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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리뷰

진실보다 프레임을 보여주는 방송의 영향, 이 게임이 전하는 메시지

'낫 포 브로드캐스트' 리뷰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방승언(톤톤) 2024-04-29 17:49:57
디스토피안 픽션에서 정부는 많은 경우 파시스트(혹은 그러한 실세 집단의 꼭두각시)로 그려진다. 다시 파시즘은 흔히 국가주의·권위주의·민족주의·전체주의의 속성을 띠는 것으로 설명된다. 각각은 차이가 적지 않지만, 개인을 전체에 종속하는 미소한 것으로 보는 점에서 상통한다. 즉, 개인이 전체의 도구인 세계가 일반적인 디스토피아다.

미디어적 클리셰와는 달리 디스토피아가 반드시 극우적 사상의 귀결인 것만은 아니다. 20세기 중반 나치즘이 벌인 인상적 사건과 그 여파 탓에 극우가 장르 내에서 인기 레퍼런스(?)로 자리 잡았을 뿐 인격의 말살은 좌우 양쪽의 극단에서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의 안타까운 믿음(“좌파·우파가 집권하면 무조건 나라 망한다”)과는 달리 디스토피아 사회의 도래는 집권세력의 이념적 지향에 달린 문제가 아니며, 그보다는 그 극단성 수준에 달려있다.

그리고 극단 정부가 득세하지 못하게 막는 감시의 책무와 필요성은 모든 시민이 안고 있는(그리고 안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 책임이 특히 막중한 집단이 있다면 역시 언론이다. 2020년 출시한 영국 인디 FMV(full motion video·실사) 게임 <낫 포 브로드캐스트>(Not For Broadcast·방송 부적합)는 언론이 ‘감시역’으로서 지니는 균형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풍자 코미디다.



# 내 손으로 만드는 뉴스

‘채널 원’ 방송국의 직원 ‘알렉스 윌리엄스’가 되어 정규 뉴스 프로그램 데일리 나이틀리 뉴스(Daily Nightly News) 방송 내용을 실시간으로 편집하는 것이 게임의 골자다.

플레이타임의 대부분은 뉴스 편집실에서 진행된다. 주요 업무는 총 4가지 카메라 피드 중에서 하나를 골라 실제 방송될 화면을 결정하는 것이다. 편집된 화면은 약 2초 간의 텀을 두고 생방송 된다.

업무 기본 원칙은 한 화면을 10초 이상 유지하지 않고 적절히 화면을 교체해 주는 것으로, 되도록 현재 말하고 있는 사람을 비춰주는 편이 좋다. 인게임 조언에서는 ‘실제 티비에서 보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출하면 된다'고 설명하는데 그 말대로다.

그러나 방송 품질을 위해 유저가 신경 써야 하는 요소들은 그 외에도 많다.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전파간섭에 맞춰 신호를 조절해야 하고, 방송 출연자들이 돌발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면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비프음을 넣어 검열해야 한다.

중간 광고를 제때 플레이하고, 스테이지마다 주어지는 임시적 방해요소를 문제 없이 돌파하는 것 또한 모두 유저 몫이다. 제시된 메커니즘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방송 사고’가 발생하면 시청률은 즉시 조금씩 줄어들고, 시청률이 0에 도달하면 주인공이 해고당하면서 게임오버가 된다.



# 작용과 반작용

주인공의 업무가 게임 속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처음엔 비교적 미미하다. 사고 없이 방송을 해낼 경우 약간의 추가 보수가 주어지고, 반대로 실수가 잦을 경우 봉급을 대폭 삭감당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뉴스가 회차를 거듭할 때마다 더 많은 사건사고와 편집 옵션(그리고 그만큼의 새로운 미니게임 매커니즘)이 주어지며, 유저는 점차 뉴스의 논조를 교묘하게(때론 과감하게) 제어할 수 있다. 

가령 처음에는 욕설 검열에만 사용되던 비프음을 특정 에피소드 이후부터는 정부 비판적 발언(혹은 노랫말)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욕설과 달리 ‘사상 검열’은 설령 거부하더라도 즉시 시청률에 영향을 주진 않으나, 주인공을 향한 정부의 호감도에는 영향을 주며, 이것은 다시 엔딩에 반영된다.

이렇듯 주인공의 행동은 점차 정부와 개인, 그리고 추후 등장할 반동세력 등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며 그 결과 게임 속 사회는 각기 다른 결말을 맞는다. 게임 본편의 엔딩은 14가지에 이른다.

한편 뉴스 방송 사이사이에는 주인공 ‘알렉스 윌리엄스’의 개인사가 펼쳐진다. 일종의 비주얼 노벨처럼 진행되는 이 구간에서 유저는 생활에 관련된 크고 작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각각의 선택이 서로 인과로 얽혀있는 것은 물론, 뉴스 편집에서 내렸던 결정들도 결국엔 알렉스의 삶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 연기와 연출로 만드는 현장감

<낫 포 브로드캐스트>의 게임 메카닉은 이렇듯 비교적 단순한 편이지만, 뛰어난 프로덕션 퀄리티와 예측하기 힘든 이야기 전개로 게임 속 풍경에 유저를 단단히 빠져들게 한다. 개발사 '낫 게임즈'에 따르면 제작에 참여한 것은 네 사람으로, 이 중에는 드라마 제작진 출신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덕분인지 영상 중에는 순수히 블랙 코미디로 즐겨도 좋을 만한 품질의 것들이 많다.

연출에 있어 가장 직관적 장점은 잘 계산된 톤과 매너다. 인디 게임의 규모에 걸맞게 영상 속 소품들은 엉성한 편이며, 조연들의 연기 스타일 역시 종종 과장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요소가 1990년대의 시대적 배경과 코믹 풍자 장르에 잘 녹아들어 감상을 거의 방해하지 않는다.

개별 방송 꼭지(현장 보도, 인터뷰, 중간 공연, 패널 토론)의 충실도, ‘비하인드 씬’의 풍성함과 현실감 등은 익살스러운 스토리 전개 와중에도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포인트다. 넌센스급의 ‘급발진’ 전개까지 부드럽게 소화하며 코믹과 정극을 넘나드는 주연 배우들의 호연도 호감을 안긴다.

주조연의 열연과 의도적인 어색한 톤이 만나 웃음을 준다.

스테이지가 종료될 때마다 유저의 작업 결과물을 시청하는 ‘다시 보기’ 기능은 놓쳤던 뉴스 내용을 재확인하는데 도움이 되며 ‘직업 시뮬’로서의 만족도까지 얼마간 챙겨 준다. 세계관을 더 풍부히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비하인드 영상 감상 기능도 따로 제공된다.

다만 각종 미니게임 메카닉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 특히 기본 영상 믹싱작업 외에 더해지는 방해요소 메커니즘이 그렇다. 이는 방송 시점의 특수한 주변 상황과 자연환경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하다. 이를테면 폭풍우가 치는 날의 방송에는 버튼 위에 랜덤하게 과전류가 흘러 주인공이 손을 댈 수 없는 식이다.

그러나 게임의 핵심인 뉴스 영상에 대한 집중을 크게 흐릴 만큼 성가신 데 반해, 몰입감과 재미의 양쪽 측면에서 게임플레이에 잘 어우러지지 못한다. 인게임 월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게임 난이도만을 올리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방해를 위한 방해’로 여겨지는 메카닉인 만큼 ‘불호’를 느끼는 유저가 실제로 많은 듯하다. 개발사는 난이도 조절 옵션에서 이들 메커니즘을 비활성화하거나 축소해 메인 콘텐츠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한다.

조작 방해 메카닉은 별로 유익하지 않다. 다행히 옵션에서 배제할 수 있다.


# 첨예한 균형 위의 이야기

<낫 포 브로드캐스트>의 스토리 도입부에서 선거에 대승해 집권하는 ‘어드밴스’ 당은 장르 내의 흔한 클리셰와 달리, 부의 공격적 재분배를 핵심 아젠다로 내세우는 급진 진보 정당이다.

이후로 어드밴스 정권이 전개하는 여행 제한, 중산·부유층 재산의 강제적 국유화, 프로파간다 배포, 언론 통제 시도 등의 익숙한 가락은 게임의 주제의식을 (아마도 일부러) 호도한다. 정의로운 언론인이 되어 위선 덩어리 좌파 정부를 응징하는 것이 게임의 분명한 테마처럼 보인다. 다소 가볍고 단순해 보이는 초반 분위기 역시 이러한 오해를 가중하는 요소다. 

그러나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유저는 <낫 포 브로드캐스트>가 훨씬 더 첨예한 균형 감각 위에 만들어진 작품이란 사실을 자연히 체감하게 된다. 극좌 정부의 어용 지식인이 ‘책 장사’에 혈안이 된 극우 음모론자의 정돈되지 않은 주장 일부에 어쩔 수 없는 양심적 동의를 표하는 토론 장면 하나만 떼어놓고 보더라도 이 사실을 짐작할 만하다.

이 지점에서 시대 배경이 1990년대라는 점은 숨어있는 흥미로운 레퍼런스일 수 있다. 1994년경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논문을 기반으로 좌·우 이념을 넘어선 대안 노선인 ‘제3의 길’을 제안했다. 제3의 길은 다양한 정부에서 채택되며 열풍을 일으켰으나, 좌·우의 성공적 결합이 아닌 양쪽의 단점 답습에 불과하단 비판도 없지 않다.

한 스팀 유저는 '좌우의 어떤 방향으로 치달을 때마다 다시 중심으로 돌아오며 균형을 맞춘다'고 평가했다.


# '선택 고문'으로 이야기하려는 바

실제로 게임은 좌우 이념은 물론 엔터테인먼트 문화 전반까지 비꼬는 일종의 ‘모두까기’ 스탠스를 유지한다. 동시에 스토리/메커니즘 상 뉴스의 뒤편에 머물러 있던 주인공을 갈등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위치시키면서 한 쪽의 편을 들기 힘든 혼란으로 유저를 내몬다.

첫 한두 편의 방송까지 유저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소식을 다루면서 정규 방송 편집 작업에 익숙해질 시간을 먼저 가진다. 그러나 중반부터 정형화된 틀을 깨는 새로운 사건이 제시되고, 유저의 편집은 점차 이전과 다른 무게감을 갖게 된다.

이후로 게임은 작정한 듯 까다로운 선택을 강요한다. 노인 의무 안락사를 강제하려 드는 막가파 정부와, 그런 정부에 대항하겠다며 비무장 민간인을 해치는 저항군 중 한 쪽을 악마화/성역화할 기회를 ‘실시간으로’ 부여받는 등의 상황 속에서 유저의 선택은 당연하게 갈피를 잃는다

의도적으로 배치한 윤리적 모호함 속에서 결정을 요구하는 전개 탓에 일견 <낫 포 브로드캐스트>는 인터랙티브 미디어의 특성을 잘못 이해한 실패적 풍자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정치의 뚜렷한 타깃을 비판하는 대신 도식화된 좌우극단의 상징 사이에서 유저를 ‘고민 지옥’ 에 빠뜨리는 것만으로 어떤 풍자적 가치가 발생할지 가늠하기란 힘들다.

테러 현장의 중계에서 유저는 정부와 테러 집단 쪽 하나를 철저히 악마화할 수도, 혹은 균형 잡힌 보도를 이어나갈 수도 있다.

게임의 메시지가 비교적 명확해지는 것은 유저의 곤경 상당 부분이 유저 자신의 이분법적 사고 때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다.

극 중 대립 세력인 어드밴스 당과 디스럽트 조직은 정 반대 아젠다를 내세우고 있지만, 유저 입장에서 이중 어느 한 쪽을 뚜렷하게 더 나은 선택지로 느끼기란 어렵다.

이것은 양측이 이념적 지향에서 대립각을 이루면서도,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극단적 태도에선 거울상처럼 닮아 있어서다. 결정적으로 양측은 언론(유저)을 손아귀에 넣어 진실을 유리하게 호도하려는 점에서도 같다. 각자 회유와 협박의 방법론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세력들 가운데서 ‘옳은 쪽’을 찾는 시도가 무익한 것은 당연하다. 유저가 ‘편’을 정하려는 무의식적 시도를 멈추는 순간, 비로소 게임 속 상황을 좌우의 대립이 아닌 공정 보도와 왜곡 보도의 충돌로 바라볼 가능성이 열리면서 유저의 내적 갈등도 상당 부분 해소된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면 똑같이 언론 장악을 시도하는 두 개 세력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지는 무전기를 통해 유저를 회유하려는 '디스럽트' 조직의 모습.


# 절충지로 향하는 험난한 길

여러 등장인물 중 드물게 합리적 인물처럼 그려지는 앵커 ‘제러미 도널드슨’은 점차 극단으로 치닫는 어드밴스 정부의 정책에도 신변잡기만 늘어놓는 보도 방향성에 불만을 품고, 인질을 붙잡아 방송 장악을 시도한다.

언론의 본령을 지키려는 노력은 고귀한 것일지 모르나, 그 방법은 무력 사용이라는 또 다른 극단이다. 게다가 도널드슨은 그 과정에서 (경우에 따라 유저와 함께) 앞서 등장한 반정부 단체 디스럽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는데, 디스럽트는 결국 통제되지 않는 과격 집단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야기 중간에 배치된 도널드슨의 이러한 파국은 게임의 전체 주제의식을 함축하는 아날로지로 바라볼 만하다. 어느 한쪽의 극단을 경계하기 위한 ‘감시’는 내적으로도 철저해야 한다. 균형을 잃고 반대 극단으로 미끄러진다면 원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낫 포 브로드캐스트>의 여러 엔딩 중에서 가장 도달하기 힘든 것은 철저한 중도를 지켰을 때 나오는 ‘절충지(The Middle Ground)’라는 제목의 엔딩이다. 어드밴스와 상대 정당이 함께 연립정부를 세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각 분기에서의 ‘중립’ 선택지가 워낙 모호한 탓에 도달 난이도가 불합리한 수준이라는 불만도 나온다. 게임 디자인적 결함으로 여길 여지가 다분하나 그 메시지에는 어울린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본 게임에서도 ‘절충’은 구현하기 힘들고 해피엔딩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낫 포 브로드캐스트>는 차라리 일종의 정치적 ‘실패 시뮬레이터’에 가깝다. 제작진은 좌우 진영 중 한쪽으로 기울었을 때의 여러 결과를 과장되지만 현실감 있는 방식으로 묘사하면서 성역도, 선역도 없는 현실을 음울한 코미디로 유저에게 제시한다.

<낫 포 브로드캐스트>는 2024년 타이베이 게임쇼 인디 게임 어워드에서 혁신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에서 개발진은 7개 언어 지원과 DLC를 준비 중이라고 처음 밝혔다. 아쉽게도 아직 한국어 지원 계획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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