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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자수첩] 게임사의 이용자, 게임위의 이용자

보이지 않는 평행선을 달린 게임위 이용자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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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승언(톤톤) 2023-01-23 11:38:32
처음부터 조금 이상한 행사였다.

1월 17일 게임위가 ‘이용자 간담회’를 열고 일반 게이머들을 초청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게이머들은 게임위의 시스템을 직접 ‘이용’하지 않는다. 물론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나 개발사 대표가 아니라면 게임물 등급 분류를 신청할 일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런데 왜 이용자 간담회일까?

업계를 불문하고 간담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대화’를 나누는 자리다. 소통이 목적이니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다른 하나는 고객 불만에 대응하는 일종의 협상 자리다. 고객의 고성이 터져 나오는 경우는 흔하고, 만일에 대비해 채증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2021년 벌어진 게임사들의 게이머를 대상으로 한 일련의 간담회는 따지자면 후자 쪽에 가까웠다. 장기간에 걸친 소비자 기만이 의심되는 상황, 기업의 책임을 따져 묻는 자리였다. 질문은 엄중했고, 게임사는 연거푸 해명해야 했다.

대화보다는 협상의 형태로 진행된 이들 간담회 대부분은 기업이 유저들의 요구에 상응하는 여러 공약을 내거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정보 공개의 약속, 시스템 개선의 약속, 소통 강화의 약속이 분명한 타임라인으로 제시되었을 때야 비로소 간담회는 끝을 맺었다. 반대로 구체적 공약이 안 이뤄진 간담회는 실패로 평가받았다.



# 게임위 간담회에서 나온 '타 게임사' 발언의 배경

게임위 이용자 간담회 막바지에 나온 몇몇 참석자의 발언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런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번 간담회의 직접적 계기는 지난해 11월 있었던 모바일 수집형 게임 <블루 아카이브> 등급 재분류 사태다. 민원에 따른 직권 재심사 결과 게임의 일부 콘텐츠 선정성을 이유로 기존 15세에서 청소년 이용 불가로 등급 상향이 이뤄졌다. 이후 유저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게이머 집단의 분노로 촉발된 대면 행사라는 점에서 이번 간담회는 분명 지난 게임사 간담회들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단적인 예로 이날 한 참석자는 ‘간담회가 5시간이나 지속했음에도 공약의 직접적 이행 약속과 상세 스케줄이 제시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다른 간담회를 참고하지 않았냐”고 묻기도 했다. 

여기서 ‘다른 간담회’란, 물론 2021년 게임사들이 진행한 게임 이용자 간담회들을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아예 "타 게임사 간담회에서는…"이라며 게임위를 게임사로 잘못 이야기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이에 게임위도 당시 게임사들과 비슷하게 앞으로의 개선 계획을 나열하면서 간담회를 마무리 지었다. 분과위원회 개편, 업계 전문인력 기용, 회의록 작성 규정 개정, 등급분류 시각화 자료 온라인 게재 등에 관한 스케줄이 상세히 제시됐다. 이중 상당수는 현재 진행 중이다. 대부분은 1분기 내로 시행을 끝마칠 예정이다.

<블루 아카이브> 등급 재분류 근거가 된 인게임 콘텐츠 설명


# 협상 아닌 소통 위해 준비된 자리

그런데 이날 간담회는 사실 2021년의 게임사 이용자 간담회와는 달리 게임 이용자의 요구사항이 직접 관철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상술했듯 여러 개선 공약이 이뤄지기는 했으나, 이것은 유저들의 제안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게임위가 사전에 스스로 이미 판단, 준비해온 것들이다.

또한, 이날 자리에는 <블루 아카이브> 이용자뿐만 아니라 타 게임 이용자와 개발자, 아케이드 게임 사업자 등 여러 유형의 이용자가 자리해 불만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중 누구에 대해서도 ‘요구 수용’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저 의견/제안 제시와 노력하겠다는 약속이 상호 간 오갔을 뿐이다.

이렇듯 게임위는 처음부터 간담회를 협상이 아닌 소통의 자리로 마련했다. 이는 게임위가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협상’을 벌일 기본적 요건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협상은 양측이 상대와 교환할 자원 혹은 이권 등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을 때 성립한다. 그런데 게임위는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자기 소유’의 카드가 거의 없다. 정해진 규범에 따라 움직이는 집행기관이기 때문이다. 정책과 운영 전반을 스스로 결정/수정할 수 있는 일반 기업체와는 운신의 폭이 다르다는 의미다.

기자간담회에서의 김관철 위원장. 이용자 간담회에는 참석하지 못 했다.

거시적인 차원의 변화는 설령 게임위가 스스로 원하더라도 함부로 약속할 수 없는 입장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개인적으로는 P2E를 차라리 허용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게임위 김관철 위원장의 발언은 게임위의 이러한 속성을 단적으로 대변한다.

따라서 게임위가 마치 게임사처럼 이용자 간담회를 통해 유저의 요구를 직접 수용하는 건 원천적으로 어불성설이다. 이같은 근본적 한계 속에서 게임위가 내놓은 ‘차선책’은 규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게이머들의 불만을 불식할 만한 수단을 최대로 그러모아 제안하는 것이었다.

우선 가장 문제시됐던 회의록의 생산 및 공개 확대를 약속했다. 그리고 이번 간담회를 계기로 향후 각 지방을 찾아 간담회를 몇 차례 더 개최할 계획이다. 이용자가 직접 등급분류 과정을 체험해볼 수 있는 체험 행사도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등급분류 규정의 전반적 재정비 역시 3분기쯤 완료될 예정이다.

‘게이머 목소리 반영’을 위한 솔루션도 제시했다. 최초 등급 분류를 실시하는 위원 9인은 법에서 정해둔 9개 단체에서 추천한 인물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위원회의 재량 발휘가 불가능하다. 반면 등급 재분류를 맡는 분과위원회는 게임위가 구성한 전문가 풀에서 랜덤하게 인원을 선발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 풀에 게이머들의 추천 인재를 최대한 포함한다면 게이머의 목소리 반영도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날 게임위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이용자 분들이 그 시발점이 되어주셨으면 한다. 추천을 부탁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 '주관성'에 관한 해석

그렇다면 이날 간담회에 참석해 <블루 아카이브>의 등급 재분류 필요성을 제기한 유저들은 전혀 엉뚱한 번지수를 찾은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게임위가 정해진 규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등급 분류 심사에 있어서까지 그저 규칙에 의해서만 결론을 도출해내는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체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심사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얼마간 능동적이고, 주관적이다. 규정에 철저히 입각한 심사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심사자의 주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주관의 개입이 필요 없는 문제라면 애초에 심사 제도가 마련되지도 않는다.

게임위의 경우도 여기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게임위는 “등급 분류 기준에 따라, 위원들이 각자 가진 사회적 상식에 의거해 투표함으로써 등급이 결정된다”고 전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일부 게이머들과 게임위가 평행선 위를 달린 것은 등급 분류 심사의 이러한 ‘주관성’에 대한 각자의 뚜렷한 견해차에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블루 아카이브> 등급 재분류 철회를 주장하는 유저들은 등급 분류가 궁극적으로는 주관의 영역인 만큼 이의 제기를 통해 충분히 수정될 수 있는 사안으로 바라봤다.

반대로 게임위는 등급 분류에 관여한 ‘주관’은 불변하는 것으로 봤다. 이들은 게임물 자체의 변경이 없는 한, 결정 번복 가능성은 없다는 전통적 입장을 고수했다. 시종일관 게이머들에게 ‘송구함’을 표현한 게임위였지만 해당 질문만큼은 ‘판단 근거에 의한 결정이기 때문에 번복 가능성은 작다.’며 분명하게 답변했다.



이는 한편으로 상당히 고압적으로 느껴지는 설명이다. 하지만 현행 제도에 따르면 이의제기가 공식 접수되더라도 동일한 게임 내용에 대해 동일한 심사위원들이 다시 등급을 논의하게 된다. 결론 역시 동일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게 사실. 현실적이고 사무적인 설명이기도 한 셈이다.

물론 개발사가 이의 신청을 통해 해당 게임물의 선정성에 관한 반박 견해를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주관적 의견’에 불과하다는 점이 걸림돌이 된다.

앞서 말했듯 등급 분류는 이미 9명 위원이 내놓은 ‘의견의 종합’이다. 개발사가 설령 10번째 의견을 피력하더라도, 이것이 10번째 투표로 치환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결론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그러니 이론상 현재로서 개발사 이의 제기가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이의 신청의 구체적 논거를 통해 반대하던 위원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뿐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알려진 바 이런 시도에 성공했던 게임사는 없다.



# 게이머는 게임위의 '이용자'가 맞다. 다만…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일반 게이머는 게임위의 등급 분류 제도를 직접적으로 이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두루 사용한다. 또한 등급 분류의 결정 사유 등 정보는 시민 전반이 활용할 수 있는 유익한 공공 정보에 해당한다. 결국 넓은 의미에서 봤을 때, 게이머는 게임위의 ‘이용자’가 맞다.

다만 게임사가 말하는 ‘이용자’와 게임위가 말하는 ‘이용자’ 사이에는 무시 못 할 커다란 간극이 있다. 게임사에 이용자는 존재의 근거지만 게임위와 같은 공공기관에게 이용자는 봉사의 대상이다. 이번 ‘이용자 간담회’가 협상으로 진행될 수 없었던 데에는 그런 본질적 이유도 있다.

다만 게이머는 이용자이기 이전에 시민이고, 따라서 게임위를 비롯한 여러 공공기관의 운영 방식을 두고 사회적 논의를 촉발할 수 있는 각종 권리를 기본적으로 보장받는다. 그리고 게임위가 이번에 제시한 투명성 제고, 소통 강화의 약속들은 이런 시도에 실제로 나서고 싶은 게이머/시민/이용자들에게 유용한 수단이 되어줄 수 있다.

간담회를 통해 이용자 소통에서 다소나마 보폭을 넓힌 게임위. 하지만 게이머들의 마음속에는 의문 부호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 게임위는 약속 이행을 통해 의도대로 등급 분류 업무에 대한 대중의 이해와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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