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은 대체 에너지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1980년대 중반은 LPG 가스가 등장했다. 연탄이 서서히 밀려났다. 그녀의 남편은 제약회사를 다니면서도 이 추세에 관심을 가졌다. LPG 가스를 배달하는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고 있던 탓에 처남과 처의 매형에게 실무를 맡겼다.
사업은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잣집 장남 처남은 성장하지 못했다. 부도가 났다. 흩어져 있던 가스통을 회수할 수 없었다. 빚은 그만큼 더 쌓였다. 그녀의 집 안 여기저기에 노란색 압류딱지가 붙었다. 쫓겨나듯 2층 전셋집으로 이사를 갔다. 동생 탓에 벌어진 일, 그 시절 그녀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아들과 딸은 계속 커나갔다. 그녀는 한때 아침마다 도시락을 5개씩 준비해야 했다. 첫째 아들은 “공부하라”는 소리를 집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구구단을 외지 않고 놀러 나갔을 때를 회초리를 맞은 적 빼고 공부 때문에 야단 맞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했던 말은 단 하나였다. “수업 시간 선생님 말씀에 집중해라.”
자녀들은 큰 사고 없이 자랐다. 모두 대학을 갔다. 첫째는 서울대에 갔다. 둘째와 셋째는 광주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졸업 후 모두 집을 떠났다. 북적이던 집안에는 그녀와 남편 둘만 남게 됐다.
성당 활동은 그녀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줬다. 아이들이 떠난 뒤에는 더욱 그랬다. 생활과 일과의 중심은 아이들의 학교로부터 성당으로 이동했다. 레지오마리애와 산악회 등을 통해 새로운 친구도 많이 얻었다.
둘째가 결혼했고, 손자를 낳았다. 요한이는 외할머니의 품에서 컸다. 그녀를 따라 성당을 다니며 귀여움을 받았다. 그녀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박완서의 소설을 특히 좋아했다. 시간이 나면 성경을 필사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모습을 보아온 요한이는 책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가 됐다.
그녀는 남편에게 졸라 집 근처 텃밭을 일궜다. 작물을 키우는 것은 그녀 몫이었다. 밭에서 직접 키운 고추와 마늘, 깻잎, 파 등으로 일용할 반찬을 만들었다. 밭은 그녀에게 작물원 그 이상이었다. 밭일을 하다 보면 잡스러운 생각이 다 사라졌다. 텃밭 가꾸기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