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5월 21일 새벽, 어떤 나라의 무장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했다. 법원의 판단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었다.
당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가 한창이었다. 5월 20일 낮, 서울대 운동장에서는 한일 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회 주최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를 주최한 학생에 대한 구속영장이 많이 기각됐다.
다음날 새벽, 서울 서소문 법원청사로 군용 구급차가 들이닥쳤다. 차 안에서는 권총과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얼룩무늬 군복의 군인 12명이 뛰어내렸다. 영장을 기각한 양헌 판사를 찾으러 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집에 간 뒤였다. 이들은 차에 올라탔다. 성북구 돈암동으로 움직였다.
양 판사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양 판사 집까지 찾아갔다. 구속영장에 서명할 것을 겁박했다. 양 판사는 저항했다. 군인들은 수류탄까지 꺼내보이며 협박했다.
"그냥 돌아가도 우리는 죽는데, 여기서 자폭할 테니 알아서 하라." (군인들)
"나도 이북에서 월남해 고생하며 독학으로 고등고시 합격하고 군 법무관도 한 사람이오. 이것이 무슨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고 죽는단 말이오." (양 판사)
이 사건은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됐다. 당시 동아일보는 지금과 매우 달랐다.
10여일 뒤 이번에는 1공수특전단 소속 장교 8명이 동아일보 편집국에 난입했다. 장교들은 험악한 기세로 난폭한 언사를 써가며 기자들을 겁박했다. 이 건은 사전검열로 보도되지 못했다. 소문이 퍼져나갔다. 여론이 악화되자 계엄사가 자체조사를 벌였다.
계엄사령관이 사과문을 발표하고, 법원과 신문사 난입 장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5명에게는 실형이 내려졌다. 나머지 13명은 모두 무죄였다. 이후 많은 경우가 그렇듯, 배후 책임자는 가려지지 않았다.
양헌 판사는 73년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