 강력하다. 적을 이동시키는 카드도 있는데 적끼리 부딪치는 충돌(Collision)과 대상을 벽에 부딪치는 슬램(Slam)으로 추가 대미지를 노릴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카드 배틀이 중심이 되는 덱빌딩 로그라이트 게임은 초반 학습 난이도 조절을 위해 일반 카드의 스탯 위주로 운영하는 기본 캐릭터를 먼저 플레이하게 유도한다. 플레이어가 전투 룰에 익숙해지면 그 후에 더 복잡한 카드 효과와 캐릭터를 제시한다. <테세우스 프로토콜>의 캐릭터 배치도 샬롯, 네나, 안티오페 순으로 더 어렵게 설정해뒀지만, 기본 캐릭터인 샬롯을 플레이할 때부터 게임은 쉽지 않았다.
샬롯으로 진행한 1회차 플레이 때는 카드 효과를 읽느라 시간이 한참 지나갔다. 앞서 설명한 기본 전투 시스템도 이 장르의 입문자에겐 쉽지 않은 편인데, 카드와 전투에 활용되는 키워드도 매우 많고 복잡하다. 아래는 주요 키워드들을 정리한 목록이다.
실드, 아머 관련 주요 키워드
카운터어택(Counter Attack): 해당 수치만큼 플레이어를 공격한 적이 대미지를 입는다. 이 수치는 턴이 끝날 때마다 반으로 줄어든다.
벗겨짐(Peeled): 실드를 잃는다.
나노실드(Nano Shield): 실드를 얻을 때마다 이 수치만큼 추가로 실드를 더 얻는다.
공격 카드 관련 주요 키워드
용맹(Valiance): 공격 시 이 수치만큼 추가 대미지를 준다. 해당 배틀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취약점(Vulnerable): 공격 시 이 수치만큼 추가 대미지를 준다. 이 수치는 턴이 끝날 때마다 반으로 줄어든다.아드레날린(Adrenaline): 공격 시 이 수치만큼 추가 대미지를 준다. 턴이 끝날 때 0으로 초기화된다.
지속 충격(Periodic Shock): 턴이 끝날 때 이 수치만큼 대미지를 준다. 이 수치는 턴이 끝날 때마다 반으로 줄어든다.
근접전(Melee):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적만 대상으로 지정 가능하다.
파워리스(Powerless): 이 효과가 부여된 적의 다음 공격은 대미지가 반이 된다.
프레스티지(Prestige): 대미지를 입을 때 이 수치만큼 덜 받는다. 해당 배틀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플래시(Flash): 한번 사용하고 나면 이어지는 턴들엔 드로우되지 않는다.
용맹, 취약점, 아드레날린 3개의 키워드와 실드, 나노실드 개념만 봐도 알 수 있지만 하나의 스탯 안에서도 층위가 다양한 키워드가 많다. <테세우스 프로토콜>은 한국어를 지원하지 않아, 영어로 이 카드 설명을 모두 읽어야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하지만 1회차의 고비만 넘기고 나면 여러 키워드에 익숙해진 2회차 플레이 때부터는 훨씬 빠른 전투를 즐길 수 있다.
키워드를 보고 눈치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투 중 카드를 플레이하는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공격력 강화를 먼저 한 후에 기본 공격 카드로 강한 공격을 쏟아붓는 방식부터, 남은 체력과 지속 충격 효과를 고려해 공격 대상을 바꾸는 등 신경 쓸 요소가 많다.
또한 카드에서 카드를 생성하는 효과도 적지 않다. 효과가 다른 3개의 카드를 제시해주고 하나를 선택해 패로 가져오는 카드, 특수 효과를 가진 카드를 덱에 몇 장씩 넣는 카드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키워드를 정리하지 않은 불릿 카드군은 특히 다른 불릿 카드를 손으로 가져오는 효과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불릿 카드의 경우 무기에 장전되는 순간에 적에게 데미지를 주는 효과를 가진 카드도 있다.
<테세우스 프로토콜>의 복잡한 전투 시스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특정 전투에선 화면 우상단에 표시되는 전장 효과가 있는데, '매 턴이 끝날 때마다 실드가 줄어든다'거나 '턴이 끝날 때마다 모든 유닛에게 일정 대미지를 가한다' 등의 전투 조건이 붙는다. 일부 적은 플레이어를 공격할 때 어지러움(Dizzy) 등 상태 이상(Debuff)을 부여하기도 한다.
아이템과 장비 개념도 있다. 아이템 인벤토리는 3칸이며 소모품이고, 장비는 캐릭터가 사망하기 전까지 계속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얻는 크레딧으로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고, 일부 전투에선 전리품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아이템과 장비의 효과도 전투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르고 구매해야 한다.
기본 캐릭터인 샬롯이 아닌 네나를 플레이하면 무드(Mood)라는 개념이 전투에 추가된다. 무드에 따라 패에 바이러스 카드가 추가되거나, 공격 시 추가 대미지가 붙고, 상태 이상을 없애기도 하는 등 부가 효과가 많다. 또한 네나는 전투 보조 기계를 인접한 칸에 소환하는 전술도 사용한다.
샬롯이 두 개의 무기를 번갈아가며 활용했다면, 네나는 스팅이라는 캐릭터로 변신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스팅의 공격은 여러 적을 동시에 타격할 수 있고, 변신은 두 턴만 유지된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안티오페의 경우 더 어려운 플레이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캐릭터들이 기본 체력이 100인 것과 달리 안티오페의 체력은 30이며, 총 대신 칼을 사용하기 때문에 새로운 카드들을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소 복잡하지만 <테세우스 프로토콜>의 전투 시스템에 한 번만 적응하고 나면 파고들 요소가 끊임없이 있다는 점에선 큰 장점이다. 하지만 카드 게임 또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유저들에겐 적응해야 할 짐이 더 늘어나는 역효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소녀와 총' 중에 총은 전투 시스템에서 이미 충분히 증명됐지만, 미소녀는 어떨까? 정지된 일러스트로 볼 때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지만, 인게임 전투 화면으로 보는 캐릭터는 다소 생동감이 부족했다. 개별 카드 디자인이 꽤나 깔끔하고 매력적인 것에 비해, 카드를 던지는 동작이나 무기를 사용해 공격하는 모션은 심심한 편에 속한다. 배경 음악이나 효과음도 전투에 긴장감을 부여하기엔 아쉬운 수준이었다.
스토리 또한 마찬가지다. 스테이지를 진행하면서 이벤트로 등장하는 스토리는 이미지 한 장에 장문의 텍스트를 띄우는 방식을 활용한다. 선택지가 제공되고, 어떤 선택지를 고르는지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는 상호작용은 있지만, 그 이상의 적극적인 연출은 없다. 샬롯, 네나와 같은 캐릭터를 비롯해 충분히 매력을 어필할 만한 배경 요소들이 있지만, <테세우스 프로토콜>은 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는 카드 배틀 자체가 가진 흡인력이 더 크게 다가왔다.
모든 게임이 보편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높은 학습 난이도를 바탕으로 개발사가 카드 게임에 익숙한 유저를 메인 타깃으로 삼은 것도, 카드 배틀에만 모든 개발 에너지를 쏟아부은 것도 마찬가지다. <테세우스 프로토콜>이 잘 만든 게임이냐는 측면에선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고 보지만, 재미있는 게임이냐는 측면에선 즐길 유저층이 분명 있다고 말하고 싶다. 스토리나 캐릭터 어필 요소가 적어도 카드 배틀 자체가 재밌었기 때문이다.
스타시커 스튜디오(Starseeker Studio)에서 개발하고 아카이브 게임즈(Archive Games)에서 배급하는 로그라이트 덱빌딩 게임 <테세우스 프로토콜>은 2023년 1월 17일 얼리 액세스로 출시됐다. 이틀이 지난 현재 62개의 스팀 리뷰 중 70%에게 긍정 평가를 받은 '대체로 긍정적' 게임이다. 얼리 액세스 정가는 11,000원이며 1월 25일까지 10% 할인된 9,900원에 판매되고 있다.
카드 게임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입문자에겐 선뜻 추천하기 어렵지만, 높은 난이도에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 유저에겐 이 게임을 추천한다. 얼리 액세스 게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스토리나 애니메이션, 음악 연출은 개선될 여지가 있으니, <테세우스 프로토콜>만의 독특한 전투 시스템이 마음에 든 유저는 긴 안목으로 이 게임의 업데이트를 지켜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