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TRPG다] 컴퓨터 RPG의 선조지만,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TRPG. 디스이즈게임이 TRPG의 역사와 한국 TRPG의 변천사를 돌아보는 연재물을 마련했습니다. 15년 동안 한글 TRPG만 출판해온 ‘도서출판 초여명’의 김성일 편집장이 소개하는 한국 TRPG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지난 회에는 1990년대 말부터 2013년까지 한국의 TRPG 상황에 대해, 그리고 그 당시 TRPG의 고향인 미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나마 썼습니다. 그리고 한국 TRPG계가 땅 밑에서 내실을 키워가는 형국이었다고도 했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좀 갑작스럽게 느껴지시겠지만, 이번 글은 북미의 소규모 독립 TRPG, 이른바 ‘인디 TRPG’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20세기 말, TRPG계의 거인이 된 ‘위자드오브더코스트’는 <던전앤드래곤>(Dungeons and Dragons, 이하 D&D)의 주요 내용 대부분을 누구나 저작권료 없이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OGL이라는 이름의 재사용 허가 계약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편승하여 <D&D>와 호환되는 TRPG 자료들을 만드는 작은 출판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시장에는 ‘D20’(D&D 호환 제품을 나타내는 브랜드명) 제품들이 범람하여, 90년대를 풍미하던 중견 TRPG들을 밀어냈습니다. 이 당시 유서 깊은 TRPG 회사 몇 개가 폐업하거나 흡수, 합병되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같은 PC온라인게임도 D20의 룰로 재해석되었다.
당연히 시장이 ‘D20’ 일색으로 돌아가는 데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이제 완전히 새로운 TRPG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책 여러 권으로 하나의 시스템을 갖추는 80~90년대식 체제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개인 레벨에서 TRPG를 만들어 내기에는 그런 거대한 라인을 갖추는 것보다 특징적이고 완결성 있는 한 권짜리 책들을 만드는 쪽이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물결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80~90년대에 걸쳐 재야에서 발전시켜 온 TRPG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론을 실험하기에도 대형 라인보다는 책 한 권짜리 작은 TRPG 시스템이 적격이었습니다.
이런 방향성을 ‘인디 TRPG’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OGL 붐을 겪으며, 소규모 출판의 노하우는 이미 TRPG계에서 얻기 쉬운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노트북과 태블릿 등 휴대용 컴퓨터가 보급되자, 인쇄비가 들지 않는 전자책도 날이 갈수록 매력적이 되었습니다. 소규모 TRPG 출판에 매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것입니다.
그 유리한 환경을 이상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킥스타터’를 통한 크라우드펀딩이었습니다. 많이들 아시겠지만, 크라우드펀딩은 프로젝트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후원을 받고 액수에 따라 상품을 제공하는 자금 마련 시스템입니다. 예약판매와 비슷하지만, 일정한 금액이 모이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는 것이 다릅니다.
아무리 소규모 출판이라 해도 초기 비용을 조달하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자칫하면 평생의 저축을 까먹는 첩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직접 겪어 봐서 압니다.) 크라우드펀딩은 이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TRPG 룰북의 귀한 홍보 수단이 되어 주었습니다.
킥스타터에서 8만2,879 달러의 자금을 후원받아 화제가 된 <던전월드>(Dungeon World).
2012년 12월, 이 추세는 드디어 한국에도 전파되었습니다. 크라우드펀딩 전문 사이트 ‘텀블벅’에 국산 TRPG 룰북 제작 프로젝트가 올라온 것입니다. 10년도 넘는 시간 동안 우리나라에는 초여명에서 나오는 <GURPS> 책들만이 출간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마름을 끝낼 수 있을 가능성이 처음 보인 것입니다.
한국 TRPG 크라우드펀딩의 첫 주자는 <던 오브 페이트>(Dawn of Fate)였습니다. <FATE>라는 준범용 TRPG 시스템에 자료를 덧붙이고 룰을 고쳐서 만든 현대 배경의 오컬트 TRPG입니다. 2개월 정도의 모금 끝에 1,000만 원이 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십수 년간 초여명에서 TRPG 책을 만들어 온 입장에서, 이 의외의 전개에 위기 의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습니다. TRPG가 시장에 다양하게 존재하면 존재할수록 새로운 인구가 유입될 통로가 많아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당시는 초여명이 <GURPS> 라인에서 어느 정도 책을 갖추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유를 쌓아가고 있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 여유로 <GURPS>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의논을 내부에서 2012년 내내 해 왔는데, 정말 우연히도 2013년 1월에 <던전월드>라는 작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던전월드>는 미국 인디 RPG계의 최신예 시스템이었습니다. 마스터의 부담이 적고 플레이어의 역할이 강조된다는 점은 저희의 평소 TRPG 철학에 잘 맞아 들어갔습니다. 쉽게 잡고서 금방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내용이 완전히 공개되어 있어서, 자유로이 번역하고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저희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던전월드>를 번역 출간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번역한 텍스트는 무료로 공개하고, 실제 책의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목표액 300만 원을 내걸고 텀블벅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첫날 목표액을 훌쩍 뛰어넘고, 50일 후 모금액은 5,800만 원을 넘었습니다. 원래는 그림도 없는 조촐한 책이 될 예정이었지만, <던전월드>는 하드커버에 책집, 컬러 일러스트가 들어간 호화판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모금액 상승에 따라 후원 선물의 가치가 커지는 것도 크라우드펀딩의 묘미라 하겠습니다.
<던전월드> 프로젝트 페이지. <던전월드>는 지난해 5월 27일, 총 5,831만 원의 후원금을 모금하며 국내 게임 관련 크라우드펀딩 사례 중 최고 금액을 기록했다.
<던전월드>의 후원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고민해결! 마법서점>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텀블벅에 나타났습니다. 이쪽은 <새비지 월드>(Savage Worlds)라는 범용 시스템을 이용한 자작 룰북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준비한 ‘구르는 사람들’은 정식 출판사 등록을 마치고, <새비지 월드>의 판권을 가진 외국 회사와 라이선스 계약도 맺었습니다. 초여명이 혼자 남았던 2000년 뒤로 첫 TRPG 출판사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 시장에 지속적으로 활동할 주체가 또 하나 생겼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기쁜 일이었습니다. <고민해결! 마법서점>은 텀블벅에서 2,500만 원이 넘는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던전월드>와 <고민해결! 마법서점>이 성황리에 모금을 마친 후, 2013년 늦여름에 또 하나의 새로운 출판사가 설립을 선언했습니다. TRPG 전문 출판사 ‘이야기와 놀이’는, 부부가 하는 작은 사업이라는 점에서 초여명과 닮았습니다. 여기서 내건 것은 <폴라리스>(Polaris)라는 이름의 인디 RPG였습니다. 멸망해 가는 북방의 나라에서 기사들이 벌이는 비극을 그린, 짧고도 아름다운 TRPG입니다. 비싼 후원 옵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폴라리스>는 금액 면에서 아주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후원자의 수도 많았습니다.
그 뒤에는 <이어리니안의 유산>이라는, 외국 룰의 번역도 사용도 아닌 독특한 설정의 완전 자작 시스템이 후원 모집에 성공했습니다. <던전월드>와 비슷하게, 이쪽도 프로젝트 시작과 함께 책의 내용을 일부 인터넷에 공개했습니다.
지난 15년간 초여명은 꾸준히 책을 냈지만 그래봤자 1년에 1~2권 꼴이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 한 해에만 무려 다섯 개의 프로젝트가 모금을 완료했습니다. 초여명이 16주년 기념으로 번역 공개한 <페이트 코어>(FATE Core), 정상 출간한 <GURPS 추리와 수사>까지 따지면 다 합해서 책이 7권입니다. 각 프로젝트의 별책부록, 그리고 초여명의 자작 미니 TRPG <도망쳐!>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더욱 늘어납니다. 그러면 이제 드디어, 바라 마지 않던 한국 TRPG의 봄이 온 것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다음 번, 진짜 마지막 회에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고민해결! 마법서점> <폴라리스> <이어리니안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