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TRPG다] 컴퓨터 RPG의 선조지만,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TRPG. 디스이즈게임이 TRPG의 역사와 한국 TRPG의 변천사를 돌아보는 연재물을 마련했습니다. 15년 동안 한글 TRPG만 출판해온 ‘도서출판 초여명’의 김성일 편집장이 소개하는 한국 TRPG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2013년까지 한국에 출간된 TRPG는 총 4종류였습니다. <던전앤드래곤>(Dungeons and Dragons)과 <소드월드 RPG>(ソード・ワールドRPG), <GURPS>, <라콘도리아 RPG>입니다. 그나마 2000년부터는 <GURPS> 시리즈만 출시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은 2013년에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무려 다섯 개의 TRPG 시스템이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각 프로젝트의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 이야기했으니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이제 다섯 프로젝트가 모두 목표를 몇 배씩 뛰어 넘는 대성공을 했으니 앞으로 한국 TRPG의 미래는 밝다고 봐야 하겠지요? TRPG의 풍년, 다양화가 일어나겠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TRPG는 1974년 탄생한 이래 많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일본이나 북유럽에서는 TRPG가 북미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TRPG의 종주국인 미국 내에서도 TRPG의 스타일은 두어 갈래로 나뉩니다. 게다가 지금은 크라우드펀딩과 인디 TRPG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작품들이 출시되고 있습니다.
국내 펀딩 프로젝트들의 성공은 이런 다양한 작품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외국 TRPG들이 많이 소개되고 선택의 폭이 넓어져 층이 두터워지면, 한국에서도 독자적인 흐름과 경향이 생기고 역량이 축적되면서 새로운 TRPG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심지어 <페이트 코어>(FATE Core)나 <던전월드>(Dungeon World) 같은 책은 그 텍스트의 사용권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원작자를 표시하고 허락 사항을 밝히기만 하면 누구나 상업적으로든 비상업적으로든 이를 이용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새로운 TRPG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저런 작품을 활용한다면 시간과 노력을 상당히 절약하면서 독창적인 내용을 만드는데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외국에서도 흔한 일입니다. <페이트 코어>도 그 전의 여러 <페이트> 시스템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최초의 <페이트>도 90년대 초의 <퍼지>(Fudge)라는 작품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던전월드> 또한 <아포칼립스 월드>(Apocalypse World)의 디자인 개념을 이어 받은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이런 재료들을 이용해서 새로운 TRPG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던전월드>와 <페이트 코어> 한국어 공개판 링크 (이미지를 클릭하세요)
현재 한국 TRPG의 조건은 매우 양호합니다. 새로운 작품의 출간을 환영해 주는 팬들이 있습니다. 자금 마련과 홍보를 함께 할 수 있는 수단인 크라우드펀딩도 있습니다. TRPG에 무덤덤하던 외부의 시선도 조금씩 이쪽을 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 주옥같은 걸작이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채로 있고, 이런 작품은 대부분 한 권짜리라 출간에 부담이 없습니다. 사용료나 저작권 침해 걱정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공개된 양질의 최신 자료도 많으며, 그 중 유력한 것들 몇 가지는 한국어로 번역까지 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좋았던 적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연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앞날이 장밋빛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회의가 섞인 전망을 합니다.
다섯 개의 크라우드펀딩 TRPG 프로젝트 중에 현재 결과물을 낸 것은 단 두 작품뿐입니다. 그나마 하나는 1년이 넘는 지연 끝에야 결과물이 나왔고, 처음의 약속을 일부 포기했습니다. 나머지 세 건도 모두 약속한 기한을 적게든 많게든 넘기고 있고, 아직까지 배송일을 확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TRPG계는 비록 2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출간된 책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작품에 관한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는 좋은 TRPG 책의 조건이 무엇이고 자기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생산자 또한 스스로의 역량과 일의 난이도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실물이 나온 뒤에야 판매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생산자의 말만 믿고 후원을 하게 되는 크라우드펀딩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2014년의 TRPG계는 작년보다 조용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선발 주자들의 일정 지연을 통해 일의 난이도를 간접적으로 깨닫고 프로젝트 개시를 미루거나 포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존 펀딩에 기꺼이 참가했던 후원자들도, 애타게 기다리던 작품들의 일정이 연기되었거나 결과물이 실망스러웠다면 새로 후원하기를 주저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크라우드펀딩이 TRPG 팬들의 외면을 받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찾아오면, 한국 TRPG 시장에는 다시 초여명만 남을 것입니다. (저희는 남습니다. 지난 17년간 그렇게 해 온 것처럼.) 저희는 <던전월드>의 성공으로 전보다 훨씬 좋은 상황에 있기 때문에, 초여명만 있는 TRPG계도 과거보다는 풍성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드디어 찾아올 뻔했던 전성기에 비하면 아무래도 아쉬운 형국입니다.
최선의 상황은 우선 현재의 프로젝트들이 빠른 시일 내에 양질의 결과물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물을 인정 받은 사람들이 이번의 지연 사태로부터 교훈을 얻되, 위축되지 않고 조속히 다음 작품의 준비에 착수하는 것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프로젝트가 올해 중후반이나 내년 초에 등장하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한 권씩 한 권씩 꾸준히 관록을 쌓아 나가는 크리에이터들이 나올 테고, 그 과정은 아마 초여명이 지난 십수 년간 홀로 겪은 것보다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이제는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며
저는 한국의 TRPG가 어느 날 갑자기 흥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순간의 붐과 겉보기의 화려함에 혹하지 않고 천천히 쌓아 나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년의 크라우드펀딩 훈풍은 항상 꿈만 꿔 오던 미래를 손에 잡힐 것 같은 곳까지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제는 속도가 조금 더 붙어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욕심이 듭니다.
<던전월드> 프로젝트를 마무리해 나가던 작년 8월, 저는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면, TRPG를 하는 사람들이 2013년을 가리켜 그 해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할 것”이라 쓴 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럴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일찍이 겪어 본 적 없는 봄이 찾아올 것인지, 아니면 작년의 따뜻함은 한낱 겨울밤의 꿈에 지나지 않았는지? 그것은 올해 결정이 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간 불규칙하고 긴 연재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또 만나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