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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10부터 1까지 경험한 '유일한' LCK 선수 '기인' 김기인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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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주(사랑해요4) 2024-04-18 15:05:44
무관의 제왕.

이라는 말이 있다.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묘하게도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 선수를 일컫는 속어다. 그럼에도 이런 타이틀을 얻기는 쉽지 않은데, 대다수의 팬들에게 선수가 충분한 우승권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덧 데뷔 7년 차를 맞은 '기인' 김기인은 이런 타이틀을 가진 선수였다. 아마추어 팀 '에버 8 위너스'로 데뷔해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던 기인은 데뷔 2년 차에 준우승과 롤드컵을 모두 경험하며 '탑 솔로 명가'라고 여겨졌던 한국 <LoL>을 대표할 탑 솔로로 여겨졌던 선수다. 그러나 LCK에서 유일하게 10등부터 1등까지 모든 등수를 경험했던 한 많은 역사를 가진 선수기도 하다.

(출처: LCK)


# "이 선수 누구죠?"

기인은 친구들과 함께하기 위해 <LoL>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받은 배치 티어는 실버. 당시만 하더라도 프로게이머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나서스의 Q 스킬을 칭하는 '딱콩'을 마음에 들어 했던 기인은 얼마 되지 않아 실력이 일취월장했고, 이윽고 챌린저 티어까지 도달했다.

모두가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고등학교 3학년, 기인은 친구들의 권유로 프로에 도전하자는 마음을 굳히게 된다. 한번 도전해 보자는 마음으로 당시 '에버 8 위너스'에 지원해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기인은 2017 LCK 서머 2라운드에서 당시 부진했던 '헬퍼' 권영재의 대타로 데뷔전을 치렀다. 흥미롭게도 두 선수는 2024년 젠지에서 코치와 선수의 입장으로 재회한다.

데뷔 시절의 기인(오른쪽). 좌측 인물은 당시 에버 8의 정글러로 활동했던 '말랑' 김근성 (출처: 위너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기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다. 아마추어 시절을 알고 있는 시청자도 거의 없었다. 데뷔전은 탑 루시안을 선택해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 '락스 타이거즈'에서 활동하던 베테랑 탑 라이너 '샤이' 박상면을 연속을 솔로 킬하는 모습을 보이며 눈도장을 찍었다. 모두들 "이런 선수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냐"라며 놀랐다. 20경기 만에 12개의 솔로 킬을 기록했으니 눈길이 안 갈 수가 없었다.

그의 닉네임과 동음의의어인 '기인'(畸人 - 독특한 지조와 행실이 있어서 세상의 풍속과 다른 면이 있는 사람) 같은 모습을 게임으로 보여 준 것이다.

실제로는 그의 이름인 기인(基仁)에서 따 지어진 닉네임이겠지만, 독특한 닉네임과 첫 데뷔 시즌임에도 1군 경기에 무리 없이 녹아드는 모습을 보여 데뷔 시즌부터 팬들에게 '기인'이라는 그의 이미지를 제대로 각인시켰다. 

(출처: 위너스)


# 그의 재능을 인정해 준 '아프리카 프릭스'

당시 LCK에 처음으로 승격했던 에버 8 위너스는 한 시즌을 버티지 못하고 강등을 겪게 됐다. 당시 LCK에 강등 시스템이 존재했다. 기인은 승강전에서 자신이 좋아했던 '나서스'를 선택해 게임을 하드 캐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결국 강등은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직 파릇파릇한 신인이었던 그를 눈여겨본 팀이 있었다. 바로 아프리카 프릭스다. 모두가 기인에게 '입단 테스트'를 권유할 때, 아프리카는 주전을 보장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봐준 사람에게 충심을 가진다고 하던가, 기인은 아프리카와 계약을 맺고 주전 탑 솔로가 됐다.

이윽고 기인은 기량을 만개하며 '기인열전'을 LCK에서 선보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상대 탑 라이너의 존재감을 지워 버리며 '안티 캐리형' 탑솔로의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위기의 상황에서 게임을 뒤집는 클러치 플레이를 선보였다. 

대표적인 경기는 2019 LCK 스프링 샌드박스전이다. 지금도 탑 라이너가 제이스를 선택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높은 게임 이해도를 통해 다양한 전략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도 기인의 장점이었다. 기인은 탑 라이너임에도 원거리 딜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데뷔 시즌에는 '탑 루시안'으로 스크림에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으며, 2019 LCK 스프링에서는 아프리카 프릭스가 전략적 선택으로 원거리 딜러 '에이밍'을 출전시키지 않는 강수를 뒀는데, 이때 '미드 베인'을 선택해 경기를 홀로 이끄는 하드 캐리를 선보였다.

덕분에 "기인이 5명 모이면 최강팀이 아닐까?"라는 농담이 잠시 유행하기도 했다. 탑 기인, 미드 기인, 정글 기인... 이렇게 팀을 구성하면 우승을 차지할 수 있다는 그런 농담이었다. 기인의 '실력'에 대한 시청자들의 평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패배한 경기의 한타에서 71이라는 대미지밖에 넣지 못해 희화화의 목적으로 사용된 '71인' 이라는 농담을, 본인의 실력을 통해 '71인분의 하드 캐리'가 가능하다는 별명으로 바꿔 내기도 했다.

2024년 이전까지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음에도 '기인 고사'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는 점도 그의 실력을 잘 보여 준다. 팀이 상위권이 아니었음에도 데뷔 시즌부터 보였던 특유의 노련한 플레이를 통해 LCK에 데뷔하는 신인 탑 라이너를 압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기 때문이다.





# '우승'과의 지독한 악연
 

2018년 아프리카 프릭스에서 시작한 첫 커리어 시즌 당시만 하더라도, 기인은 '성적도 실력도 좋은 대표적인 탑 솔로'가 될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2018 LCK 스프링에서 아프리카는 기인의 활약을 앞세워 창단 최초 준우승에 성공하고, 서머 시즌에는 포인트 2위로 롤드컵 진출을 확정 지었다. 모두가 기인이 아프리카를 이끌 차세대 프랜차이즈 스타가 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상황은 지독히 꼬여 갔다. 2018년은 국제전에서 'LCK의 암흑기'가 시작됐던 해다. 2018 월드 챔피언십에서 아프리카는 조별 리그부터 불안한 모습을 계속해서 노출했고, 8강에서는 LCS의 C9를 만나 한 세트도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기인은 상대 탑 라이너 '리코리스'를 연속으로 솔로 킬하며 3경기 내내 '딜량 1등'을 차지하는 차력쇼를 선보였지만, 팀의 패배까지는 막지 못했다. 다전제에서 패배한 선수가 모든 세트에서 딜량 1등을 차지한 것은 당시가 최초로 알려져 있다.

8강에서 충격패를 당했던 2018 롤드컵, 공교롭게도 기인의 첫 롤드컵은 LCK의 부진이 시작된 시기와 같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준 아프리카 잔류도 악수로 다가왔다. 2019년부터 리빌딩에 실패한 아프리카는 중위권과 하위권을 전전했다. 2019년 케스파 컵을 우승하고 MVP를 수상하며 압도적인 모습을 선보였지만, 그 다음 시즌에서는 6위와 4위를 기록했다. 아프리카(광동)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2022 LCK 서머에서는 7위라는 쓸쓸한 성적표를 받아야 했다.

2023년에는 정든 광동을 떠나 kt로 이적하는 과감한 수를 뒀다. 그러나 이번에는 플레이오프에서 T1과 젠지가 기인의 앞을 막아섰다. 2023 스프링 시즌에는 3위를 기록했지만 플레이오프 최종 진출전에서 젠지에게 끝내 패배했고, 2023 서머 시즌에는 정규 시즌 1위로 승승장구하던 팀과 더불어 올프로 퍼스트에 올랐지만, 플레이오프에서 T1과의 풀 세트 접전 끝에 두 번이나 패배하며 쓰디쓴 고배를 마셨다.

이어진 롤드컵에서는 우승 후보 '징동 게이밍'을 만나 8강 탈락하며 '무관'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듯했다. 5년 만의 롤드컵 복귀였지만, 그에게 2023 롤드컵은 아픈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kt와의 계약이 종료된 기인의 다음 행선지는 젠지였다. 정규 시즌 올프로 퍼스트를 차지한 기인과 함께 정규 시즌 1위라는 좋은 모습을 보였던 젠지는 플레이오프로 향했다.

플레이오프부터 결승전까지, 기인의 플레이는 말 그대로 '절박함'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듯 했다. 디플러스 기와의 풀 세트 접전에서, 적은 체력으로 후퇴하는 팀원에게 돌격하던 킹겐의 아트록스를 크산테의 궁극기로 낚아채 위기의 순간을 기회의 순간으로 바꿔낸 낸 것이 대표적이다.

정체절명의 순간에 궁극기로 아트록스를 벽 너머로 배달해 흐름을 끊은 기인 (출처: 라이엇 게임즈)

결승전에서도 쉽지 않았다. 인터뷰에서 "우승은 제가 더 급하거든요"라며 열망을 숨기지 않은 기인은, 1세트에서 럼블을 선택해 팀에게 시간을 벌어다 주며 예술적인 이퀄라이저 사용을 통해 승리했다. 그러나 T1의 반격은 매서웠고, 젠지는 내리 2세트와 3세트를 내 주며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 쉬는 시간 결승전 현장에서는 "기인이 또 무관으로 남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만 계속해서 들렸다.

그러나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마지막 세트에서, 기인은 크산테를 통해 '탑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냈다.

라인전에서는 Q스킬을 다섯 번이나 연속해 적중시키며 제우스의 자크를 처치해 존재감을 지워 버리며 '안티 캐리'로써의 본인의 능력을 과시하는 한편, 팀이 위험해질 수 있는 순간마다 잘 성장한 구마유시의 루시안을 집중 견제하며 경기가 넘어가지 않도록 했다. 상대 본진에서 진행된 마지막 싸움에서는, 타워를 파괴할 시간을 벌기 위해 홀로 5명에게 진입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그대로 승기를 굳혔다.​

경기를 보던 모두가 기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우승을 향한 열망'이 보인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끝내 우승이 확정되자, 기인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팀원 사이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웃었다. 7년 간의 노력이 보답받는 순간이었다. 국내 최강의 선수들이 격돌한 풀 세트 접전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팬들은 파이널 MVP를 묻는 전용준 캐스터의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기인의 이름을 외쳤다.

기인의 프로 생활을 되돌아보면 그를 정의하는 단어는 '꾸준함'일 것이다. 가끔은 부진할 때도 있었고, 혼자만의 힘으로 팀을 우승권까지 올리지는 못했을지라도, 많은 팬이 "성적과 실력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라며 끝없는 지지를 보낼 수 있는 꾸준함이 그의 장기였다. 이제 그는 LCK에서 10등부터 1등까지 모든 순위를 경험해 본 '유일한' 프로 선수가 됐다.

7년 만의 염원을 이뤄낸 기인은 이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결승전 기자회견에서 기인은 "우승은 처음이 어려운 거라 생각한다"라며 이어질 2024 MSI에서도 좋은 모습을 이어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기인은 그를 신뢰하는 팀원과 함께 더욱 높은 곳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