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온라인게임에서 <테라>만큼 우여곡절이 많은 게임도 드물다. 출시 전까지는 최고의 기대작으로 뽑히더니 출시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최악의 인상을 남겼고, 흥행을 반쯤 포기했던 일본에서는 예상치도 못한 학교수영복이 판매고를 올리며 제 2의 전성기를 누렸다.
북미에서 집중적으로 내세웠던 케스타닉은 생각만큼 호응을 얻지 못했고, 소수 취향도 만족시키자는 생각에 집어 넣은 엘린은 <테라>의 상징과도 같은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부분유료화 이후에는 ‘그래도 <테라>가 낫다’는 평가를 들으며 국내에서도 안착했다.
어느 하나 예상할 수 없는 <테라>의 라이브 서비스. 그 8년의 역사를 함께한 김낙형 팀장은 과연 어떤 것들을 배웠을까? 그가 말하는 <테라>의 라이브서비스에서 배운 8가지 점들을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테라>의 라이브팀은 개발팀과 별도의 조직이다. 대규모 업데이트나 신규 캐릭터보다는 시급한 버그해결이나 이벤트에 관련된 콘텐츠 생산, 각 국가에 맞는 콘텐츠 제작 등을 맡는다. 일종의 응급처치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김낙형 팀장은 라이브팀을 ‘엘린 옷장사의 주역’이라 표현하고 있다.
1. 성공은 의외의 곳에서 일어난다.
지금이야 엘린 없이는 <테라>도 없다고 하지만 처음 게임을 개발할 때만해도 엘린이 이 정도로 인기를 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략적으로 가장 공을 들인 캐릭터는 케스타닉이었다. 케스타닉은 <테라>의 독특한 캐릭터도 글로벌 시장에서 어필도 가능하다. 초기 <테라>의 포스터에 케스타닉이 매번 중심에 위치한 것도 그런 이유다.
엘린은 소수 유저 취향을 위해 포트폴리오 수준으로 만든 캐릭터였다. 근육남을 원하는 유저를 위해 만든 아만, 배 나온 아저씨를 원하는 유저들을 위해 만든 바라카처럼 말이다. 그래서 개발도 후반에 이뤄졌고, 심지어 처음에는 포포리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뿐, 별도의 종족도 아니었다.
엘린을 새로운 종족으로 만든 이유도 북미지역의 격한 거부반응 탓이다. 북미는 세계관을 중요시하고 그 세계관도 논리적으로 말이 돼야 하는데, 북미지사에서 엘린을 본 사람들의 첫 질문이 이 종족은 번식을 어떻게 하냐는 거였다. 이러면 북미에서 난리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과정에서 절충안으로 나온 게 UI만이라도 분리하자는 의견이었다. 엘린이라는 이름도 그때야 붙여졌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엘린은 캐릭터 제작 스킬이 가장 뛰어난 상황에서 만든 셈이 됐다. 새로운 종족으로 만든 덕분에 인기도 누렸고.
일본서비스의 인기가 식었을 무렵 <테라>는 일본 투자를 빼고 북미 론칭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정작 이시기에 일본 라이브팀 담당자가 애걸복걸해서 추가했던 ‘학교 수영복’이 대박을 터트렸다. 국내의 모든 수영복 판매량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판매량이다.
덕분에 일본서버에서는 수영복과 부르마, 메이드복 등 코스튬 3신기라 부르는 아이템이 연이어 출시됐다. 엘린의 교복은 일본 한게임에서 매출기록까지 세웠을 정도다. 일본 서비스에 다시 투자하기 시작한 건 물론, 당시 <테라>가 고민하던 부분유료화 전환과 가능성도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모든 서버를 부분유료화로 전환한 이후에는 북미 지역의 우선 순위를 낮췄다. <테라>는 북미에서 <디아블로3>와 <길드워2> 사이에 출시됐다. 판매대에도 제대로 오르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북미 지역의 매출이 가장 높다.
이처럼 모든 일은 첫 계획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그렇다고 아예 계획을 세우지 말자는 건 아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최악의 상황이고, 예상과 다른 상황에서도 대응해 나가는 능력이 중요하다. 포기를 안 하는 것도 중요하다. 만약 당시 일본 라이브팀에서 수영복 도입을 이만큼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테라>는 없었을 것이다.
2.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변한다.
개발 초기 퀘스트는 <테라>의 목표가 아니었다. <테라>를 처음 개발할 때인 2007년만 해도 퀘스트가 MMORPG의 필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WOW>의 확장팩과 <아이온>이 성공을 이어가면서 퀘스트는 필수가 됐다. <테라> 역시 뒤늦게라도 퀘스트를 채워 넣을 필요가 있었지만 이미 다른 목표를 중심으로 프로세스를 진행 중인 상황에서 퀘스트를 제대로 집어 넣기는 어려웠다. 결국 최고레벨까지 양이나 부족하지 않은 수준으로 채워넣는 게 고작이었다.
커뮤니티도 변화가 컸다. <테라>는 출시 초기부터 커뮤니티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예전에는 사람만 많이 모이면 일단 커뮤니티가 돌아가고 그 속에서 유저 스스로 놀 방법들을 찾았지만 <테라>가 나올 당시에는 제대로 설계되지 않은 커뮤니티는 아예 인원이 모이지를 않았다. <테라>의 개발팀에는 커뮤니티 중심의 게임에서 큰 흥행을 거두고 입사한 개발자도 많다. 그만큼 자신의 과거에 빗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건 당연히 쉽지 않다. <테라>만 해도 부분유료화 전환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근데 <테라>는 2달만에 전세계 모든 서비스를 부분유료화로 바꿨다. 그렇게 했던 고생이 지금까지 서비스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온라인게임을 서비스하는 사람이라면 과거의 방법이 지금도 유효한지 끊임없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3. 재미는 아이디어가 아닌 밸런스에서 나온다.
어떤 개발자도 밸런스가 중요하다는 건 안다. 근데 이 밸런스는 실제로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마치 다이어트처럼. 특히 MMORPG는 더 어렵다. 각종 상황들을 모두 실험해보기도 힘들고. 거시적인 경제 등은 게임에 도입하기 전까지는 예측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밸런스는 투자한 만큼 돌아온다. <테라>는 론칭 직전에 15명 규모의 전문 테스터를 모아서 특공대라 이름 붙이고 하루 10시간씩 2달간 게임을 시켰다. 개발자는 옆에 붙어서 문제가 되는 점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고쳐나갔다.
출시 초기에는 그렇게 비판을 받던 <테라>가 그래도 인스턴스던전에서는 인정을 많이 받았는데, 그 배경에 특공대가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특공대를 더 빨리 만들어서 던전만이 아니라 필드 등에서도 실험을 했다면 더 결과가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여기서 밸런싱은 개발자 개인의 몫만은 아니다. 테스트와 밸런스 점검을 위한 전용툴이나 전용테스트룸은 낭비되는 시간을 줄여준다. 사실 온라인게임은 테스트보다 테스트를 준비하는 시간이 더 걸리기 십상인데, 이런 투자와 환경개선이 생산성을 향상시키는데 큰 도움이 된다.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김낙형 팀장은 ‘공격은 팬은 부르지만 수비는 우승컵을 가져온다’는 축구 명언을 인용했다. 아이디어나 화려한 그래픽은 팬을 모으기 좋다. 하지만 결국 이를 지키고 게임의 재미를 끌어올리는 건 밸런스라는 뜻이다.
4. 리텐션은 진짜 중요하다.
부분유료화에서는 유저가 접속을 하고 있어야 돈을 벌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점점 더 게임들의 리텐션(유저의 유지나 재접속)이 중요해진다. 앞으로 게임을 평가하는 유일한 가치가 리텐션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이를 우울하게만 보지말자. 재미는 측정할 수 없지만 리텐션은 측정이 가능하다. 더 좋은 게임을 만드는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도 있다.
5. 친분은 휘발되지만 실적은 남아 신뢰가 된다.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좋은 것보다 일을 잘하는 게 더 중요하다. 회사에서는 사람의 친분보다는 그가 무엇을 해낸 사람이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다만 결과가 중요하다고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결과물로 한 번에 인식을 역전하겠다는 건 무모한 발상이다. 어디까지나 평소의 판단과 꾸준한 결과가 중요하다.
고생 끝에 도착한 보물섬이 비었다는 걸 아는 순간, <테라>가 잘 안됐을 때 사람들이 떠나고 난 순간 많은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남아있는 멤버들이 지금의 <테라>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됐다.
6. 대규모 제작이란 결국 책임회피와의 끝없는 싸움이다.
UI는 게임개발에서 언제나 어려운 부분이다. 기획, 디자인, 개발과 모두 얽힌 부분이고 그래서 책임 소재가 분산되고 의사결정도 어렵다. 이외에도 여러 팀이 같이 얽혀있는 부분은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의 책임감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책임이 명확하지 않은 데서 오는 문제다.
참고로 애플은 누군가 팀이나 조직에 숨는 것을 막기 위해 DRI, 그러니까 직접 책임자라는 비공식 직급을 두고 서류에 이를 언제나 명시한다. 책임감을 느끼고 해결하려는 문화다. <테라>도 합리적인 책임 분산을 위해 많이 노력했다. 라이브팀이 대표적이다.
게임 출시 이후 업데이트는 계속 개발해야 하는데 서비스 대응만으로도 지친 개발자들은 이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응급실처럼 라이브팀을 따로 세웠다. 근본적인 해결은 못해도 지혈을 하고 개발실에서 나중에 수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만드는 팀을 만들었고 라이브팀장이 퍼블리셔와도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모든 문제는 결국은 어떻게(HOW)보다 누가(WHO)에 해결책이 있을 때가 많다.
7. 개발과 경영은 분리할 수 없다.
개발자라면 누구나 경영자가 개발을 터치하지 않기를 바란다. 근데 이건 경영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생기는 일이다. 경영은 조직의 목표를 위해 회사의 자원활용에 대한 의사결정과 이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영자는 회사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개발에 신경을 쓰는 게 당연하다. 이를 안 하면 오히려 방만한 경영이다.
물론 그 결정에 개발자가 공감하느냐는 별개의 이야기다. 반대로 개발자 특히 PD는 기업과 경영에 대한 공부도 해야 한다. PD가 경영을 모으고, 경영자의 이야기에 공감을 못해서는 프로젝트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반대로 경영이 게임을 망치기도 한다. 실적을 철저하게 점수로 나누고, 이에 따라 지불하는 금액이 천차만별로 달려졌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스택랭킹제도가 대표적이다. 인사평가나 보상은 중요하지만 이것이 회사가 나가는 방향도 결정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회사가 돈 버는 게임만 잘 쳐주면 개발자는 당연히 돈 버는 게임에만 다 몰릴 것이다.
물론 헐리우드처럼 창의력이 넘치는 상황에 상업성도 잡는 시스템도 있다. 오랜시간에 걸쳐 쌓아온 일종의 경영노하우인데, 우리도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개발과 경영이 서로 더 많이 이해해야 한다.
8. 온라인게임은 엔터테인먼트 서비스업이다.
작가이자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비즈니스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해야 하는 일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게임도 같다. 지금도 우리 고객이 돈을 주고 게임을 살까? 그건 아니다. 콘솔이나 월정액은 돈을 먼저 내고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거나 빌리는 방식이지만, 부분유료화는 다르다.
즐기는 건 공짜고 유저는 아이템만 돈을 내고 산다. 그럼 아이템이 소프트웨어일까? 우리는 대체 뭘 파는 걸까? 김낙형 팀장은 결국 고객이 사려는 건 소프트웨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재미난 시간’이라 정의했다. 부분유료화 역시 아이템을 사서 더 재미난 시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즐거운 경험을 판다는 본질은 오락실 시절부터 바뀌지 않았지만 기술에 따라 재미의 방식은 달라진다. 그리고 온라인게임이 갖는 재미의 방식은 사람의 관계에서 나온다. 실제로 사람 사이의 관계와 게임 자체의 완성도를 모두 갖춘 <WOW>가 출시될 이후 온라인게임 개발사 사이에도 게임의 완성도에만 집중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나온 게임은 대부분 실패했다. 이는 온라인게임의 재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가 게임의 완성도가 아닌 커뮤니티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더 변하더라도 커뮤니티에서 재미를 느끼는 게임들은 계속 성공해나갈 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바일게임이 왜 재미있는 지도 알 수 있다. 게임적 완성도는 떨어질 지 몰라도 서비스 관점으로 보면 재미의 이유가 있다. 비단 게임만 아니다. 마케팅이나 오프라인 행사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개발사가 제공하는 모든 것이 서비스에 포함되는 탓이다.
예를 들어 <테라>에서 유저 공모전을 통해 신규 의상인 앨리스 복장을 판매했는데 판매 하루 전에 문제점을 찾았다. 같은 앨리스 치마를 입은 사람 둘이 가까이 가면 치마가 들려 올라가는 버그다.
이를 하루 만에 고칠 수가 없어서 트위터에 솔직히 이야기를 했더니 유저들이 오히려 속옷을 보겠다며 치마를 구입하고 서로 붙으려 드는 장면들이 연출됐다. 고객과 소통을 잘하니까 오히려 쿨하게 받아들여진 경우다.
결국 우리가 만든 게임을 바탕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그 속에서 고객이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서비스는 고객과의 소통에서 나온다. 오프라인 이벤트나 고객이 참여하는 방송도 좋은 소통방법이다. 개발사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같이 만들어 간다는 느낌이 들면 유저는 이 게임을 다른 게임과 다르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걸 느낀 고객은 굉장히 오래 남아서 우리 게임을 사랑해 준다.
지금까지가 <테라>의 개발초기부터 라이브팀장까지 8년을 몸담았던 김낙형 팀장이 <테라>의 라이브서비스를 통해 배운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