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타기 전 : 싱가포르에서 웬 게임쇼?
취재팀에서 아무도 안 가겠다고 해서, 등 떠밀려서 온 싱가포르. 비행기에 오르기 전,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게임쇼(게임컨벤션 아시아, 이하 GCA)가 무슨 ‘영양가’가 있을 지 궁금했습니다. 실은 궁금증보다 시큰둥함이 더 컸죠. 제 딴엔 상식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그럴듯한 게임쇼(E3, 도쿄게임쇼, 게임컨벤션, 지스타, 차이나조이 등)들을 보면, ‘게임 업체’나 ‘유저’의 규모 중 하나는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이었습니다. 총인구 480만 명 수준에, 개발사도 별로 없는 싱가포르는 국제적인 게임쇼를 하기에는 안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죠. 아시아에는 이미 큰 게임쇼가 3개나 상황이고요.
그런 탓인지 올해 전시장에 참여하는 업체의 수(30개)도 다른 게임쇼에 비해 많이 부족했고요. 한마디로 시큰둥했죠. /디스이즈게임 시몬(임상훈 기자)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내려서 : 싱가포르에서 만난 사람들
이런 시큰둥함은 싱가포르 사람들을 만나면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핏속에 ‘허브(Hub)’ 또는 ‘네트워크’라는 DNA가 박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게임쇼는 결국 업체와 유저, 업체와 업체가 만나는 ‘허브’니까요. 싱가포르 게임쇼에 대한 제 선입견에 경쾌한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 친절한 싱가포르 공무원 Luke Lee
개막 전날, 기자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GDA 2008 공식 미디어 파트너 기자들에게 GCA 조직위원회와 싱가포르 정부, 게임 관련 협회 관계자, 애널리스트 등 4명이 패널로 나와 GCA와 싱가포르 게임시장 등에 대해 설명했죠. 앞에서는 계속 ‘허브’, ‘네트워크’, ‘커넥션’, '가치 사슬' 이야기가 나왔지만 큰 감흥은 없었습니다. 정부 관계자가 꽤 열정적이네, 하는 인상 정도.
패널 이야기가 끝나고 인터뷰 기회가 왔습니다. 망설였죠. 막상 싱가포르 정부나 협회 등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죠. 게다가 영어로…. ^^;; 게임쇼 홍보대행사 직원이 와서 인터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도 “질문할 만큼 아는 게 없다”고 답변했죠.
그때 뒤에 있던 한 싱가포르인이 다가왔습니다. iDA(Infocomm Development Authority of Singapore)에 대한 배경설명을 해줘도 되겠냐고 친절하게 묻더군요. 그 자신이 iDA 소속 공무원인 Luke Lee(Senior Manager)는 저에게 싱가포르 정부가 게임산업을 위해 하고 있는 일들과 그와 관련된 iDA의 역할 등에 관해 설명해줬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게임 전문가가 아니니 앞에 있는 분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 짧은 시간이 저에게는 ‘감동’이었습니다.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며 정부 관계자들을 만났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열정과 친절, 겸손과 배려까지. (물론 이런 열정 뒤에는 대기업 수준의 급여 등 싱가포르의 공무원 지원시스템이 있죠.)
싱가포르 정부는 2015년까지 3가지 사업을 전략적으로 추진해서 싱가포르를 다양한 플랫폼의 게임을 개발/유통하는 중심(Hub)으로 자리잡도록 만들 계획이라고 합니다.
▲강력한 사회/IT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국제적 퍼블리싱 중심지 구축 ▲다양한 제휴를 통한 개발, 사업, 유통 전 과정의 원스톱 지원 역량 강화 ▲확증된 브랜드의 파트너와 협력을 통한 게임시장 리더들의 정착. 싱가포르 게임쇼는 이런 목표를 위한 한 과정이고요. 과연?
▶ IAH Games 이응석 부사장
싱가포르 온라인게임 시장에는 두 개의 메이저 업체가 있습니다. 아시아소프트와 IAH Games죠. 그 중 IAH Games의 이응석 부사장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물어봤죠. “정부 관계자들은 싱가포르를 아시아 게임시장의 허브로 만들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좀 부정적인데 말이죠.”
이 부사장은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말하더군요.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중국의 더나인이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퍼블리싱할 수 있었던 것은 IAH Games 대표가 다리를 놓은 덕분이에요.” EA와 루카스필름이 싱가포르에 아시아 본부를 두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죠.
서양 업체가 동양에 사업적으로 접근하려면 크게 두 가지 곤란함이 있습니다. 먼저 언어가 잘 안 통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업관행이 다르다는 것이죠. 당연히 막연하고 '리스크'가 크죠. 이 곤란함이 싱가포르의 경쟁력의 근거가 됩니다.
흥미롭게도, 위에 언급된 싱가포르 정부기관 iDA가 IAH의 주요 주주더군요.
싱가포르는 영어가 공용어입니다. 대부분 중국어까지 할 줄 알죠. 블리자드와 더나인이 연결될 수 있는 배경을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동남아 비즈니스에서 화교의 영향력과 네트워크는 유명하죠.) 거기에 싱가포르는 사업편의성(08년)이 세계 1위입니다. 지적재산권 보호(06~07년), 부패 없음(07년), 전반적인 경쟁력(07~08년)에서 아시아태평양 1위고요.
서양 업체가 잘 모르는 아시아 각국에 일일이 들어가려면 힘이 듭니다. 그럴 때 말 통하고, 투명하고, 효율적이서 원스톱에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가 될 곳을 택하는 게 전략적인 선택이 될 수 있죠. 싱가포르가 한중일 등 극동지역은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아시아태평양의 허브가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겁니다. IAH가 최근 싱가포르 외에도 동남아시아 지역에 <GTA IV> 등의 타이틀을 퍼블리싱한 것도 이 같은 이유일 겁니다.
▶Cherry Credits의 Addison 대표
게임쇼 첫날 국산 FPS <블랙샷>가 싱가포르에서 서비스 될 것이라는 보도자료를 기자실에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보도자료를 낸 업체는 국내 업체나 현지 퍼블리셔가 아니었습니다. 싱가포르 게임머니 카드업체인 체리크레디트였죠. 게다가 <블랙샷> 싱가포르 버전의 최초공개도 GCA의 체리크레디트 부스에서 이뤄졌습니다. 한국 혹은 제가 아는 다른 나라에서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저는 처음에는 체리크레디트가 게임머니 사업을 넘어 퍼블리싱 영역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알았죠.
<블랙샷> 싱가포르 버전 공개 당일 기자 대회 시상식 모습. 맨 오른쪽이 Addison입니다.
체리크레디트의 Addison 대표는 그게 아니라고 말해줬습니다. 퍼블리셔는 곧 결정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여기서도 하나는 확실했습니다. 원스톱 서비스. 체리크레디트는 단순한 게임카드 판매업체가 아니라 게임 공개부터, 그러니까 PR부터 마지막 순간의 과금까지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죠.
싱가포르 정부가 이야기한 가치 사슬(Value Chain)의 실체를 본 느낌이었습니다. GCA 2008 전시장에서 가장 많은 온라인게임을 선보인 부스는 어떤 퍼블리셔도 아니고, 바로 체리크레디트였습니다. 체리크레디트는 자사가 게임머니 카드를 판매하는 모든 온라인게임을 전시장에서 플레이할 수 있게 전시했죠.
정부와 업체의 열의와 자신감에 불구하고 GCA 2008의 성공에 대해서는 낙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분명히 싱가포르는 서양의 비즈니스맨들이 동양에 교두보를 마련해서 한번에 일을 처리하기에는 좋은 곳입니다. 길은 양쪽으로 통하니, 역으로 동양의 비즈니스맨들이 서양에 접근하려고 할 때 싱가포르를 통하는 게 편안할 수도 있겠죠. 탄탄한 인프라(평판까지)와 똑똑한 정부가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으니 '커넥션'의 가능성이 더 높겠죠.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맨’들의 이야기입니다. 즉 B2B는 허브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지만, 독일의 오리지널 GC 처럼 유저들이 빼곡한 게임쇼를 싱가포르에서 기대하는 것은, 글쎄요.
게다가 B2B 또한 산업의 성장과 그에 따른 정보의 공개를 통해 서양 업체와 동양 업체의 직거래의 일상화 가능성, 또는 지스타와 같은 온라인게임 B2B가 활성화된 다른 게임쇼로의 미팅 집중화 가능성도 GCA 입장에서는 우려되는 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싱가포르의 인프라와 정부의 효율성, 적극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게임쇼가 진행되는 동안 싱가포르 상업 중심지구인 ‘마리나 베이(Marina Bay)’에 세워지던 레이싱 리그 ‘포뮬러 1’ 서킷(트랙)의 건설현장을 봤기 때문이죠.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의 하나인 포뮬러 1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스트리트 대회가 지난 달 마지막 주말 싱가포르에서 열렸습니다. 59년 포뮬러 1 역사상 첫번째 야간 경기였죠.
시내 중심에 5km의 서킷을 만들어 사흘간 세계 최대 레이싱 대회를 여는 싱가포르. ㄷㄷㄷ
두 달 전 서킷이 보이는 주변 호텔의 예약은 이미 꽉 찼고, 10만 장의 관람권 중 4만 장이 해외에서 판매됐죠. 당장 항공, 호텔, 레스토랑 수익으로만 800억 원 이상이 났다고 합니다. CNN에서 매일 나오는 ‘Dynamic Korea’니 'Invest Korea'니 하는 CF만 보다가, 도시 상업지구를 포뮬라 1 서킷으로 바꾸고, F1 마니아인 부자들을 끌어들여서, 관광수입을 올리는 싱가포르의 전략, 실행력을 보니 약이 올랐습니다. GCA를 만만하게 볼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