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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오늘] 3월 31일 - 스타크래프트, 그 전설의 시작

임상훈(시몬) 2014-03-31 18:08:41
<스타크래프트>가 1998년 3월 31일 미국에서 발매됐다. 역사가 바뀌었다.

<스타크래프트>가 처음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1996년 5월 E3였다. <워크래프트2> 엔진을 활용한 허접한 버전이었다. 욕을 엄청 얻어먹었다. 완전히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에이지오브엠파이어> 같은 RTS 명작이 먼저 출시됐다. 블리자드는 긴장했다. 게임을 다듬었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버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스타크래프트>의 한국 판권은 LG소프트가 가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삼성, SK, 쌍용 등 대기업 계열사에서 게임을 유통에 뛰어들었던 시절이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신사업 추진이었고, 사회적으로는 문어발식 확장이었다. 

LG소프트는 김영만 과장과 한정원 대리의 활약으로 <스타크래프트> 독점 공급권을 얻었다. <스타크래프트>의 판권료는 비쌌다. <워크래프트>(5만 장)와 <디아블로>(3만 장)가 국내에서 흥행한 탓이었다. 두 게임을 유통한 회사는 SKC였다. <스타크래프트>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당시 국내 최대 게임 유통사인 동서게임채널도 달려들었다. 

LG소프트는 모험을 걸었다. 질렀다. 최소 보장판매량 10만 장에 제품당 라이선스 10달러. 당시 국내에서 1년에 1만 장 이상 팔린 게임은 5개도 되지 않았다. 라이선스도 5달러를 넘지 않았다. 판권을 따냈다. 술싸움에서 이겨서 판권을 딸 수 있었다는 비화를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게임의 가능성은 잘 봤지만, IMF 사태가 터질 건 몰랐다. 환율이 미쳤다. 1달러에 700원이던 게 2,000원까지 올랐다. 1998년 4월 9일부터 게임을 팔기 시작한 LG소프트는 난리가 났다. 팔수록 손해가 났다. <스타크래프트> 판권 계약을 이끌었던 김영만, 한정원 등은 난처해졌다.

IMF 사태는 엉뚱한 변수를 또 만들었다. 대기업들은 문어발식 사업을 정리해야 했다. 김영만은 1999년 1월 한빛소프트를 설립했다. LG소프트의 사업을 인수했다. 멋진 선택이었다.

대기업이 사업을 정리하고 구조조정을 하며 실업자가 늘었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2만 개가 넘는 PC방이 생겨났다. <스타크래프트>는 기본 옵션이었다. 2009년 1월까지 국내에서 700만 장 정도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계 판매량 1,100만 장의 60%가 넘는 수치였다. 한빛소프트는 우뚝 일어섰다. LG는 억울했을 법하다. 한빛은 이후에도 <디아블로 2>와 <워크래프트 3>를 유통했다. 

 

블리자드도 역시 우뚝 일어섰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한국에는 블리자드 코리아가 세워졌다. LG소프트에서 EA코리아로 옮겼던 한정원이 지사장이 됐다. 역시 LG소프트에서 함께 일했던 윤태원도 합류했다.


게임방송, 프로게이머 등은 모두 직접적으로 이 게임 덕분에 생겨났고 성장했다. PC방의 확대와 맞물려, 온라인게임의 성장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줬다. 내가 게임 기자를 계속 하는 것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스타크래프트>를 별로 못 했다. 대학 시절 <듄 2>에 미쳐서 중간고사를 놓칠 뻔했다. RTS는 무서웠다. 취직 준비 중에 기숙사 전산실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며 이틀 밤을 샜다. 인생을 조질까 싶어 CD를 반토막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글을 적는 사람이 돼있다. <스타크래프트>가 역사를 바꾸었다. 나도 그 반경 안에 있다. simon :)

- 1998년 3월 31일 <스타크래프트> 미국 발매(한국 발매는 같은 해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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