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기자가 미취학 아동일 때 좋아했던 플라스틱 공룡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어린 시절 장난감을 다 큰 뒤에 다시 보면 기억보다 훨씬 작은 크기에 놀라게 됩니다. 문제의 공룡 친구 역시 기자의 기억에는 분명 스마트폰에 맞먹을 크기였는데, 다시 보니 신용카드 한 장에 제 몸을 다 올리고도 공간이 남을 듯 자그마합니다.
절대적 정보가 아닌 주관적 해석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간 두뇌의 일반적 작동 방식은 이런 현상을 자주 발생시킵니다. 게이머라면 사실 꽤 익숙한 문제입니다. 10여 년 전 나를 놀라게 했던 ‘극사실적 그래픽’을 오랜만에 다시 보면 실망할 때가 많죠. 이를 ‘추억 보정’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합니다.
게임은 그대로일 테니, 변한 것은 아무래도 사람 쪽입니다. 게임 산업의 소비자들은-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이렇듯 발전하고 변화하는 업계의 스탠다드를 부지불식간에 내면화하고, 이를 표준으로 삼아 제품을 바라보게 됩니다.
따라서 어떤 게임이 ‘첨단’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당대의 표준보다 어떻게든 조금 앞서거나 다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그래픽 기술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게임 시스템과 콘텐츠 면에서도 당시의 표준에 익숙해진 유저들을 놀라게 할 비장의 무기, ‘와우 팩터’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유저들이 대형 개발사의 트리플A 작품들에 점점 더 ‘예전 같지 않다’는 불만의 목소리를 키워가는 배경에는 이 ‘와우 팩터’의 실종이 있습니다. 물론 엄연히 따져 ‘트리플A 게임’이 ‘첨단 게임’의 동의어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간 사랑받은 트리플A 게임에는 무언가 유저를 좋은 의미로 놀라게 할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문제 또한 아닙니다.
이런 ‘와우 팩터’는 인디계의 미덕으로 통하는 ‘창의력’과는 조금 결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락스타의 특기로 꼽히는 극단적 디테일 추구는 사실 창의력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보다는 기술적, 재정적 우수성을 바탕으로 이전에 못 본 높은 퀄리티를 추구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성이 다를 뿐, 여전히 유저들을 사로잡을 ‘혁신’이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환경 묘사는 미려하다
지난주 출시한 유비소프트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최신작,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는 이러한 ‘와우 팩터’를 점차 결여하고 있는 현대 트리플A 씬의 고질을 잘 상징하고 있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는 게임의 평가가 크게 갈리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는 점차 액션 RPG에 가까워지던 시리즈의 최근 방향성을 탈피해 ‘근본으로의 회귀’를 선언한 작품입니다. 그 결과 시리즈의 근래 작품들에 공통으로 도입되었던 아이템 파밍이나 복잡한 전투 시스템 등 요소를 버리고, 잠입 메커니즘 위주의 암살, 절도 등 콘텐츠에 집중한 것이 특징입니다.
게임은 잘 먹혔던 당시의 재미 공식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파쿠르를 통해 복잡한 바그다드의 시내를 종횡으로 마음껏 활보하는 재미, 철통같은 보안과 무수한 민간인의 눈을 피해 어려운 임무를 완수할 때의 낭만은 시리즈의 초기 작품의 시스템을 완성도 높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는 ‘할 만한 게임’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입니다. 한층 디테일하고 미려해진 바그다드 시내 및 환경 묘사, NPC들의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 개선된 조작감 등 요소가 과거보다 더 큰 몰입감을 선사하는 것 또한 부정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익숙한 게임플레이를 조금 더 고퀄리티로 즐기는 재미가 보장된다.
그러나 문제는 초기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선보였던 것만큼의 ‘와우 팩터’를 새롭게 선사하는 데에는 무참하게 실패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단순히 당대의 인게임 요소들을 재연(再演)하는 것만으로는 이를 당연하게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업계의 스탠더드가 상향된 만큼, 당시에 놀라웠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초기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몇몇 뚜렷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표적 잠입 액션 게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이 게임이 유저 일반의 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던 암살자의 판타지를 당대 기준 혁신적으로 구현했던 덕분입니다.
외벽 오르기는 기술적 성취일 뿐만 아니라 판타지 구현에도 큰 몫을 했다.
건물 벽의 요철을 자연스럽게 붙잡고 올라가는 특유의 파쿠르 시스템을 대표적 예시로 꼽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동 시스템’으로 볼 수도 있는 이 시스템은 그러나 그 이상으로 게임이 추구하는 판타지의 실현에 충실히 복무했던 요소입니다.
이전까지의 잠입 게임들은 캐릭터가 통행할 수 있는 길과 그렇지 않은 길, 타고 오를 수 있는 구조물과 그렇지 않은 구조물의 대비가 분명했습니다. 반면 <어쌔신 크리드>에서는 파쿠르 시스템을 통해 얼핏 보기에 침투로가 아닌 듯한 건물 외벽을 자유롭게 타고 올라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술적 성취인 동시에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일반인들은 상상하지 못할 경로로 침투에 성공하는’ 암살자들의 모습을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게 구현하는 요소였습니다. 즉, 그것만으로도 장르 내에서 뚜렷하게 돋보이는 ‘와우 팩터’가 될 수 있었던 셈입니다.
스킬 시스템의 빈약함도 눈에 띄는 아쉬움 중 하나였다.
따라서 만약 유비소프트가 진정으로 ‘근본으로의 회귀’를 목표했다면, 당시의 <어쌔신 크리드>가 게임계에 안겨준 것만큼의 임팩트로 ‘암살자의 낭만’을 각인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연구했어야 할 듯합니다.
실제로 게임에는 기존 <어쌔신 크리드>보다 창의적 방법으로 적을 암살하는 임무가 존재하는 등 부분적 혁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메인 스토리라인의 일부 미션에만 국한될뿐더러 그 수가 많지도 않아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더 나아가 자체 ‘앤빌’ 엔진의 한계 탓인지, 시신 숨기기, 의자에 앉은 적 암살하기 등 모션에서 근래의 여타 트리플A 게임에서 찾아보기 힘든 어색함과 오류가 발생하는 것도 아쉬운 지점입니다.
다만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가 원래는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의 DLC로 기획되었다가 피벗 된 작품이라는 사실, 그래서인지 게임 볼륨이 상대적으로 적고, 가격 또한 최근의 ‘풀 프라이스’에 비해 저렴한 5만 4,800원으로 책정되었다는 사실 또한 평가에 있어 고려할 만한 요소입니다. 부디 다음 <어쌔신 크리드> 게임은 과거의 시스템뿐만 아니라 당시의 감동까지 안겨주는 게임으로 등장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