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롤드컵 우승 기자회견 현장에서 선수로써 남은 목표가 무엇인지 묻자 '페이커' 이상혁은 이렇게 답했다. 개인적으로는 e스포츠를 관통하는 핵심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최대한 공정한 환경 속에서 선수들이 노력해 결과를 얻는 모습을 보여주고, 여기에 즐거워하거나 동기부여와 같은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e스포츠가 지향하는 가치가 아닐까 싶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지난 2022년 사람들이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에 모였던 것처럼, T1이 보여준 신화는 사람들에게 동기부여와 감동을 줬음이 확실하다. 한 때 부침이 있었지만 7년 만에 네 번째로 소환사의 컵을 들어 올리며 많은 것을 증명한 페이커가 그 중심에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대 상 혁'이라는 별명 앞에 한데 모였으며, 한때 나쁜 의미로 사용되던 '숭배'는 페이커에 대한 찬사로 바뀌었다. 순전히 자신의 노력과 결과로 만들어 낸 모습이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무엇보다도 게임 내적, 외적으로 보여준 그들의 노력이 가장 크다. T1은 이번 롤드컵에서 자신들 스스로 메타를 만들었다. '제-오-페-구-케' 라인업이 결성된 이후로 T1은 LCK에서 주도권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거의 유일한 팀이었으며, 바텀 라인 주도권에 집착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왔다. 한 때는 실패를 겪으며 "너무 무리하고 급하다"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결국 이들의 수많은 실패는 2023년 롤드컵에서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기자회견에서 구마유시는 어떤 각오로 결승전에 임했었는지 묻자
"우승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따라오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화잡지 '소년 점프'의 슬로건인 "우정, 노력, 승리"를 이번 롤드컵이 보여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침 11월 23일, T1은 선수 전원과 재계약했다는 소식을 팬들에게 전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LoL> 대회 상금의 규모가 커서가 아니다. 게임이 전략적으로 해 볼 여지가 많아서도 아니다. 게임이 화려해서도 아니다. 지금까지 쌓여 온 사람의 이야기가 결실을 맺었기에 이토록 많은 파급력과 게임 전반을 넘어 사회에까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킨 이번 결승전 티저가 무엇보다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e스포츠의 겨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시기다.
가장 큰 느낌을 받았던 때는 결승전을 앞둔 미디어데이 행사였다. 분명 축제와 같은 행사였지만, 라이엇 e스포츠 총괄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해외 미디어의 주된 질문은 "이전에 수익성 강화를 언급했는데 어떻게 되고 있나?", "e스포츠에 겨울이 찾아왔단 의견이 많다.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였다. 질문을 위한 줄도 상당히 길었고, 모두가 같은 주제를 궁금해했다.
LCS의 파업이나 수익성 악화 등의 사건과 마주하고 있는 해외 e스포츠 매체에게 있어 e스포츠가 앓고 있는 문제는 확실히 현실의 위협으로 여겨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기 정점을 찍었던 e스포츠의 규모는 흔들리고 있고, 급격한 발전으로 인한 성장통을 앓고 있다. 단순히 라이엇과 구단의 자생을 위한 노력 하나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들의 잘못으로만 인해 발생한 일도 아니다. 원인은 다양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
미디어데이 현장에서 해외 매체의 주된 질문은 'e스포츠의 겨울'에 관한 것이었다.
사진은 존 니덤 라이엇 e스포츠 대표 (출처: 라이엇 게임즈)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결승전 당일 고척돔 정문에는 여러 국회의원이 보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총선을 앞둔 덕분인지 갑자기 e스포츠에 부쩍 관심을 내보이는 정치권에도 숙제가 던져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정히 말해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로 e스포츠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은 '갑자기 사라졌다'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도 e스포츠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애초에 '게임' 자체가 중요한 이슈로 여겨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e스포츠 강국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면 그에 맞는 알맞은 관심과 지원책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선수들의 빛나는 성과에 올라타 "우리는 강국이다"라고 공허하게 소리친들 미래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e스포츠에는 장밋빛 미래만 있지 않다. 적은 수익성에 비해 너무나 높은 팀 유지비, <LoL> 종목만이 유일한 주류로 자리잡아 있는 국내 현황 등 e스포츠는 실존적인 문제와 직면해 있다. 당장 선수들이 보여준 국제 대회 성적이 좋다고 자만하다가는 조용하고 빠르게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단도입적으로 한때 "선수들의 처우 개선"에 목소리를 높여 왔던 유저 커뮤니티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구단의 수익과 지속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을 정도다. 팬들마저 직감적으로 느끼는 문제를 단순히 "LCK와 프로 구단이 알아서 잘하겠지"로는 해결할 수는 없다. 보다 현실적인 의미가 있고, 실행 가능한 수준의 개선책에 대한 논의와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단순히 지난 선거에서 보인 모습처럼 "우리 동네를 e스포츠 거점으로 만들겠습니다", "돈 많이 써서 어마어마한 e스포츠 경기장을 짓겠습니다", "지역 연고제를 도입하겠습니다"와 같은 속 빈 공약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