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잘 보내고 계시나요? 긴 연휴도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설날이라 문득 생각해보니 해돋이도 1월 1일에 보고 달력도 1월 1일에 바뀌고 나이도 1월 1일에 더 먹습니다. 음력설의 가치는 '신년'보다도 긴 연휴, 온 가족이 한데 모이는 자리, 그리고 세뱃돈에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한국 말고도 여러 나라에서 새해를 두 번 맞이합니다. 중국, 베트남이 한국과 똑같은 설을 쇠고 몽골도 음력설을 보냅니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는 점성술에 따라 4월에 새해를 한 번 더 맞습니다. 동남아시아를 찾는 관광객에게는 '물축제' 송끄란으로 알려져 있죠. 에티오피아력이 있는 에티오피아의 설날은 무려 9월 11일입니다. 율리우스력을 사용했던 러시아도 1월 14일에 새해 인사를 한 번 더 합니다.
이들 나라는 대개 양력(그레고리력)을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고유한 설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설날은 세계적인 양력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집단이 역사적·문화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조상, 신, 자연을 기리는 날입니다. 동남아시아는 부처의 가르침에 경의를 표하고 물로 더러운 것을 씻어내며, 에티오피아는 봄을 맞이하는 가무를 즐기면서 에티오피아 정교의 중요한 성인 요한의 축일을 기립니다.
설날에 자신들의 옛이야기를 기리는 사람들처럼, 잊혀가는 설화를 게임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기억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게임 속 주인공들은 영적인 존재를 만나기 위해 모험을 떠나 결투를 벌이고 퍼즐을 풀면서 우리에게 먼 옛날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설화를 배경으로 한 게임 다섯 편을 소개합니다.
장르: 퍼즐 어드벤처 플랫폼: 스팀, iOS, 안드로이드, PS4, Xbox One 가격: 16,000원(스팀) 한국어 지원: O
혹한의 알래스카 툰드라. 한 마을에 이누이트가 살고 있습니다. 살을 에는 날씨는 이누이트에게 거친 숙명이자 삶의 축복입니다. 이누이트는 추위 덕분에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소녀 누나(Nuna)도 이누이트 마을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무지 따뜻함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눈보라가 이누이트 마을을 덮쳤습니다.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자 주민들은 먹을 게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눈보라가 계속 불자 누나는 이상 기후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소녀는 얼어붙은 북극에서 선조와 영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네버 얼론>은 알래스카 툰드라 원주민 설화를 조합해 만든 퍼즐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당찬 소녀 누나는 귀여운 북극여우와 함께 난관을 헤쳐나갑니다. 플레이어는 사다리를 타고 무기를 쏘는 누나와 좁은 길을 뚫고 벽을 타는 여우를 번갈아 조작해 스테이지를 깰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누이트 설화와 이야기 속 영적인 존재가 등장하고 눈보라가 그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부드러운 조작과 차분한 배경음악은 몰입감을 더합니다.
게임 개발 과정에는 이누이트 원주민들이 직접 도움을 주었습니다. 게임에 등장하는 부엉이와 만나면 '문화 보물'을 획득하고 실제 원주민들과 나눈 인터뷰를 볼 수 있습니다. 해외 웹진 유로게이머는 <네버 얼론>에 10점 만점을 주며 "놀랄 정도로 가슴이 아픈 훌륭한 게임"이라 극찬했습니다. 또 게임은 2014년 E3 에디터스 초이스, 팍스 프라임 에디터스 초이스를 수상했습니다.
장르: 액션 어드벤처 플랫폼: PS4, Switch, 스팀 가격: 21,800원 (PS4 다운로드판) 한국어 지원: O
타라후마라족은 멕시코 바란카스 협곡에 살고 있습니다. 험악하기로 소문난 중남미 마약 카르텔도 못 잡는다는 타라후마라족은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뜀박질은 신이 내린 축복이면서 또 삶의 방식입니다. 이들은 사냥감을 잡을 때 활을 쏘거나 덫을 놓지 않고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갑니다. 인류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최대 48시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고 하네요.
<뮬라카>는 타라후마라족 신화를 재구성한 게임입니다. 타라후마라족의 선택받은 주술사 뮬라카는 대립과 반목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먼 길을 나섭니다. 뮬라카는 여정 중 세계를 지키는 반신(半神)들을 만나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며 파국의 원인을 알아내고, 세계의 평화를 되찾아야 합니다. 게임에서 뮬라카는 영적인 존재를 관찰하는 '수쿠루아메의 눈'을 사용해 신을 만나거나 아이템의 위치를 찾습니다.
주인공 뮬라카는 타라후마라족이기 때문에 게임에서 쉴 새 없이 험준한 지형을 달릴 수 있습니다. 동물로 둔갑해 하늘을 날거나 약초를 배합해 각종 특수 능력을 쓸 수도 있습니다. 뮬라카는 타라후마라족 신화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잇는 중계자로 플레이어는 주술사 뮬라카를 통해 왜 타라후마라족이 달리는 사람들이 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뮬라카>의 메타크리틱 점수는 현재 73점으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 2018년 가을에 나온 게임치고는 로우 폴리 그래픽의 수준이 높지 않으며, 액션 중 타격/피격 판정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멕시코 소수민족의 신화를 훌륭하게 연출했습니다. 개발사 리엔조의 개발자 8명은 4년 동안 타라후마라족과 함께 생활했으며 <뮬라카>의 수익 일부는 멕시코 원주민을 위한 기금 조성에 쓰입니다. 게임 웹진 게임스팟은 <뮬라카>를 "전형적인 어드벤처 게임 이상의 뭔가를 만드는 독특한 배경의 게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장르: 리듬 게임 플랫폼: iOS 가격: 무료 한국어 지원: O
만주족 설화 '니샨 샤먼'은 지옥 여행을 떠나는 우리의 '바리공주'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망자를 구할 영력이 있는 니샨은 억울하게 단명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떠납니다. 6명의 중국 대학생이 5개월 동안 제작하고 텐센트 모바일 스튜디오가 지원한 <니샨 샤먼>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모바일 리듬 게임입니다.
소년을 구하기 위해 니샨은 5개의 관문을 여행합니다. 플레이어는 음악에 맞춰 좌·우측 패턴에 맞춰 북을 때려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악귀를 물리칩니다. 관문마다 나오는 음악은 여타 리듬 게임에서 즐길 수 없던 음악인데요. 모두 웅장한 북소리를 중심으로 피리, 마두금, 배음 등이 가미된 만주 전통 무속 음악입니다. 전자음이 주를 이루는 기존 리듬 게임과는 비교되는 지점입니다. 노트의 난이도는 아케이드 리듬 게임을 즐기지 않는 게이머라도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니샨 샤먼>은 '리듬에 맞춰서 누른다'는 장르 특징에 충실하면서도 만주족의 문화를 잘 보여줍니다. 비단잉어, 나뭇잎 등 노래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배경은 모두 전통 종이 공예 스타일로 표현됐습니다. 게임의 '비법서' 코너에는 <니샨 샤먼>에 삽입된 만주 신화에 대한 정보도 볼 수 있습니다.
설화 '니샨 샤먼'은 요절한 아이를 구해오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구한 니샨은 이후 다른 넋을 살려 이승으로 오던 길에 자신을 두고 먼저 떠나간 남편을 마주칩니다. 니산과 저승을 총괄하는 만주 신화의 여신 '오모시 마마' 사이의 관계도 중요한 지점이며, 니샨과 현세의 임금 사이의 갈등 관계도 있습니다. <니샨 샤먼>의 제작진은 게임의 에필로그를 통해 "소수민족의 신화를 알리는 우리의 시도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밝혔습니다.
장르: 디지털 보드게임 플랫폼: 스팀, Switch 가격: 15,500원(스팀 / 미리 해보기) 한국어 지원: X
맥주의 원조가 어딘지 아시나요? 최초의 보드게임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입니다. 먼 옛날 수메르인은 신전에서 맥주를 빚고, 주사위를 던져 말판을 움직이는 보드게임을 즐겼습니다.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전공한 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만든 디지털 보드게임입니다. 게임은 메소포타미아 신화 중 '엔메르카르와 이라타의 왕'을 모티프로 하고 있습니다. 수호신 이난나의 총애를 받아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가 되기 위한 왕들의 경쟁을 담은 이야기인데요. 신화에 등장하는 두 세력인 아라타와 우루크는 서로 경쟁적으로 신전을 짓고 공물을 바치며 지배자가 되려 분투합니다. <수메르>에서는 네 명의 귀족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지구라트에서 경쟁을 벌입니다.
게임은 지구라트 안에서 세력을 불리고 제물을 잡아 예배를 드리며 이난나의 축복(포인트)을 얻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플레이어는 나머지 경쟁자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 여신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포인트를 위해서는 보드 안에서 곡식을 재배하고 염소를 키운 다음 그를 전부 이난나에게 바쳐야 합니다. 플레이어들은 서로 철저한 경쟁자로 비열한 방법으로 상대방의 재산을 뺏을 수도 있습니다.
'항아리 게임'으로 알려진 <게팅 오버 잇>의 개발자 베넷 포디는 <수메르>를 "보드게임과 비디오게임의 장점을 잘 살려냈다"며 호평했습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야 하는 거야"라는 <스카이캐슬> 차민혁 교수의 말이 바로 게임의 목표입니다. 참, 수메르 문명에는 피라미드가 없었으니 지구라트로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장르: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플랫폼: 스팀 가격: 4,400원 한국어 지원: O
한국에서 가장 빼어난 유물들이 망라된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는 무료입니다. 서울에서 약간의 차비만 들이면 '국보'급 문화재를 실컷 보고 나올 수 있습니다. 약탈 품목을 비롯한 해외 유물이 너무 많아서 자율기부를 받는다는 영국의 대영박물관을 제외하면 전 세계 국립박물관은 대체로 입장료를 받고 있습니다.
연못의 신 '호연'이 작은 연꽃과 함께 부처를 만나기 위해 문화재 속 동물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내용의 <호연지기>는 4,400원입니다. 연못의 신이 부처를 만나러 간다는 원전(原典)도 없고, 게임에 나오는 문화재도 대부분 공짜로 볼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수지가 안 맞습니다.
<호연지기>는 우리 문화재를 바탕으로 새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연꽃을 피우려 부처를 만나러 간다는 발상은 부처가 중생의 갸륵한 소원을 들어준다는 일반적인 전설처럼 다가옵니다. 그 가운데 민화 '까치호랑이'의 익살스러움, 수묵화 '죽음의 자화상'의 어두움,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공간감이 게임에 녹아들었습니다. 플레이어는 픽셀 아트로 구현한 40개의 맵과 캐릭터를 보면서 전투 없이 너그럽게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설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호연지기>의 스토리를 '설화'로 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를 기반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서사성이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설화적'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문화재도 좋아하고 게임은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게임으로 우리 문화재를 바탕으로 한 새 이야기를 지어낸 <호연지기>는 앞으로 오래 기억될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4,400원이 아깝지 않습니다.
분량상 소개해드리지 못한 게임도 많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횡스크롤 액션 게임 <아포테온>, 인도 신화를 로그라이크로 만든 <아수라>, 페루의 전설을 어드벤처 게임으로 만든 <툰체>도 주목할 만한 게임입니다. 또 한국의 전설로 만든 어드벤쳐 보드게임 <설화전>은 얼마 전 크라우드펀딩을 성공적으로 마쳤죠. (바로가기)
<갓 오브 워>나 <위쳐>처럼 신화나 판타지를 재창조한 AAA급 게임도 좋지만, 이렇게 전 세계 곳곳의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인디 게임도 충분히 작품성과 경쟁력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정말 많은 설화가 있는데요. 새해에는 한국의 설화로 만든 게임을 더 많이 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