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기사에서 "셧다운제 폐지는 게임 생태계의 오랜 숙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여론이 뜨거운데 10년 전 "사상 최대의 규제가 만들어졌다"며 강하게 반대하던 한국 게임업계는 현재 상황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TIG 2021 셧다운제 특집
① 2004~2021, 셧다운제의 역사를 돌아보다 (바로가기)
② 셧다운제 폐지, 정말 게임 업계의 오랜 숙원일까?
③ 여성가족부 해체, 셧다운제 폐지에 도움이 될까? (바로가기)
④ 셧다운제? 최종 보스는 따로 있다 (바로가기)
⑤ 셧다운제 폐지 이슈의 중심, '우마공' 전현수 매니저를 만나다 (바로가기)
⑥ 셧다운제 실효성 논란, 제대로 종결시킨다 (바로가기)
⑦ 두 개의 셧다운제... '게임시간 선택제'도 문제? (바로가기)
⑧ 선생님들, 게임은 해보셨습니까? (바로가기)
강제적 셧다운제가 시행된지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시스템 구축은 끝났고 이를 바탕으로 운영도 하고 있는 상황이니 실효성과 별개로 더이상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물론 소비자이자 셧다운제 당사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구체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겠지만요.
그런데 일각에서는 현행 강제적 셧다운제는 게임업계에서 그렇게 공들여 폐지하고 싶지 않은 제도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미 시행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만들어진 제도를 업계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게임업계가 강제적 셧다운 10년 동안 크리티컬 대미지를 입지 않는 체질로 변형되었다는 이유도 있겠죠.
1편에서 제도 시행 전부터 한국에만 적용되는 인증 시스템을 만들기 까다롭다는 목소리가 높았으며, 게임물등급위원회 담당자는 제도 시행 직후 "셧다운제를 염두에 둔듯 청소년이용불가 등급을 받으려는 업체가 늘고 있다"는 고백이 존재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고백이 사실이라면, 16세 미만 셧다운 시스템을 만들어 도입하느니 아예 성인 대상 게임을 만들기로 한 업체가 많아졌다는 뜻도 됩니다.
16세 미만 셧다운 적용은 현행 게임 이용 등급제와 맞지 않았습니다. 현행 등급제는 전체이용가, 12세, 15세, 청소년이용불가로 이루어졌는데요. 문체부는 14세 미만, 여가부는 19세 미만을 연령으로 주장하다가 절충된 안이 어정쩡한 '16세' 미만입니다.
등급제도와 연계해서 셧다운제 연령을 맞췄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16세 미만이라는 나이를 또 별도로 인증하고 차단 시스템을 도입하느니, 셧다운 시스템을 넣지 않아도 알아서 필터링이 되는 청소년 이용불가로 간 것이죠.
이러한 까다로움은 지금까지 작동 중인데요. 2019년 4월, 카카오게임즈의 김상구 본부장은 <페스 오브 엑자일> 국내 출시 간담회에서 "셧다운제 등 청소년을 위한 안정장치를 추가하면 글로벌 버전과 달라지고, 추가 일이 진행되기 어렵기 때문이다"라며 게임의 성인 버전만 서비스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물론 <POE> 자체의 게임성 이슈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셧다운제 시행 직후, 대형 게임사들은 재빨리 셧다운제를 도입하면서 대응했지만, 중소 게임사들에게는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습니다.
웹게임은 사실상 자취를 감춘 영역이 됐고, 이제 PC 온라인게임을 서비스하는 중소 규모 게임사는 2021년 현재 한국에 많지 않습니다. 셧다운제의 도입은 중견 업체, 다시 말해서 허리의 생존을 어렵게 만드는 데 일조했습니다. 시스템을 구축하고 감당할 수 있는 업체들의 지위는 공고해졌습니다.
셧다운제의 강력한 시행에도 게임 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두었습니다. 모바일게임으로 체질 개선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전편에서 본 것처럼 모바일게임에는 셧다운제를 적용하기 어렵고, 여성가족부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020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국내 게임 시장은 지난 10년 동안 연평균 9% 성장했는데 이 성장을 견인한 것은 대부분 대기업입니다. 그리고 이들 대기업들은 그동안 셧다운제 덕분에 사라진 중견 개발사들의 인적자원을 흡수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성장을 가속화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신작 온라인게임의 출시도 지지부진해졌습니다. 기기 이용 환경 변화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십수년 된 PC 온라인게임은 셧다운제 환경 속에서 (때때로 중차대한 실수를 거듭하지만 대체로) 운영의 묘를 발휘하며 장수하게 됐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대형 게임사나 이들을 대변하는 게임산업협회에 셧다운제 폐지를 원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과거 협회는 실제로 셧다운제 폐지를 요구하면서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셧다운제 폐지 카드는 4대 중독법 저지, 확률형아이템 자율규제, 온라인게임 결제 한도 폐지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4대 중독법과 확률형 아이템에 대해서는 아래 두 기사를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관련 기사]
뜨거운 논쟁에서 사회적 이슈로, 중독법 히스토리 (바로가기)
TIG 기사를 중심으로 보는 확률형 아이템 10년 史 (바로가기)
2015년, 디스이즈게임과 강신철 게임산업협회장이 나눈 인터뷰를 보시겠습니다.
Q. 앞서 자율규제 범위를 점차 확대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협회에서 궁극적으로 꿈꾸는 자율규제는 어떤 모습인가?
A.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확률형 아이템 정보 공개만을 자율규제하고 싶진 않다는 것이다.
청소년 게임 이용 시간이나 개인정보 등 기업들이 나서서 자율규제할 수 있는 것은 많다. 하지만 이 대부분이 현재는 나라에서 법으로 업계에게 특정한 틀을 강요한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업계의 책임도 크다. 하지만 계속 법적 규제만 있어선 업계는 수동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법이 하라는 것만 따르면 책임은 지지 않으니까. 업계는 물론 유저들에게도 결코 좋은 그림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정말 먼 길이다. 일단 무엇보다 업계에는 자율규제 경험 자체가 없다. 때문에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를 시작으로 점차 자율규제를 넓혀나가는 것이 목표다. 사실 이 때문에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도 시작하는 것 자체에 더 무게를 뒀다.
당초 게임업계는 '자율규제안'에 셧다운도 집어넣었습니다. 업계는 비즈니스에 대한 자율규제를 받아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2019년 PC 온라인게임 결제 한도 폐지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지만, 당시 같이 손보기로 논의됐던 셧다운제는 아직도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여성가족부라는 '맞수'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기사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형 게임사로 이루어진 게임산업협회는 원하는 바를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셧다운제 폐지에는 미지근한 온도로 대응해오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전 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셧다운제 폐지요? 그걸 위해 게임업계가 뭘 했죠?” (바로가기)
- 게임업계에서 협회 같은 것도 만들고 하는데, 협회든 회사든 대관(對官) 행위가 별로 없다. 정치인에게 후원금 내고 로비같은 것 하라는 게 아니라, '셧다운제가 실효성이 없다, 손실이 발생한다' 라고 하면 폐지나 개정에 대한 근거는 게임업계가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 아무런 근거도 만들어 주지 않으면서 의원에게 대신 싸워달라고 하면 의원도 어렵지. 의원이 나서서 싸울 수 있도록 무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
- 게임업체가 셧다운제로 얻는 피해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큰 지 작은 지 알 수 없다. 말도 안 하고 행동도 안 하니까. 어쩌면 셧다운제의 영향이 막상 별로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내가 혼자 연구비를 들여서 진행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는 사람의 권리까지 대변해 주기는 어렵다고 본다.
셧다운제는 계속 유지되다가 마이크로소프트가 19세 미만의 <마인크래프트 자바에디션> 이용을 불가능하게 하면서 (정확히는 MS가 19세 미만 가입자는 받지 않으면서) 다시 문제가 됐습니다.
국내 대형 게임사들은 법을 어기면서 서비스를 할 수 없었으니 인증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청소년 이용불가 게임을 서비스하거나, 모바일게임으로 옮겨갔지만, 해외 게임사들은 중국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한국에만 조치를 취해주기 까다로웠습니다.
<마인크래프트> 사태가 터지기 10여 년 전에 MS는 모든 계정은 성인이 생성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미성년자를 사실상 차단했습니다.
셧다운 적용 연령을 만 19세 미만으로 확대하고, 게임 제한시간을 3시간 늘린다는 내용이 담긴 4대 중독법에는 근조 리본까지 달던 게임 업계지만, 오늘날 게임산업협회는 셧다운제에 대한 특별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올해 초 "우리도 확률을 알 수 없다"면서 게임법 개정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냈다가 비판받은 이래로 게임산업협회는 좀처럼 자신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문제의 의견서 이후 협회가 낸 보도자료는 '강신철 협회장이 연임됐다, 자율규제 강령 개정한다, 지스타 오프라인 개최 진행한다'뿐입니다. 많은 유저들이 수년간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셧다운제에 대해 책임있는 목소리를 낼 만한 시점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건전한 게임 문화 확립을 위한다"는 게임산업협회가 보신주의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한국의 대형 게임사들은 이미 강제적 셧다운제에 대한 모든 시스템을 갖추었으니, 제도의 유지가 오히려 좋을 수 있습니다. 현행 제도가 해외 게임사가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장벽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내심 갈라파고스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2011년 당시, 실제로 몇몇 해외업체들은 한국 진출을 생각했다가 셧다운제 도입으로 진출 자체를 백지화하거나 재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청소년 보호 정책과 여성가족부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