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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례적 게임 '발더스 게이트 3'이 낳은, '표준 품질' 논란 ②

'너무 잘 만들어서' 문제가 된 '발더스 게이트 3'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방승언(톤톤) 2023-08-25 23: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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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인디 개발자 ‘알레비에 넬슨 주니어’의 지난 7월 8일 트윗이다.

트윗에서 넬슨 주니어는 '오직 (<발더스 게이트 3>의 개발사인) 라리안이 갖추고 있는 특수한 환경 덕분에 <발더스 게이트 3>와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른 개발사의 모든 작품에 이와 같은 퀄리티를 똑같이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그가 말한 라리안의 특수한 환경은 다음과 같다. ▲전작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 흥행을 통해 확보한 막대한 자금 ▲400명 이상의 직원 ▲D&D라는 강력한 IP의 확보 ▲7년의 제작 기간 ▲3년의 성공적인 얼리엑세스 등 여러 요건이다. 이런 요소들이 중첩된 기적적 결과물이 바로 <발더스 게이트3>다.

이렇듯 <발더스 게이트 3>의 완성도는 이질적 사례인 만큼, 이 게임을 잣대 삼아 앞으로 나올 ‘모든 인디 RPG’의 품질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넬슨 주니어의 주장이다. 유저들이 ‘대형 게임’인 <발더스 게이트 3>를 근거로 들어 인디 게임을 비판할지도 모른다는 넬슨 주니어의 이러한 우려는 사실 다소 과도한 측면이 없지 않다.

모든 논란의 발단이 된 최초의 트윗

오늘날 많은 게임 소비자가 ‘AAA급’ 대형 타이틀과 인디 게임을 서로 구분할 정도의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두 제품군은 기본 가격대부터 달리 형성되기에, 직관적 구분이 절대 어렵지 않은 편이다.

다만 라리안 스튜디오는 조금은 특수한 사례다. 바로 직전 작품인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까지만 해도 중소 개발사로 통했으나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덩치를 크게 불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더스 게이트 3>는 비주얼 측면에서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을 크게 닮아 있어, 여타 AAA급 게임에 비해 다소 인디 게임과 같은 인상을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넬슨 주니어는 소비자들이 라리안의 급격한 ‘체급 변화’를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막연한 우려에 글을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한 인디 개발자의 ‘노파심’ 표현 정도에 그칠 수도 있었을 이 트윗은 곧 개발자와 개발자, 그리고 개발자와 유저들 간 대대적 논쟁의 단초가 되고 만다.

<발더스 게이트 3>는 개발사 전작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와 외관상 닮은 점이 많다.


# “<발더스 게이트 3>는 표준이 되어선 안 된다.”

구체적으로 논란의 불씨가 된 것은 <발더스 게이트 3>를 ‘새로운 표준’(raised standard) 삼아 다른 인디 RPG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넬슨 주니어의 핵심 발언이다.

넬슨의 이 주장은 분명 ‘인디 RPG’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타 장르의 여러 인디 개발자가 공개적으로 공감을 표명하면서 ‘새로운 표준’을 둘러싼 논의는 RPG 장르 밖으로 뻗어나갔다.

인디 개발자들은 개발사 규모와 역량을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기대, 그리고 이에 미처 응하지 못했을 경우 쏟아지는 과도한 발언 등에 대한 부당함을 주로 주장했다. 이에 맞서 유저들은 ‘더 나은 게임’을 바라는 것은 소비자로서 응당 품을 수 있는 요구라는 취지로 반박했다.

문제의 진정한 본격화는 그러나 그 다음부터. 넬슨의 트윗에 Xbox, 인섬니악, 에픽게임즈, 블리자드 등 유수의 대기업 소속 개발자들까지 공감하고 나서면서, <발더스 게이트 3>이 촉발한 ‘새로운 표준’ 논란이 장르와 게임 규모를 막론한 업계 전반의 쟁점이 된 것이다.

인섬니악 게임즈의 디렉터 라이언 매케이브는 넬슨 주니어의 트윗에 대해 “하나의 게임을 동일 장르의 모든 게임에 대한 기준 삼는 것이 무모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좋은 내용”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EA 출신으로 Xbox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를 맡고 있는 제임스 버그는 “<발더스 게이트 3>는 같은 장르 내 2~3개 타이틀에 해당하는 노력이 투여됐을 만한 작품이다. 규모로 볼 때 락스타게임즈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스튜디오는 흔치 않다”고 이야기했다.

Xbox 소속 '제임스 버그'의 트윗. 현재는 논란 때문인지 계정이 비공개 상태다.


# “너희(대기업)가 할 말이야?”

이 같은 ‘대기업 출신’ 개발자들의 발언을 유심히 살펴보면, 대부분은 특정 기업의 입장을 직접 대변하기보다는 업계 전반에 적용되는 ‘일반론’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논의를 ‘소형 개발사’들로 분명하게 국한하고 있는 것 역시 아니다. 따라서 얼마간 각자의 소속 기업을 대변하는 발언으로 여겨질 여지 또한 충분하다.

문제는, 이들 대기업의 경우 넬슨 주니어가 강조한 자금·인력·기술력·IP 등의 여러 ‘환경’ 측면에서 라리안과 동등하거나 오히려 뛰어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라리안과 비교해 월등한 인력, 자원, 업력을 지닌 기업의 개발자들이 ‘개발 환경의 격차’와 ‘어쩔 수 없는 품질 차이’ 등을 논하기 시작하자 많은 게이머와 일부 개발자가 반감과 분노를 표명하고 나섰다. 특히 수년 전부터 대기업 상당수가 하락하는 게임 품질, 탐욕적 비즈니스 행태 등으로 비판받고 있기 때문에 분노 여론은 빠르게 확산했다.

가까운 예시로, 최근 닌텐도 스위치와 PS4 용으로 발매한 <레드 데드 리뎀션 1> 리마스터판은, 원작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퀄리티와 콘텐츠에도 불구하고 풀 프라이스에 가까운 5만 원대의 가격에 판매되면서 빈축을 샀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1> PC 버전은 초기에 많은 버그로 조롱거리가 됐다.

비슷한 가격으로 출시한 너티독의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1> PC 버전도 여러 버그와 최적화 문제로 조롱과 비판을 받았다. 블리자드의 <디아블로 4>는 가격 대비 적은 콘텐츠를 ‘잡아 늘이기’ 위해 캐릭터 성능을 저하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Xbox 산하의 아케인이 만든 <레드폴>은 6년의 개발기간 끝에 출시했지만 ‘올해 최악의 게임’ 후보로 거론된 바 있다.

유사 사례가 꾸준히 누적된 결과 현재 대형 게임사의 ‘게으름’과 ‘탐욕’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전에 없이 드높은 상태다. 따라서 ‘<발더스 게이트 3>의 이질성’을 강조하는 대기업 개발자들의 발언이 반감을 산 것은 꽤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 이들이 자신들의 ‘적당주의’를 보전하기 위해, <발더스 게이트 3>를 이례적 게임으로 규정지으려 한다는 것이 이들 유저의 시각이다.

여기에는 유저뿐만 아니라 일부 언론도 가세했다. 8월 11일 IGN의 데스틴 르가리는 “<발더스 게이트 3>이 일부 개발자들을 패닉에 빠뜨리고 있다”는 제목의 영상을 통해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르가리는 넬슨 주니어의 발언에 공감한 개발자 트윗들을 영상에 그대로 소개하며 의구심을 표명했다. 이어, 기업들이 <발더스 게이트 3>의 성공에서 교훈을 얻기보다는 이를 특수사례로 규정지어 배척하는 데 급급하다고 비판한다.

르가리는 “(발더스 게이트 3과 같은 게임을 만들지 않을) 핑계가 대체 뭔가? 게임은 잘 팔리고 있고, 개발자와 유저 모두에게 호평받고 있는데, 개발자들은 고작 ‘우린 그거 못 해’라는 반응이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논란에 불을 지핀 IGN의 영상


# 버는 사람 따로, 쓰는 사람 따로?

이처럼 <발더스 게이트 3>이 제시한 ‘새로운 표준’을 두고 게임 씬은 현재 ‘현실적으로 충족하기 어렵다’는 의견과, 이에 대해 ‘핑계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의견으로 양분되어 있다. 실제로 막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대형 개발사에 한정해 본다면, ‘핑계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런 비판이 근본 전제부터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정작 그 ‘막대한 자원’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개발사가 지극히 드물다는 이유에서다.

대형 게임사들은 한해 많게는 수백, 수천억 원의 돈을 번다. 돈을 마음대로 굴리지 못한다니, 무슨 얘기일까? 8월 15일 게임산업 전문지 ‘게임디벨로퍼’에 기고된 사설, “윽박지르는 것은 저널리즘이 아니다”는 개발사들의 이러한 속사정을 근거로 들어 르가리의 논조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자신 또한 기자 출신이라고 밝힌 기고가 브랜든 셔필드는 “(르가리는) 이런 영상을 통해 기존 게임들이 왜 그러한 상태로 나오고 마는지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상은 몇 명의 개발자들을 향한 분노를 유발하는 데 쓰였고 실제로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운을 뗐다.

그렇다면 셔필드가 생각하는 ‘게임들이 그런 상태로 출시되는 이유’는 뭘까. 셔필드는  “게임들이 불완전하게 출시되는 것은 개발사의 자금이 다 떨어졌거나, 투자자 혹은 모회사가 게임의 출시 날짜를 특정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 개발사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라고 적었다.

이어 “개발사는 최소한의 시간에 최고의 게임을 제작하려고 노력하던 중 자금이 다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개발사가 예산을 스스로 제어하는 경우는 드물다. 개발사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멋진 것을 내놓기 위해 노력한다”고 주장했다.

게임디벨로퍼는 직설적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 어쩌면 ‘부러움’의 표현

이처럼 일각에서는 현재 벌어지는 업계의 열띤 격론이 처음부터 ‘번지수’를 잘못 짚어 벌어진 하나의 거대한 해프닝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유로게이머 기자 출신의 게임 작가 알라나 피어스는 최근 개인 방송에서 이런 관점을 다음과 같은 매우 간단한 문장으로 피력했다.

“간단히 말해, 게임이 잘 나오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퍼블리셔다. 그런데 유저, 개발사, 언론은 (퍼블리셔는 두고) 서로 치고받기에 바쁘다.”

피어스는 게이머들의 분노가 자주 잘못된 곳을 향한다고 설명한다. 상기 언급된 <레드 데드 리뎀션 1> 리마스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락스타는 리마스터 과정이나 가격 정책에 관여한 바가 전혀 없다. 모든 것은 모회사인 테이크투에 의해 결정됐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돈독이 올랐다’는 집중포화에 벌집이 되는 것은 테이크투가 아닌 락스타다.

<발더스 게이트 3>을 탄생시킨 여러 ‘특수 조건’ 중 가장 특수한 것을 꼽는다면, 이처럼 개발 과정 및 기타 의사결정에 개입할 모회사, 혹은 주주들을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라리안 스튜디오는 CEO 스벤 빈케의 ‘개인 소유’ 기업이다.

말 그대로 '덕후'인 라리안 CEO 스벤 빈케의 도전은 제대로 '먹혔지만', 그 도박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업계에 개인 소유 기업이 적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중 4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과 함께 7년의 개발 기간을 돌파할 수 있을 정도의 개발 자금을 보유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라리안 스튜디오는 전작인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의 장기적 흥행과 3년의 성공적 얼리액세스로 이를 충당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들은 비슷한 규모의 타기업 프로젝트에서는 보기 힘든 여러 ‘도박’에 나설 수 있었다. CEO와 직원들의 ‘작가주의적’ 결정이, 외부의 아무 개입 없이 게임에 그대로 반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회사의 명운을 걸고 AAA라는 씬에서는 오래전 명맥이 끊긴 클래식 RPG와 같은 마이너 장르에 도전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도박이다.

예시는 더 있다. 퀄리티 향상을 위해 3년에 달하는 얼리엑세스를 진행하고, 이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을 다시 개발에 재투자한 결정도 마찬가지다. 장르 팬덤 풀이 비교적 작은 만큼, 얼리액세스를 이토록 장기적으로 진행하면, 정작 본편 출시 후에는 게임을 살 팬이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빈케 CEO는 출시 후 매체 인터뷰에서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에 불안을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누구나 라리안 스튜디오 같은 환경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는 개발자들의 발언은, 따라서 어쩌면 자유로운 창작 환경에 대한 복합적 부러움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넬슨 주니어의 트윗에 대한 반응으로, 옵시디언의 게임디렉터인 유명 개발자 조쉬 소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발더스 게이트 3>가 만들어진 조건은 이례적이다. 이것은 <발더스 게이트 3> 자체나 열정적이고 재능 있는 그 개발진에 대한 조금의 반감 표현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마음대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토대와 펀딩을 갖춘다는 것은 귀한 일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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