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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가 4조 원에 인수했던 '번지', 정리해고만 두 번. 어쩌다가?

신작 없는 회사의 숙명일까? 번지의 히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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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주(사랑해요4) 2024-08-06 17:44:37

소니가 4조원을 들여 인수했던 유망 개발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지난 8월 1일, <데스티니> 시리즈로 유명한 게임 개발사 '번지'가 직원의 17%(약 220명)를 감원했다고 밝혔다. 번지는 2022년 연말에도 100여 명의 직원을 해고한 바 있다. 최근 불황으로 인해 여러 해외 게임사가 인원을 줄이고 있지만, 대형 IP를 소유한 회사가 1년도 되지 않아 두 번의 정리해고를 진행했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더불어 최근 독립 게임 매체 '게임파일'은 익명의 직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폭로성 내용을 보도했다. 익명의 직원은 번지가 소니에 매출 기대치를 과장했으며, 정리해고는 수개월 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영진의 무능한 리더십이 이러한 상황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소니가 2022년 '4조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인수했던 회사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번지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번지의 역사부터 찬찬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출처: SIE)


# <데스티니> 시리즈가 여기에 오기까지


번지는 1991년 설립된 전통 있는 FPS 개발사다. 초기에는 <마라톤>(1994)이라는 FPS를 출시해 이름을 알렸으며, 2000년 MS에 인수돼 <헤일로> 시리즈를 통해 Xbox의 전성기를 이끌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 개발사로 도약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번지는 2007년 <헤일로> 시리즈의 IP를 MS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독립했다.

자신들만의 IP를 원했던 번지는 액티비전과 손을 잡고 2014년 <데스티니>를 출시했다. <헤일로> 시리즈의 성과 덕분에 엄청난 관심을 받았던 <데스티니>는 예약 판매와 출시 하루 매출만으로 5억 달러(약 6천억 원) 이상을 벌어들일 정도로 흥행했다. 참고로 <데스티니>는 당시 콘솔로만 판매됐다.

그러나 출시 초기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콘텐츠가 부족했고 스토리는 허무했기 때문이다. <데스티니>가 축적된 업데이트와 콘텐츠로 인해 이용자들에게 큰 호평을 받으며 강력한 IP로서의 입지를 다진 것은 세 번째 확장팩 <더 테이큰 킹>부터였다.


대형 확장팩 <더 테이큰 킹>


2017년에는 후속작 <데스티니 2>를 출시하는 강수를 뒀다. 번지가 명확한 이유를 밝힌 것은 아니나, 게임 시스템과 엔진을 개선하고 신작 출시 효과를 통해 신규 플레이어를 유치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시리즈가 PC로 서비스된 것도 <데스티니 2>부터다.

문제는 전작에서 쌓았던 콘텐츠를 신작 출시를 통해 리부트했던 만큼 <데스티니 2>가 똑같은 문제를 겪었다는 점이다. 게임에는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새로운 넘버링에 열광했던 게이머들은 썰물 빠지듯이 빠져나갔다.

당시 번지의 상황은 정말로 심각했다. 지스타 강연에 따르면 출시 6개월 후 <데스티니 2>의 유저 지표는 "서비스 종료"를 고민할 정도로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전작 <데스티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데스티니 2>가 다시 반등한 방법은 전작과 같았다. 세 번째 확장팩 <포세이큰>을 통해 평가를 반전시키고 이용자를 다시 끌어모았다. <데스티니 가디언즈>라는 이름으로 배틀넷을 통해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2022 지스타 강연에 따르면 <데스티니 2>는 출시 6개월 후 "서비스 종료"를 고민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사진은 번지가 공개했던 유저 그래프 지표. 빨간색 점선은 추세에 따른 예상이다.

하지만, <포세이큰>의 흥행 덕분에 기적적으로 유저 그래프를 끌어올렸다.


# 신작 없었던 번지... 프로젝트는 줄줄이 취소

번지는 현재 <데스티니 2>만을 서비스하고 있다. 그러나 번지가 신작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번지는 한때 신규 IP로 추측됐던 <메터>나 <데스티니 2>의 콘텐츠를 나누는 여러 프로젝트를 인큐베이팅(기획)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 중 빛을 본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나마 상표 출원으로 외부에 이름만 알려졌던 <메터>는 2022년경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번지의 공식 발표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추측해볼 수 있다. 두 번째 해고 소식을 발표할 때, 번지의 CEO '피터 파슨스'는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우리의 목표는 세 개의 세계적 프랜차이즈를 만드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목표 실현을 위해 여러 인큐베이션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시니어 개발 리더를 배치했지만, 결국 이 모델이 너무나 성급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개발 중인 두 가지 게임인 <데스티니>와 <마라톤>(2025)을 위해 스튜디오 구조를 현실적으로 지원 가능한 것보다 더 크게 확장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신규 프랜차이즈를 위해 여러 인큐베이션 프로젝트에 시니어급 개발자를 배치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고, 그런 와중에 <데스티니 2>의 라이브 서비스 유지와 확정된 신작 <마라톤>(2025)을 위한 개발 필요 인력은 계속해서 늘어나 규모를 감당하지 못하게 됐다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2018년 상표 출원을 통해 번지의 신규 IP로 알려진 <메터>
그러나 아무 소식을 발표하지 않다가, 2022년 개발 취소됐다는 보도만 나왔다. 

여기에 2023년 시작된 게임 산업의 급격한 침체, <데스티니 2>의 대형 확장팩 <빛의 추락>의 부정적 평가와 신작 <마라톤>(2025)의 나쁜 테스트 결과가 직격타가 됐다. 위기감에 번지는 차기 확장팩 <최후의 형체> 출시를 연기했다.

<마라톤>(2025) 또한 테스터들에게 부정적 평가를 받아 출시를 1년 연기했다. 본래 <마라톤>(2025)은 2024년 6월 출시 예정이었다. 
피터 파슨스는 "우리는 지나친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후로 재정적 안전 마진은 초과됐고, 적자에 빠져들었다"고 설명했다.


해외 독립 게임 매체 '게임파일'이 취재한 익명의 직원에 따르면 거듭된 부진으로 번지는 2022년 소니의 인수 당시 제시했던 재정적 목표를 반복적으로 놓쳤다고 한다. 한 직원은 "소니가 번지에 과도한 금액을 지불한 것 같다"고 말했다.


# <데스티니> 이용자는 늙었다.


<데스티니>라는 IP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번지는 <데스티니 2> 출시 당시의 교훈 때문인지, <데스티니 3>은 없을 것이라고 선포해 왔다. 여러 강연과 게임쇼에서 번지는 <데스티니> 시리즈의 '빛과 어둠' 서사를 마무리짓는 최종 확장팩 <최후의 형체> 이후에도 <데스티니 2>의 업데이트를 지속할 것이라고 항상 이야기했다.


번지는 <데스티니 2>의 라이브 서비스 업데이트에 집중할 것이라고 늘 강조해 왔다.

하지만 <데스티니>라는 프랜차이즈가 너무나 오랜 기간 서비스됐던 만큼 '노후화'되고 있었다. <데스티니 2>는 1~2년 사이의 주기로 대형 확장팩을 출시해 이용자를 끌어모은 후 하향 안정화되는 이용자 그래프를 보여 왔다.

이런 와중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확장팩도 있었고, 서비스 기간이 길어지며 이용자의 게임 자체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하락했다. 2019년 출시한 <섀도우킵>, 2020년 출시한 <빛의 저편>, 2023년 출시한 <빛의 추락>이 대표적으로 비판을 받았던 확장팩이다.

덕분인지 <데스티니> 시리즈 서사를 마무리짓는 <최후의 형체>가 2024년 6월 출시를 앞두고 예약 판매를 시작했음에도 판매량 자체는 이전 확장팩 <빛의 추락>보다 못하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빛의 추락>의 초기 평가가 나빠 예약 구매자들의 신규 확장팩에 대한 기대감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서비스가 길어지며 게임의 진입 장벽이 높아진 상황에서 신규 이용자층의 유입을 이끌기 위한 시도가 부족한 면도 있었다. 2020년 번지는 <빛의 저편> 확장팩에서 NPC '쇼 한'을 위시한 콘텐츠를 통해 신규 이용자가 게임에 적응하기 위한 단계를 만들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해외 매체 포브스의 취재에 따르면 한 직원은 쇼 한 콘텐츠의 실패 이후 번지는 다시 비슷한 콘텐츠를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데스티니 2>는 '늙은 게임'이 됐다. 포브스가 취재한 한 직원은 "<데스티니 2>의 가장 큰 문제는 이용자층이 '늙었다'는 것이다. 젊은 층을 끌어들이고 싶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니, (경영진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원하는 것이다. <데스티니 3>를 개발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고 말했다.

<빛의 추락>의 나쁜 평가는 이용자들이 마지막 확장팩에 대한 기대를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더불어 번지의 소통과 패치 방향도 이용자들에게 끝없는 비판을 받았다.

마지막 희망인 <최후의 형체>는 성공했을까? 번지는 판매량을 공개하지 않기에 <최후의 형체>가 어느 정도의 흥행을 기록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얕게나마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스팀 동시 접속자 그래프를 통해 보면 <최후의 형체>는 이전 <데스티니 2>의 확장팩이 출시됐을 때와 비슷한 동시 접속자 추이를 유지했다. 10년의 서사를 마무리짓는 결정판이었고, 매체와 이용자의 큰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 대박'까지는 이어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 슬픈 사실은, 한 번지 직원이 게임파일에 "<최후의 형체>가 블록버스터급 흥행을 기록했더라도, 감원은 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누적된 손해가 너무나 컸기에 흥행과 상관없이 구조조정은 예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최후의 형체>는 서사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이야기라는 점에서 큰 호평을 받았지만
이전 확장팩과 비슷한 이용자 그래프 추이를 유지했다. (출처: steamDB)


# 번지의 미래는 <마라톤>에 달렸다.

구조조정 이후로도 번지의 인력은 줄어들 예정이다.

피터 파슨스 CEO의 발표에 따르면 번지는 SIE와의 통합을 진행해 나가고 있다. 향후 몇 분기 동안 직원의 12%(약 155명)가 SIE에 통합될 예정이다. 2020년 번지 인수 당시 소니는 "번지가 라이브 서비스 분야에서 쌓아 온 전문성과 기술을 소니 그룹이 받아들이게 됐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라이브 서비스에 노하우가 있는 직원을 SIE로 통합해 노하우를 흡수하려는 전략이 아닌가 추측된다. 파슨스는 분사를 통해 번지가 새로운 스튜디오를 설립해 PS 스튜디오 내로 소속시켜 새로운 게임을 개발할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SF풍의 액션 게임을 개발할 계획이다.

<데스티니 2> 또한 업데이트를 이어간다. 하지만 포브스의 보도에 따르면 확장팩과 같은 대규모 업데이트는 더 이상 없을 예정이다. 결국 번지의 성패는 2025년 출시를 준비 중인 익스트랙션 FPS 신작 <마라톤>(2025)에 달린 셈이 됐다.

<마라톤>은 번지가 27년 전 출시했던 첫 게임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것이기에,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된다. 과연 번지가 <마라톤>(2025)을 통해 반전에 성공할 수 있을까? 만약 <마라톤>(2025)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세계적 개발사'가 쇠락하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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