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정현종의 시가 한 편 있다. ‘나무에 깃들어’라는 제목의 시다.
나무들은
난 대로가 그량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어 사는지를!
1973년 3월 23일, 인도 산간마을 코페쉬왈 여성들은 자신들이 깃들어 사는 나무를 껴안았다. 테니스 라켓 제조사인 사이몬에서 보낸 벌목 인부들이 나무를 베려 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평원으로 일하러 나갔다. 여자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벌목 표시가 된 나무들을 감싸 안았다. 외쳤다. “나무를 베려면 나의 등에 도끼질을 먼저 하라!”
벌목 인부들은 갑갑했다. 산림청에서 허가를 내준 합법적인 벌목작업이었다. 산림관들은 이미 그 나무에 표시를 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손도 못 대게 했었다. 그렇다고, 사람 등을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몇 십년 후 동쪽 어느 나라에 등장한 철거용역업체 알바들과는 달랐다. 물러났다. 숲은 살아남았다.
비폭력 환경운동의 전범이 되는 ‘칩코 안돌라’ 운동이 시작된 계기였다. 칩코 안돌라는 힌두어로 ‘나무 껴안기’라는 뜻이다.
이듬해, 고페쉬왈 인근의 레니 마을의 숲이 위험에 빠졌다. 전나무 2,451그루에 대한 벌목권을 한 회사가 획득했다. 총을 든 벌목 인부들이 등장했다. 50대 여성 칩코 운동원 가우라 데비는 27명의 여자와 어린이와 함께 벌목될 나무들 앞에 섰다. 벌목 인부들에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이 숲은 우리들의 생명과 마찬가지요. 당신들이 이 숲을 파괴한다면 저 산이 무너져 우리 마을을 덮칠 것이오. 이 숲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어머니와 같소. 이 나무에 도끼질을 하려거든 나를 먼저 쏘시오.”
벌목 인부들도 산간 지방 출신 농민들이었다. 그녀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벌목 인부들은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인도의 시성인 타고르가 ‘동방의 빛’이며 ‘마음의 조국’이라고 찬미한 곳에서 벌어지는, 삶의 터전을 허무는 일방적 속도전이 안타깝다. 밀양, 강정.
칩코 안돌라 운동은 급속도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됐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도 관심을 가졌다. 1976년 36만 헥타르에 이르는 산림에 대해 10년간 벌채금지령이 내려졌다. 100만 그루 이상의 나무가 심어졌다. 몇 십년 전에는 델리에서 산간지방으로 가는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목재 야적장이 인도의 번영과 발전의 상징이었다. 같은 도로변에 “자라나는 나무는 인도의 발전을 상징합니다”라고 적힌 입간판이 세워졌다.
칩코 안돌라 운동가들은 “숲은 우리에게 물이요, 식량이요, 생명이라오”라고 노래했다. 우리 엄마가 암 4기 판정을 받았던 때가 생각난다. 편백나무 숲을 찾아갔다. 나무 그늘 아래서 피톤치드의 세례를 받았다. 나뭇잎 사이고 반짝이는 햇살과 재잘대는 새소리가 좋았다. 실제 암 환자 중에는 산에서 살며 완치한 경우가 많다. 나무와 숲이 참 고마웠다.
봄이 되면 숲에 가고 싶다. 내 이름에도 나무(木)가 세 그루 심어져 있다. simon :)
- 1973년 3월 23일, 인도 산간마을 여성들, 칩코 안돌란 운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