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유저가 가죽장화를 먹게 할 수 있을까?” <야생의 땅: 듀랑고>에서 내세우는 아이템의 자유도와 창발성을 보여주는 질문이다. 개척정신을 강조한 <야생의 땅: 듀랑고>의 기발한 아이템 시스템 개발기. 이정수 디자이너의 강연을 디스이즈게임에서 정리했다. 유저가 가죽장화를 자연스럽게 먹기까지 걸린 오랜 노력을 살펴보자.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넥슨의 이정수 게임디자이너
가죽장화: 더 비기닝
11개월 전, 이정수 게임디자이너가 막 입사했을 때 개발을 총괄하는 이은석 디렉터는 게임 콘셉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게임은 뭐든 할 수 있는 게임이지, 필요하다면 가죽장화도 먹을 수 있어”
어떻게 그게 가능햐나는 신입 게임디자이너의 놀람과 질문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그건 이제부터 네가 고민해야지” 이렇게 가죽장화를 먹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한 신입 게임디자이너의 고군분투기가 시작됐다.
모든 고민은 여기서 시작됐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위한 필수조건. 자유도와 창발성
<야생의 땅: 듀랑고>는 개척형 MMORPG다. 플레이어는 야생의 땅에 떨어져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며 살아남아야 한다. 그럼 자신만의 이야기는 어디서 나올까? 바로 남들과는 다른 과정 혹은 결과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도와 창발성(예상치 못한 현상이 벌어지는 성질)이 필요하다.
이정수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게임에서의 자유도는 ‘인간과 닮은 것’이다. <GTA>시리즈에서 플레이어는 사람을 때리기도 하고, 남의 차를 뺏어 타는 등 인간과 닮은 행동과 선택을 한다. 창발성은 ‘사회’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게임을 하게 되고, 예상치 못한 경험을 겪는 과정은 창발성이다.
게임에서 생각하는 자유도와 창발성
그럼 게임아이템에서는 어떻게 될까? 인간은 물건의 용도를 바꾼다. 신발이 없으면 다른 용품을 신발로 활용하고, 대체재를 찾는다. 인간적인 것. 그러니까 자유도다. 창발성은 조합에서 나온다. 따로 입을 때는 멀쩡하던 청자켓과 청바지가 함께 입으니 끔찍한 시너지를 내는 것. 예상치 못한 결과. 즉 창발성이다.
다시 가죽장화로 돌아가 보자. 가죽장화는 어떨까? 하나의 아이템이라도 다양한 곳에 대체재로 활용될 수 있고, 조합을 통해 예상치 못한 쓰임이나 결과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야생의 땅: 듀랑고>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쳐나가기 위한 ‘아이템의 조건’이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유도와 창발성이 꼭 필요했다.
아이템 1.0
인간은 치킨을 먹는다. 하지만 돌멩이는 먹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을 대상을 보는 즉시 인지한다. 거의 모든 사람은 치킨은 먹을 수 있다고 인지하고 있고, 돌멩이는 먹을 수 없다고 인지하고 있다.
그럼 게임캐릭터는 어떨까? 캐릭터는 사람처럼 경험에 의한 인지가 어렵다. 그래서 일일이 조건을 만들어주고 행동을 하기 전에 조건을 체크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아이템에 조건을 붙일 수는 없는 만큼 <야생의 땅: 듀랑고>에서는 아이템에 각종 태그를 붙이는 방식을 택했다. 아이템 1.0이다.
인간이 치킨을 먹는 인지를 대신하려면 이런 조건 체크를 거쳐야 한다.
태그는 특성과 속성으로 구분된다. 돌멩이와 치킨의 예를 들면 돌멩이는 에너지가 없고, 딱딱하다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돌멩이는 ‘먹을 수 없다’는 특성을 지닌다. 반면 치킨은 에너지가 있고, 부드럽다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치킨의 특성 중 하나는 ‘먹을 수 있다’다. 사물의 아주 기본적인 속성을 나열한 후 이에 따른 주관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식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특성은 자연스럽게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어 딱딱한 속성을 가진 망치에는 무기 특성 이외에도 도구 특성을 붙여서 못을 박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조건에 맞는 특성을 가진 아이템을 먹어서 영양분을 얻을 수 있다. 아이템 자체가 각종 속성과 특성을 담는 하나의 그릇인 셈이다.
돌멩이와 치킨의 속성. 먹을 수 있다와 없다라는 특성은 속성을 통해 구분된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먹을 수 있다, 던질 수 있다, 굴릴 수 있다 같은 특성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막대나 나무 같은 모양과 재질을 표시하는 특성은 어떤 행동으로 이어져야 할까? 예를 들어 나무라는 특성에 깎는다는 행동을 더할 때 누구는 날카로운 무기를 원하며 나무를 깎을 수도, 누구는 조각상이나 도구를 원하며 도구를 깎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템과 행동 사이에 ‘목적’이라는 요소를 하나 더 추가했다. 그리고 목적과 행동을 포함해서 레시피로 묶었다. 만들다라는 행동에 가죽장화라는 목적을 더하면 가죽장화를 만든다는 레시피가 나오는 식이다. 물론 이는 시스템 단위의 이야기고 게임 내에서는 간략히 표시된다.
조건에 맞는 아이템에 목적과 행동을 더하면 조합이 진행된다.
행동과 목적, 태그를 이용한 속성과 특성이 추가되고 나니 자연스럽게 아이템의 조합이 이뤄졌다. 가죽장화 레시피를 예로 들면 여기서 필요한 조건은 가죽에 있는 ‘가죽(재질)’이라는 속성이다. 가죽의 다른 속성인 먹을 수 있다, 불에 탄다, 천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등은 레시피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가죽장화를 다시 다른 레시피에 사용할 때를 위해서 변화되지 않은 모든 특성이 가죽장화로 이전된다. 가죽장화는 여전히 가죽(재질)이고, 먹을 수 있으며, 불에 탄다. 천모양으로 펼쳐져 있다는 특성 하나만이 장화 모양으로 바뀌며 사라졌다. 대신 장착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특성이 생겼다. 게릴라 사내테스트를 했던 아이템 1.0의 시스템이다. 가죽장화는 이제 먹을 수 있다.
첫 테스트 단계의 모습.
레시피를 거친 가죽장화. 가죽의 천 속성이 사라지고 장착가능 특성이 붙었다.
아이템 2.0
아이템 1.0 버전의 의도는 신선했지만 문제점도 많았다. 대표적인 게 무한제작이다. <야생의 땅: 듀랑고>에는 아이템을 튀긴다는 행동이 있었는데, 튀긴 아이템을 다시 튀기고, 이를 반복하다 보면 열량이 3천 칼로리가 넘는 괴물 같은 튀김을 만들 수도 있었다. 수치모델 검증툴이 없던 게 문제다.
같은 맥락에서 적의 공격을 맞으면 오히려 체력이 차는 방패가 생기기도 했다. 제어가 안되면서 생긴 문제다. 그래서 티저영상에서도 공개된 빌드인 아이템 2.0을 개발했다. 기획자가 제어권을 갖도록 만들고 보다 직관적인 태그를 구현하자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먹을 수 있다나 불에 탄다 등은 쉽게 이해가 가지만 어떤 아이템이 접착제의 특성이 있는지는 현실에서도 알기 어렵다.
2.0버전. 티저영상에서 공개된 버전이다.
게다가 여기서 이은석 본부장이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가죽장화를 먹을 수 있는 건 맞지만 유저가 가죽장화를 먹는 게 이상해 보이는 만큼 ‘가죽장화를 먹을 순 있되 유저에게 권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아이템 2.0에서는 특성의 그룹화에 주목했다. 에너지와 부드러움 같은 속성은 먹을 수 있음이라는 특성에 묶인다. 그리고 어떤 아이템에도 비슷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이 같은 특성을 묶었다. 마찬가지로 요리라는 특성에는 먹을 수 있음이라는 특성이 당연히 포함돼있다. 그래서 요리 안에 먹을 수 있음이라는 특성을 집어넣었다.
새로운 과제가 추가됐다.
가죽이라는 특성에는 당연히 먹을 수 있음과 불에 탐이라는 특성이 포함돼있다. 그래서 이 역시 그룹으로 묶었다. 그리고 가장 상단의 특성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태그를 간략하게 풀어냈다. 이렇게 그룹화를 하고 나니 재질과 용도에 속성이 흡수되면서 태그가 점점 간략해졌다.
마찬가지로 가죽장화를 만들 때도 가죽과 신발이라는 상위 특성만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대신 분해 개념을 추가해서 하위속성을 불러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바꾸고 나니 확실히 깔끔해지고 버그도 줄었지만 정작 창발성이 크게 떨어졌다.
가죽장화는 먹을 수 있고, 유저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그냥 먹는 어색함도 없앴지만 정작 제작을 거듭할수록 뻔한 특성만 남다 보니 뭔가 색다른 결과물이 나오거나 기존에는 가려져 있던 특성이 나타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특성과 상성을 그룹으로 묶은 모습. 가장 상단의 요리와 가죽만이 노출된다.
제작에서도 상단의 태크만 옮겨가는 방식. 보기엔 편하지만 세부속성이나 특성이 무시되기 쉽다.
아이템 3.0
결국 새로운 응급조치에 들어갔고, 창발성을 복구하기 위해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기서 가죽장화와 관련된 또 다른 의견이 제기됐다. ‘유저는 언제나 바쁜 상황인데 언제 가죽장화를 일일이 분해하느냐’다.
그래서 특성을 변화시키는 기능을 추가했다. 예를 들어 에너지라는 특성이 있는 가죽장화를 먹지 못하는 이유는 가죽과 달리 딱딱함이라는 특성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물에 끓이면 부드러움 특성이 늘어나고 결국 먹을 수 있다. 드디어 가죽장화를 먹을 수 있게 됐다. 그것도 분해하지 않고!
속성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끓여서 부드러움 속성을 높이면 특성도 먹을 수 있게 변한다.
사라진 창발성도 해결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템의 특성과 속성이 차차 변하고, 이번 세대에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던 아이템의 특성이나 속성도 임계점을 넘는 순간 발현됐다. 아이템을 일종의 생물처럼 생각한 것이다.
다만 무조건 기획자의 의도대로 되거나 전혀 예상치 못하는 상황 등은 통제하기 위해서 그룹기능은 다소 허술하게 유지했다. 예를 들어 딱딱함이라는 속성은 에너지가 없음이라는 속성과 엮이면 먹을 수 없음이라는 특성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못을 박거나 무기로 활용되는 ‘도구’라는 특성에 엮이기도 한다.
창발성을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속성도 필요하다.
아이템을 생물로 본다. 사람에게도 격세유전이 있듯. 조합에 조합을 거쳐 시간이 지나며 속성의 변화 등으로 노출되는 특성도 있다.
남은 건 유저학습. 어떻게 쉽게 설명할 것인가?
이제 가죽장화를 먹는 문제는 정말 해결됐다. 다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시스템의 구현은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이걸 유저에게 습득시키는 게 문제였다. 튜토리얼을 만들긴 했지만 게임이 진행되면서 특성의 종류가 제곱 수준으로 늘어나는 만큼 배우는 속도보다 어려워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
초기 디자인할 때부터 유저의 경험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점이 이정수 디자이너의 후회다. 그래서 지금은 최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굳이 가죽장화의 예를 들지 않아도 될 문제지만 <야생의 땅: 듀랑고> 개발팀에게 가죽장화를 먹게 해주세요라는 말은 일종의 슬로건이자 자유도와 창발성의 마지노선 같은 존재다. 개발팀 모두가 왜 가죽장화를 먹어야 하는지 알고, 먹고 싶게 만드는 게 게임의 다양성을 위한 일종의 목표인 셈이다.
그래서 <야생의 땅: 듀랑고> 개발팀은 최선을 다해 가죽장화를 재미있고, 필요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먹게 만들었다. 나머지는 <야생의 땅: 듀랑고>에서 직접 확인해보자.
아이러니한 조건. 이를 위해 적절한 밸런싱과 조절이 중요하다.
<야생의 땅: 듀랑고>의 슬로건이 가죽장화를 먹게 해주세요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