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전문 제작사 ‘팝픽’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과거 팝픽에서 일했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불공정한 계약과 과도한 업무, 일러스트 도용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팝픽과 여러 작업을 진행했던 일러스트레이터 ‘흑요석’ 작가가 출판권 회수에 나섰다. 그는 지난 15일 개인 트위터와 네이버 카페 ‘방방곡곡 창작을 배우는 사람들’(이하 방사)에 “출판권을 회수하기 위해 직접 팝픽을 방문하려 한다”는 글을 올렸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기 위해 디스이즈게임은 16일 저녁 ‘흑요석’ 작가를 직접 만났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디스이즈게임 남혁우 기자
※ 작가의 요청으로 사진을 기사에 싣지 않는 점 양해 바랍니다. /편집자 주
■ “내 그림이 나도 모르게 해외에 나가는 걸 보고 싶지 않다”
TIG> 언제부터 팝픽과 함께 작업을 했었는가?
흑요석: 팝픽북스의 일러스트 북인 팝픽 1호와 3호에 참여했었다. 팝픽 3호인 ‘서커스’는 계약할 때 해외진출 부분까지 계약서에 있었는데, 팝픽에서는 관련 내용을 아직까지 알려주지 않고 있다. 또한 출판 계약을 했으면 지금까지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알려줘야 하는데 그에 대한 답변을 전혀 주지 않고 있다.
팝픽 6호는 영어로 번역될 예정이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팝픽이 작가들에게 인터뷰와 튜토리얼을 빨리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팝픽 5호까지도 번역이 됐지만 출판은 안 된 것 같다. 아마 해외에 출판됐다면 지인이나 방사 등을 통해 알게 됐을 것이다.
내가 가장 알고 싶은 건 출판 부수, 판매 부수, 인센티브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장부 정리를 그쪽에서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변호사에게 문의하니 아무래도 팝픽이 장부를 적고 제대로 운영한 것 같지는 않다고 하더라.
그리고 팝픽의 계약서를 변호사에게 보여주니 출판사 쪽에 유리한 불공정 계약이라고 한다. 이 계약서의 불공정한 부분이 송현정 대표가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계약서 작성 방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인지는 그녀만 알 것이다.
흑요석 작가가 참여한 팝픽 3호 서커스. 위의 이미지는 ‘꾸엠’ 작가가 그렸다.
TIG> 출판권을 회수하겠다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뜻인가?
내 작품을 더 이상 찍지 말고, 판매하거나 판권을 남에게 이양하지 말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도의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회사와 일하기 싫은 것이고, 나도 모르게 내 작품이 해외에서 출판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서커스의 계약서 상에는 해외진출에 대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자세한 조항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재계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재계약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TIG> 언제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가?
나도 직접 참가한 것이 아니라 참가했던 작가들에게 들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짚어 보면 지난 2008년 서울비주얼웍스에서 시작한 일러스트 북인 ‘애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이 ‘애플’에 송 대표가 깊게 관계하고 있었다. 당시 작업에 참가했던 작가들에게 들은 바로는 다크 디자인이라는 동인팀 회지에 관여하던 송 대표가 애플을 정식 출판물로 출간하기로 하고 작가를 섭외하고 그림을 받아서 출판사에 연결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출판에 대한 대부분의 일을 그녀가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애플’은 코믹월드 등 동인행사에서 작가들이 합동으로 내는 동인지인 ‘앤솔로지’를 양지로 끌어올려 대중적인 문화로 바꾸는 시도였다. 작가들에게는 정식으로 출판되는 책에 그림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경력과 포트폴리오가 되는 만큼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고료를 받지 않고 축전 형식으로 그림을 보내는 작가도 제법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계약서도 제대로 작성하지 않거나 아예 쓰지 않은 경우도 있고, 일러스트 1장 가격인 5만 원만 받은 작가도 있었다.
TIG> 축전 형식으로 제공한 경우는 계약서를 안 쓰기도 하지 않나?
하지만 축전이 책 내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계약서에 해외진출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외에 자신의 작품이 진출했지만 정작 작가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대부분 인센티브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작가가 공개한 ‘애플’ 계약서(아래)를 보면 해외 진출에 대한 부분이 모호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2조 2. 제 3자의 무단출판행위에 대해서 침해정지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
본건 출판권의 설정지역은 전 세계로 한다.
제4조 인세의지급
해외 판매의 경우 을의 순수익 40%를 1/n(작가)로 나눈 금액을 인세로 지급한다.
이 작가의 경우 이를 토대로 그림 1장당 5만 원의 해외 판매 인센티브를 한 번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추가 판매량과 추가 인센티브에 대한 팝픽의 답변은 듣지 못했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돈을 받지 않거나 5만 원만 받은 작가들은 해외 출판에 대한 인센티브를 받지 못하고, ‘애플’의 해외 출판에 대한 통보조차 듣지 못했다.
‘애플’ 작업 이후 송 대표는 서울비주얼웍스를 나와 팝픽을 차린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존을 통해 판매 중인 ‘애플셀렉션’.
TIG> 당시 그녀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다면 팝픽과 협력할 이유가 없지 않았나?
팝픽을 차린 후 그녀는 “애플을 작업 할 때 여러 문제로 작가에게 인세나 고료가 돌아가지 않은 것이 싫어서 팝픽을 차렸다. 어디에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고료를 지불하겠다. 그리고 해외에 진출하겠다”고 작가들을 설득했다.
아직은 시작하는 단계인 만큼 부족하지만 해외진출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일정 궤도에 오르면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송 대표는 당시 유명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설득과 섭외 작업을 했다. 조금이라도 인맥이 닿아 있는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끊임 없이 접근했다. 그런 접근에 질려서 그림을 그려준 작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가들도 자신의 직업이나 상황에 상관없이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엔 팝픽이 아니면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물로 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순수 미술을 하는 사람들과는 조금 방향이 달라서 그들의 책에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입시미술 책에 그림을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TIG> 들어 보니 제법 오래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상당히 늦게 이슈가 됐다.
내부에 있는 사람은 알더라도 밖에 말을 못하던 상황이었다. 특히 작가들은 성향상 대부분 불이익을 당해도 화를 누르고 작업에 몰두하거나, 친한 작가들끼리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앤솔로지’를 발전시켜보자는 취지가 좋아서 하나하나 계약서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사람이 없었다는 게 컷던 것 같다.
가장 막막한 것은 계약을 하거나 분쟁이 발생했을 때 도움을 청할 협회나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구도 출판계약서를 써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상황이 더 안 좋아진 것 같다.
TIG> 일러스트레이터들 사이에서 팝픽과 ‘방사’의 영향력은 얼마나 되는가?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영향력이 없진 않았다. 그나마 꾸준히 일러스트 북이 나오는 출판사고 국내 최대 규모의 일러스트레이터 커뮤니티인 ‘방사’의 매니저를 겸하고 있는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특히 게임 그래픽 일을 하고 싶어하고 교육적인 자료가 필요한 학생과 일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다.
‘방사’는 단순히 일러스트레이터가 모이는 공간이 아니라 외주작업을 맡기려는 사람도 오고 외주작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도 모이는 만큼 거기에서 활동을 못하면 타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팝픽 서커스에 실린 흑요석 작가의 일러스트.
TIG> 팝픽 외에 다른 외주계약에서는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는가?
없었다. 외주를 진행할 때는 계약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회사인지, 어떤 식으로 인센티브를 주는지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 계약한다. 개인적으로 일러스트를 상품화하는 계약을 여러 건 맺었는데 지금 상품이 얼마나 판매됐는지, 어떤 상황인지 바로 확인해주기 때문에 믿고 작업하고 있다.
TIG> 팝픽 외에 일러스트를 출판할 수 있는 다른 곳은 없나?
앞서 말한 것처럼 서울비주얼웍스의 ‘애플’ 등이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국내만을 노리면 매출을 기대하기 힘들어서 지금은 둘 다 중단된 상태다. 출판사가 아니면 개인적으로는 만들기도 힘들어서 그 외의 출판물은 동인잡지 외에는 없는 상황이다.
해외 수출이 가능하면 그나마 사정이 나을 수 있겠지만, 이를 진행할 만한 출판사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TIG> 일러스트 북을 만들던 팝픽이 논란에 휩싸였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게임업계에 종사하는 기성 작가들이 자기 작품을 줄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게임 일러스트가 아닌 개인 작업으로, 회사원이 아닌 작가로 작품을 올리고 싶다.
개인으로는 힘들겠지만 작가들이 힘을 모아 개인지를 낼 수도 있고, 돈이 없다면 크라우드 펀딩이라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매우 잘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러스트 잡지 개념의 책이 해외 시장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선배 일러스트레이터가 조언을 줄 수 있고 신진 작가가 새로운 이미지를 실어서 즐거움을 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책은 확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TIG> 계획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개인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전은 화양동의 갤러리 카페 ‘자코’에서 6월 17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앨리스, 한복을 입다’라는 주제로 서양 동화를 동양 느낌으로 표현해 보려고 한다.
유캔펀딩으로 자금을 모았는데 3시간 만에 목표액인 200만 원을 달성했고 지금은 8배인 1,600만 원 달성을 앞두고 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얻은 수익금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후원금은 모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 기부할 예정이다.
6월 17일부터 시작하는 흑요석 작가의 개인전. 수익금은 모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위해 기부할 예정이다.
■ ‘열정페이’를 조심해야 한다
TIG> 팝픽에 대한 판권이나 계약 문제 외에도 ‘반페이’와 ‘도용’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이렇게 부정적인 일이 생긴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경험과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 일을 시작하는 어린 원화가에게 첫 회사는 매우 중요하다. 첫 회사에서 억눌림이 심하면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신입 일러스트레이터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지인을 통해 들은 것이 있고, 상담할 곳이 있고, 의지할 곳이 있으면 빨리 나오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
TIG> 많은 사람들이 첫 직장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사례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내 생각에는 게임업계가 약 20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급성장했다. 그 급성장을 보고 자란 학생들이 이제 취업을 생각하는 20대 초반의 사회초년생들이다.
게임업계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많은 반면 업계는 성장속도나 버는 돈에 비해 자리가 많은 건 아니다. 또한 그들은 어떻게 해야 게임 일러스트 작업을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게임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방황하거나 초조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기회를 준다고 하면 금방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니 임금은 적게 받아도 괜찮다는 식의 ‘열정노동자’가 생겨나게 된다.
TIG> 게임시장이 커지면서 열정 노동자들도 줄어든 것이 아닌가?
게임시장이 커지면서 경험 있고 인지도 있는 작가는 일을 선택해서 할 수 있고, 신진 작가도 포트폴리오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경력을 쌓을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다가 저렴한 가격에 일하는 이른바 ‘열정페이’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부분이 위험하다.
예를 들어 TCG 일러스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로망일 수 있다. 다른 게임들은 기획서를 받아서 원화나 일러스트를 만들면 게임에 맞춰 가공되지만 TCG는 변형이 안 되기 때문에 자기 포트폴리오를 알리고 싶은 사람에게는 매력적인 분야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뒷이야기가 많다. 일부에서는 외주비용을 너무 낮게 책정하는 업체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어떤 업체는 3만~5만 원 사이에 카드 한 세트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면서 예시로 퀄리티가 높은 <던전앤파이터> 일러스트를 올리기도 한다.
말이 안 되는 조건인데 자신의 그림이 게임에 들어가면 경력과 포트폴리오가 된다는 생각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던전앤파이터> 퀄리티 수준의 카드 3장 1세트에 3만~5만 원을 요구하는 글에도 지원을 희망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의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TIG>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곪은 것이 터진 것이기도 하고 이번 사태가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준 것 같다. 나만 해도 이번 기회에 출판권과 계약문제에 대해 더 알아보고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구인을 하면서 열정을 강조하는 곳에 대해서는 일단 경계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재미있고 열정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인 만큼 이번 사건이 일러스트 시장이 더 좋아지는 약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