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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로 가득한 ARPG, '패스 오브 엑자일 2'

타협 없이 재미를 추구하다

방승언(톤톤) 2024-12-07 17:55:11
<패스 오브 엑자일>(이하 'POE')는  그라인딩 기어 게임즈(GGG)의 장수 탑뷰 액션알피지(ARPG)다. 장르를 정립한 <디아블로> 시리즈의 영향을 받아, 캐릭터를 자유롭게 키우는 ‘캐릭터 빌딩’의 재미를 극한으로 추구해 주목받았다. 천 개가 넘는 패시브 스킬과 수백 개의 액티브/보조 스킬을 조합하는 방대한 시스템은 유명했다.

반대로 그만큼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대중성 측면의 희생이 컸지만 GGG는 개의치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12년 만의 공식 후속작을 통해 이들은 다시 한번 장르 변혁을 꾀하고 있다. 오늘 얼리액세스로 출시한 <패스 오브 엑자일 2>(이하 'POE2')는, 어쩌면 탑뷰 ARPG를 완전히 바꿔놓을 만한 타이틀이다.

그간 ARPG의 보편적 ‘캐릭터 빌딩’ 문법에 액션성을 조금 강화한 작품, 혹은 반대로 액션 중심의 메카닉에 캐릭터 빌딩 시스템을 조금 가미한 작품은 많았다. 하지만 <POE2>처럼 양쪽을 규모 있게 추구하면서 적절히 조화시킨 사례는 아직 없다. GGG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어려운 도전에 나섰는지, 그리고 그 도전은 성공적이었는지, 사전 체험을 통해 알아본 바를 공유한다.



# WASD와 구르기는 빙산의 일각

장르 전반과 비교해 강화된 <POE2>의 액션성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WASD키를 이용한 조작 시스템과 ‘구르기’(회피)의 도입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액션이 유의미하게 강화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단적인 예로 같은 시스템이 <디아블로 4>에도 존재하지만, <디아블로 4>가 ‘액션 혁신’을 이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POE2> 액션의 진짜 핵심은 조작 시스템이 아닌, 이전보다 훨씬 엄밀해진 ‘룰’에 있다.

출시 전 GGG는 이번 게임에서 ‘히트박스’의 정확도를 높이고자 노력했다고 말한 적 있다. ‘히트박스’란 캐릭터에 가해진 공격의 적중 여부를 판정할 때 이용되는, 보이지 않는 박스다. 공격이 박스 안으로 들어오면 명중이다. 히트박스는 캐릭터의 외형과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저 입장에서 억울한 상황이 자주 펼쳐진다.

여기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히트박스’는 ARPG보다 주로 FPS, 소울라이크 등 엄격한 전투 메카닉이 있는 장르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히트박스의 디자인에 신경을 썼다는 것은, 해당 장르에서처럼 정교한 공방이 이뤄지는 전투 시스템을 상정했다는 의미다.


이것이 <POE2>가 가진 액션성의 핵심이다. <POE2>의 액션은 실제로 ‘정교’하다. 방패를 활용하는 ‘워리어’로 플레이해 보면 특히 체감이 잘 되는 지점이다. 방패는 정면에서 오는 공격만을 막을 수 있고, 측면이나 머리 위에서 오는 공격, 혹은 범위 공격은 막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이들 공격들의 판정은 전부 개별적이며 정확하다.

적의 공격을 피할 때뿐만 아니라 적에게 공격을 맞출 때도 ‘정교함’은 여전히 강조된다. <POE2>의 액티브 스킬은 각자 고유한 애니메이션을 통해 발동한다. 예전에는 버튼을 누르면 스킬이 즉시 나갔지만, 이제는 예비동작과 공격동작이 나뉘어 있고, 공격동작이 적에게 맞는 순간에 실제 타격이 이뤄진다.

별도의 스킬 애니메이션을 넣은 데서 오는 효과는 여러 가지다. 첫째로 유저의 캐릭터 조작 자유도가 높아진다. 유저는 구르기 동작을 이용해 스킬 애니메이션을 사용 도중 언제나 취소할 수 있다. 또한 스킬 애니메이션이 지속되는 동안 공격 방향도 자유자재로 전환할 수 있다. 스킬 사용에 있어 유연성을 최대화하는 디자인이다.

둘째로, 스킬마다 사용하는 재미가 다르다. 가령 어떤 스킬은 제자리에서 기력을 모으다가 한 번에 강력한 공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어떤 스킬은 적들에게 돌진하게 되어 있다. 유저가 원하는 위치로 점프하거나 순간이동 하는 스킬도 있고, 가까운 적에게 자동으로 따라붙는 스킬도 있다. 상황에 맞는 스킬을 고르는 재미가 보장된다.

앞으로 전진하는 류의 스킬이 많다

마지막으로, 스킬 사용의 전략성을 높인다. <POE2>에서는 정해진 동작을 완수해야만 공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길이만큼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게 된다. 따라서 스킬 사용의 시작 시점과 방향, 중도 취소 여부 등을 매번 ‘전략적으로’ 궁리해야 한다. 반대로 적의 이동 경로나 공격 방향을 고려해 공격 효율을 최대화하는 것도 ‘전략’의 일부가 된다.

엄격한 판정 시스템을 통해 빚어지는 액션의 정교함, 리얼함은 게임에 도입된 물리적 법칙들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가령 플레이어 캐릭터는 거대한 적의 움직임이나 공격에 의해 밀려날 수 있고, 여러 적에게 둘러싸이면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이런 메카닉 덕분에 스킬 애니메이션의 다양성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가령 위로 뛰어올라 공격하는 스킬이라면, 바닥에 가해지는 범위공격을 피할 수도 있고, 나를 둘러싸거나 나에게 돌진해 오는 적들을 손쉽게 벗어날 수도 있다.

게임을 겪어보기 전에는 매력이 덜해 보였던 ‘레인저’ 캐릭터가 갑자기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레인저는 ‘대부분 스킬을 이동하면서’ 쓸 수 있고, ‘적을 뛰어올라 넘는 스킬이 많다’고만 설명되어 있었다. 이전까지는 싱거워 보였던 특성이지만, 상술한 시스템을 생각할 때 활용하기에 따라 막대한 어드밴티지가 될 수도 있다.

뛰어올라 바닥에 깔리는 공격을 피하기도 한다


# 콤보와 스킬

레인저의 사례에서처럼, 이번 게임에서는 각 스킬의 ‘성능’뿐만 아니라 그 구체적인 효과와 작동 방식까지 캐릭터 빌드에서의 고려사항이 되며, 이것이 빌딩의 재미를 배가한다. ‘정교한 전투 시스템’이라는 게임의 새로운 레이어가 ‘다양한 캐릭터 빌딩’이라는 장르 전통의 레이어와 맞물려 서로를 더 흥미롭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를 이용해 스킬 간 연계를 폭넓게 구상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번 게임의 핵심적 재미 중 하나다. 개발진 스스로도 <POE2>는 하나의 주력 스킬을 강화해 나가던 이전 게임과 달리, 여러 스킬을 복합적으로 연계하도록 의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예를 들어 워리어는 바위벽을 세워서 적을 막는 스킬과, 제자리에서 에너지를 오래 충전해 강력한 한 방을 날리는 스킬이 있다. 두 가지는 따로 썼을 때도 유용하지만, 서로 연계하면 더 강력하다. 벽으로 적의 접근을 막아둔 채 안전하게 강력한 한 방을 날릴 수 있게 되는 것. 바위벽은 부숴지는 순간 적에게 추가 대미지를 주니 일석이조다.

벽으로 막고 망치로 친다. 치사한 만큼 강력하다

스킬 연계의 재미를 더하는 것은 <POE> 시리즈가 자랑하는 ‘보조스킬’ 시스템이다. <POE2>에는 액티브 스킬의 성능이나 작동법을 강화/변경하는 보조스킬이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다. 대표적인 예시로 1발씩 나가던 투사체를 3개씩 나가도록 바꾸는 보조스킬, 혹은 선형으로 설치되던 ‘벽’ 계열 스킬들을 원형으로 설치되게끔 바꿔주는 보조스킬 등이 존재한다.

후자의 보조스킬을 앞서 언급한 바위벽 스킬과 연계하면, 적들을 ‘가둬놓고 때리는’ 재미있는 변주가 가능해진다. 이외로도 보조스킬은 다양하다. 스킬 유지 시간을 연장/단축하거나, 속성 효과를 더하거나, 사용 속도를 높이는 등의 보조스킬을 이용해 창의적인 스킬 연계를 연구해 볼 수 있다.

새롭게 도입된 ‘정신력 스킬’도 전투를 확연히 변화시키는 요소다. 정신력 스킬이란 지속형 스킬을 말하며, 별도의 정신력 게이지를 일정량 점유하여 on/off 할 수 있다. 캐릭터에게 지속형 버프를 주거나, 조건부로 특정 효과를 발생시키거나, 소환수를 유지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된다.

정신력 스킬은 지속형이다


# 캐릭터 빌딩의 재미

보다 ‘전통적’인 형태의 스킬 연계도 물론 존재한다. 특정 전투 메커니즘(디버프, 버프, 속성)을 중심으로 스킬간 시너지를 도모하는 방식을 말한다.

가령 ‘워리어’가 활용할 수 있는 전투 메커니즘으로는 적의 속도를 늦추는 범위형 디버프 ‘가시지대’, 지속 피해를 주는 상태 이상 ‘출혈’, 자기 공격력을 높이는 중첩형 버프 ‘격분’, 적을 상당 시간 무력하게 만드는 ‘기절’, 상대의 방어력을 낮추는 ‘갑옷 파괴’ 등이 있다.

각각의 효과는 압도적으로 많은 액티브 스킬, 보조 스킬, 패시브 스킬 조합에 있어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 특정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시너지가 이뤄지도록 스킬셋을 구성한다면, 캠페인을 어렵지 않게 클리어할 수 있으며, 스킬 연계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재미도 챙길 수 있다.

덕분에 1,500개의 스킬 노드가 포진된 거대한 스킬트리에서도 길을 잃고 헤맬 필요가 적다. 스킬 노드는 사소한 수치적 버프를 주는 ‘마이너 노드’와, 조금 더 강력한 버프를 주는 ‘주요 노드’, 그리고 일부 메커니즘을 변화시키는 ‘핵심 노드’ 등이 존재한다. 이중 ‘주요 노드’와 ‘핵심 노드’들을 잘 살펴보면, 자신이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는(혹은 사용하고 싶은) 전투 메커니즘과 관련된 버프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더 나아가 전편과 달리 이러한 노드에 투자한 스킬포인트를 ‘골드’ 재화를 이용해 손쉽게 반환받을 수 있다는 것이 큰 메리트다. 전편의 경우 캠페인 아이템 혹은 특수한 재화를 통해서만 반환이 가능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스킬을 구상해 보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방대한 스킬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실험할 자유를 주지 않은 셈이어서 게임 디자인상의 치명적 결함으로 볼만했다.

큰 노드는 보통 특정 전투 메커니즘을 활용하거나 강화한다. 이것을 위주로 경로를 짜면 비교적 쉽다

한편, 기존의 ARPG에서는 전투 메커니즘 중심의 스킬 연계가 자칫 빌드 다양성 제약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흔하다. 가령 ‘출혈’이라는 특정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빌드를 짠다고 가정할 때, 출혈 상태 이상과 직접 연관된 스킬들끼리만 조합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결국 만들어질 수 있는 빌드의 숫자도 제약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POE2>에서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이런 일률적 빌드의 문제가 덜하다. 첫째는 앞서 보조스킬 시스템 덕분이다. 보조스킬로 특정 스킬에 원래 없던 속성을 자유롭게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다양한 스킬 연계가 가능하다.

둘째로, 다양한 스킬 사용을 되도록 권장하는 게임 디자인 덕분이다. <POE2>의 전투는 단일 스킬로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이른바 ‘원버튼’ 빌드보다는 다양한 스킬로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전천후형 빌드가 유리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만큼 전투에서 비교적 다양한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얼리액세스 단계에서 준비된 몬스터의 수는 400마리, 보스는 50마리에 달한다. 이들은 외형뿐만 아니라 행동 방식이나 공격력/방어력 등의 스펙, 기타 특성을 모두 달리하기 때문에, 단일한 스킬 조합만을 믿고 플레이하다가는 언젠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가령 몰려든 적들을 모아둔 뒤 한 번에 폭발시켜 처리하는 빌드에 의존하다 보면, 다수의 원거리형 몬스터가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가해오는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 다행히 플레이어에게도 방대한 스킬 메카닉이 주어져 있으므로, 이를 통해 대책을 쌓아나가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다.

뒤에서 뭔가 던지는 친구들에 대한 대책도 세워져 있어야 한다


# ARPG 보스전이 이렇게 재밌을 일이야

그동안의 ARPG에서 보스전은 순수한 재미보다는 도전과 보상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콘텐츠였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보스의 기믹을 강력한 빌드로 이겨냈을 때의 뿌듯함, 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값진 보상이 보스전의 의의였다.

<POE2>는 다르다. <POE2>의 보스전은 모두가 독립적 재미를 주기 위해 잘 설계된 콘텐츠다. 모든 보스는 다른 보스와 ‘겹치지 않는’ 독자적인 애니메이션과 공격 방식을 가지고 있다(이 사실만으로 개발진은 얼마간의 경의를 받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별다른 힌트가 없는 상태에서 이를 파악하고, 대응해야 한다.

이는 ARPG보다는 소울라이크 문법에 훨씬 가깝다. 실제로 개발진은 소울라이크 장르의 영향을 받았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구르기’ 시스템의 도입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전투 양상도 소울라이크를 닮았다.

횡베기를 구르기로 피하는 워리어

모든 보스는 다양한 공격을 가하고, 많은 경우 각각은 판정이 다르다. 더 나아가 상당수 보스에게는 행동 패턴이 바뀌는 제2, 제3의 ‘페이즈’가 따로 준비되어 있으며, 때로는 주변 환경이 변수로 작용하기도 한다. 덕분에 모든 보스전은 이전의 보스전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데다 그 숫자까지 많아 게임 콘텐츠의 중요한 축으로 바라볼 만하다.

앞서 설명한 정교한 전투 시스템과 다채로운 캐릭터 빌딩 역시 모두 보스전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적당히 위치만 옮기며 공격을 가하다 보면 이길 수 있는 기존 ARPG 보스전과 달리 실제 적의 움직임을 보며 유효한 공격 기회를 노리고, 가해지는 위기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처하는 과정은 전에 없는 스릴과 만족을 준다.

더 나아가 개발진은 도전에 따르는 합당한 보상을 두둑이 챙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게임에서 보스들은 희귀 아이템이나 재화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최초 공략 시 캐릭터에 영구적인 버프를 부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부 보스를 처치하면 영구 버프를 챙길 수 있다


# '득템'이 잦지 않아도

<POE2>의 전투 템포는 이전보다 분명히 느리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템 획득의 빈도도 비교적 적은 편에 가깝다. 그러나 아이템 획득의 재미가 부족하지는 않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로, 스킬 획득이 게임에 끊임없는 변화를 준다. 전편에 이어 <POE2>는 스킬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개념이다. 달라진 것은 이번 작품에는 ‘미가공 스킬젬’이라는 아이템이 새롭게 도입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가공 스킬젬을 클릭하면 원하는 스킬로 가공하여 획득할 수 있다. 전편과 같이 개별 스킬젬이 따로 드롭되는 시스템은 사라졌다.

스킬젬보다는 ‘보조 스킬젬’이, 그리고 ‘보조 스킬젬’보다는 ‘정신력 스킬젬’이 더 적게 드롭된다. 그리고 앞서 알아본 것처럼 이들 각각은 캐릭터에게 수치적 강력함을 더해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투 메카닉 자체에 유의미한 변화를 줄 수 있다. 따라서 잊을 만하면 떨어지는 스킬젬은 게임플레이를 주기적으로 환기하는 효과가 있다.

둘째로, 재화 획득 역시 만족감이 크다. 이는 전편에서 계승된 재미이기도 하다. <POE2>의 재화는 ‘골드’를 제외하면 모두 각자의 쓰임새를 가진 기능성 아이템들이다. 장비 희귀도를 높이거나 옵션을 더하는 것은 물론, 스킬젬의 보조 스킬 장착 슬롯을 늘리거나, 인게임 콘텐츠의 난이도 및 부가옵션을 바꾸는 등 그 활용이 폭넓다.

'금고' 등 대다수의 인게임 콘텐츠에 재화를 사용할 수 있다. '상자'에는 안 된다

따라서 <POE2>의 재화는 그저 가치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캐릭터 육성, 아이템 강화, 콘텐츠 편집까지 가능한 흥미로운 장난감이다. 덕분에 고급 재화가 드롭되는 순간은 웬만한 고급 아이템이 드롭될 때만큼의 만족감을 준다. 더 나아가, 아이템을 분해해 이런 재화의 ‘파편’을 수집할 수도 있어, 자잘한 만족감을 느낄 여지가 꾸준히 이어진다.

이런 고급 재화들은, 고급 아이템을 직접 구하는 만족감을 대체해 주기도 한다. 옵션 좋은 아이템이 궁하다면, 재화를 들여서 직접 만들어보면 된다. 후반으로 갈수록, 이런 방식이 오히려 자신에게 정확히 필요한 아이템을 만들어 빌드를 완성하는 데 유용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간혹 드롭되는 최고급 아이템의 효용감이 크다. 다양한 메커니즘이 거미줄처럼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POE2>와 같은 게임 디자인에서, 이전까지 없던 강력한 메커니즘 변화를 가져다주는 고유 아이템들이 미치는 파급력은 훨씬 막대하다. 비록 며칠 간의 게임플레이에서 고유 아이템은 하나만 획득할 수 있었지만, 이미 게임 내 존재한다는 수백 개의 고유 아이템들이 궁금하고 기대되는 이유다.

액트 보스를 잡아도 희귀 아이템 하나 안 나올 수 있다


# '의미'로 가득 채운 게임

개발진은 출시 전 진행된 인터뷰에서 “게임 내 존재하는 모든 메커니즘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이야기했다.

체험버전을 통해 이것이 허울뿐인 말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어 기쁘다. 앞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만나는 거의 모든 요소는 유의미한 변화나 흥미거리를 안겨주는 것들이다. <POE2>는 건드려보고, 실험해 보고, 변주해 보고, 연구할 ‘장난감’으로 가득한 타이틀이다.

기껏 마련한 시스템들이 유저 입장에서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게끔 일일이 공을 들인 개발진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어려웠을 결과다. 전편과 크게 달라진 <POE2>의 군중제어(CC) 메카닉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전편에서 빙결, 기절 등의 CC 기능은 일반 몬스터가 아닌 보스 몬스터들에게는 아예 통하지 않았다. 보스 공략이 너무 쉬워지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겠지만, CC 기술의 유용성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요소였다. 개발적 편의를 위해 콘텐츠를 희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번에는 다르다. 모든 CC기술은 적에게 누적되어 100%가 되었을 때 비로소 발동하는 방식으로 변했다. 보스들의 경우 당연히 누적 속도가 느리지만,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보스가 나뒹굴거나 기절하는 모습을 전부 별도로 만들어 뒀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50마리(정식 버전에서는 100마리)의 모든 보스에 대해 상태이상에 걸린 모습을 별도로 구현해야 했다는 의미가 된다. 특히 완벽한 그로기 상태에 빠지는 ‘강력한 기절’의 경우 애니메이션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CC기술이다.

재미를 강화할 방안을 치밀하게 고민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한 지점은 이외로도 많다. 가령, 엔드게임에서 만나는 보스들은 캠페인에서 만나는 보스들의 ‘재활용’이다.

이미 50마리에 달하기 때문에 재활용이 이뤄지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듯하지만, 개발진은 타협하지 않았다. 엔드게임 보스들은 캠페인에 없던 공격 패턴과 스킬, AI를 보여줄 예정이라고 개발진은 전했다.

이런 개발 철학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발더스 게이트 3>와 라리안 스튜디오를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게임을 더 재미있게 만들 방안을 발견했을 때, 업계 관행 그리고 자신들의 과거 표준을 뛰어넘는 노력을 들이기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든 보스가 저마다의 모습과 패턴을 가진다


# 방향성 유지가 관건

체험 기간에 미처 도달하지 못한 엔드게임 콘텐츠, 6개 직업 등을 생각할 때 <POE2>는 현재의 얼리액세스 상태에서도 지루할 틈 없이 수백, 수천 시간을 기꺼이 들일 만한 게임이다.

심지어 지금의 게임 분량은 정식 출시 분량의 절반에 불과하다. 앞으로 3개의 액트, 50개 보스, 수백 종의 몬스터, 6개의 기본직업, 24개의 상위직업이 게임에 추가될 예정이다. 매번 새로운 게임 메카닉을 추가해 나가는 <POE> 시리즈의 전통적 시즌제 운용 방식까지 생각한다면 게임의 앞날에 거는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콘텐츠 추가의 속도다. 현재로서도 캐릭터 육성 중에 느낄 수 있는 게임플레이의 다채로움은 상당히 높다. 하지만 직업별 무기가 대부분 하나씩만 마련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빌드 구축에 있어서 예상한 것보다는 다양성 부족과 전투 반복성을 더 자주 느낀 것이 사실. (착용 무기별로 사용 가능한 액티브 스킬이 구분된다)

그러나 특유의 캐릭터 빌딩 자유도를 고려할 때, 창의력을 발휘하기로 마음먹는다면 현재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이슈로 보인다. 특히 유저 커뮤니티의 연구가 지속되면 고정관념을 벗어난 다양한 빌드가 곧 나타날 가능성이 보인다.

또한 개발진은 빠른 콘텐츠 추가를 약속했다. 예정된 얼리액세스 지속 기간은 약 6개월이며, 그 안에 나머지 절반의 콘텐츠를 채워 넣을 계획이다. 게임 성격을 고려할 때 콘텐츠 추가는 쉽지 않은 일이 되겠지만, 많은 사랑 속에서 현재의 방향성을 유지하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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