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 <마비노기> <마비노기 영웅전>을 만들었던 이은석 실장이 신작을 준비 중이다. 얼마 전 공개한 <야생의 땅: 듀랑고>는 모바일 게임으로서는 드물게도 생존형 오픈월드 MMO라는 장르를 내세우고 있다. 게임 방식도 독특하다.
일반적인 MMORPG처럼 정해진 동선은 없다. 대신 <마인크래프트>나 <돈 스타브>(일명 굶지마)처럼 유저가 생존을 위해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샌드박스형 게임을 표방하고 있다. 그가 이러한 게임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창발’이라는 화두에 몰두한 이후였다. 도대체 창발이라는 개념은 무엇이길래 이런 흔치 않은 게임을 떠올리게 됐을까?
그리고 창발은 <야생의 땅: 듀랑고>, 혹은 다른 게임에서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넥슨 왓스튜디오 이은석 실장의 ‘온라인게임의 창발적 게임 디자인-야생의 땅: 듀랑고의 사례와 함께’ 강연을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김승현 기자
넥슨 왓스튜디오 이은석 실장
샌드박스로 시작한 MMORPG는 어떻게 테마파크가 되었을까?
초창기 온라인게임의 역사는 샌드박스 게임의 역사였다. 초기 온라인 게임은 패키지게임처럼 정교한 스토리텔링이나 연출을 보유하지 않았다. 대신 초창기 온라인 게임이 강점으로 내세운 것은 여러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세계, 그리고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콘텐츠였다.
실제로 <울티마 온라인>이나 <바람의 나라> 같은 초창기 온라인 게임은 규칙 자체는 단순할지라도 공간의 공유를 통해 유저간의 다양한 시너지를 이끌었다. 강대한 억압 세력에 맞서 ‘민중봉기’가 일어난 <리니지 2>의 ‘바츠 해방전쟁’이나, 전염병 디버프로 인해 세계가 쑥대밭이 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오염된 피 사건’이 좋은 사례다.
하지만 규칙, 혹은 유저들의 상호작용이 무언가를 이끄는 이러한 방식은 게임사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예상할 수 없는 사건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효율적인 운영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예측불가의 사건이 항상 유저들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한다는 보장도 없다. 때문에 온라인 게임은 점점 규칙 간의 결합을 막고 통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그 대표적인 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유저들에게 안정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변수를 통제하는 방향으로 게임을 발전시켜갔다. 이를 위해 오리지널 시절 대표적인 콘텐츠였던 ‘전쟁’을 필드라는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대신 ‘전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으로 옮겼고, 전리품 분배도 공유 루팅에서 개별 루팅 방식으로 바뀌었다. 온라인 게임임에도 점점 유저 간의 상호작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한 셈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테마파크 게임의 1인자가 되었다. 10년 가까운 서비스 기간 쌓인 콘텐츠는 다른 테마파크 성향 게임이 따라올 수 없는 강점이었고, 앞서 언급한 조치들은 서비스의 안정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러한 테마파크 게임의 장기집권은 언제부턴가 유저들에게 피로를 선사하기 시작했다. 구글 트렌드 검색추세에 따르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2009년을 기점으로 검색량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2012년 즈음에는 PvP 게임인 <리그 오브 레전드>에 검색량이 역전되었다. 더군다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장기 집권은 다른 MMORPG의 침체를 가져왔다. 테마파크 게임, 그리고 MMORPG의 왕좌를 건네줄 후계자도 없는 셈이다.
<엘더스크롤>이 재미있는 이유? 창발적 플레이가 핵심
그렇다면 대규모 자원, 대규모 콘텐츠가 필요한 MMORPG(혹은 MMOG)의 미래는 없는 것일까? 이은석 실장은 이에 대한 답으로 초창기 온라인 게임이 추구했던 ‘창발’적 플레이를 꼽았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말은 창발이라는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다. ‘창발’이란 하위 구성요소의 결합으로, 이전에는 없던 상황이나 특성이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즉 각 구성요소의 특성이 서로 화학적 결합을 이룸으로써, 구성요소 개개에는 없는 복잡하고 독특한 특성이 발현되는 현상이다.
개미집은 ‘창발’이라는 현상을 나타내는 좋은 예다. 개미들의 머릿속에는 개미집의 설계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개미들의 군주(?)라고 오해하는 여왕개미도 일개미들에게 개미집의 건설 방향 등을 지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일개미 안에 있는 본능이 상호작용해 복잡하고 거대한 개미집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창발의 개념은 샌드박스 게임이나 오픈월드 게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은석 실장은 그가 재미있게 즐겼던 <엘더스크롤: 오블리비언>의 사례를 이야기했다. 그는 어느 날 수상한 NPC를 미행해 달라는 퀘스트를 받게 되었다. NPC는 무덤가로 향하고 있었다. NPC를 따라 무덤에 들어가니 갑자기 무덤 문이 닫히고 앞에는 중무장한 병력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행을 눈치챈 NPC의 함정이었고, 사전에 계획된 퀘스트의 흐름이었다.
그의 캐릭터는 전투기술을 올리지 않은 ‘도적형’ 캐릭터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무덤에 들어온 직후 게임을 저장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전투도 해보고, 소매치기로 열쇠를 빼앗으려 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렇게 게임을 포기하려던 찰나, 갑자기 무덤 문이 열렸다.
갑자기 경비병은 다짜고짜 이은석 실장의 캐릭터에게 다가와 도둑질이 발각되었으니 벌금과 감옥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탈출이 절실했던 이은석 실장은 당연히(?) 감옥을 선택해 무덤 탈출에 성공했다. 매복에 걸린 이후는 퀘스트 스크립트로 정해진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이은석 실장의 캐릭터가 도둑이었고 도둑질 사실이 있었다는 것. 범죄 수준이 높아지면 경비병이 체포를 시도한다는 것. 경비병은 잠긴 문을 열 수 있다는 게임의 기본 법칙이 만들어 낸 사건이었다.
이은석 실장은 이러한 사례를 이야기하며 “똑같은 규칙의 집합이지만, 규칙 간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새로운 결과물이 탄생했습니다. 잘 짜인 규칙은 매번 유저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합니다. 창발적 게임의 강점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창발적 게임의 원칙, 간단한 규칙의 합이 새로운 것을 만든다
그렇다면 창발적 게임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대원칙은 하나다. 기초적인 하위 구성요소만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도록 유도하면 된다. 단순한 규칙이 모여 복잡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 셈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순화다. 개발자가 통제하려고 할수록 창발적 게임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창발적 게임을 디자인할 때는 무언가만 허용하는 ‘화이트 리스트’ 방식보다는, 무언가만 배제하는 ‘블랙리스트’ 방식이 더 효과적이다. 특수한 상위 규칙을 만들기 보다는, 두루두루 적용되는 다수의 하위 규칙이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다.
간단한 예로 <마비노기 영웅전>의 전투는 ‘플레이어 캐릭터는 몬스터만 공격할 수 있다’, ‘몬스터는 플레이어 캐릭터만 공격할 수 있다’라는 원칙 대신, ‘캐릭터의 공격 범위에 들어간 캐릭터는 피해를 입는다’는 대원칙을 적용했다. 그 결과 부하 몬스터가 보스 몬스터를 죽이는 것 같은 독특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통제하는 규칙 대신, 게임 전반적으로 쓰일 수 있는 하위 룰의 결합한 덕분이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모두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그동안 무수히 발생한 ‘리얼 버라이어티 쇼’의 사고 사례를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무한도전>은 좀비 특집을 준비하며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했고, <나는 가수다>는 김건모 탈락 당시 제작진이 돌발상황(출연자들의 요구)에 잘못 대응했다.
<더 지니어스: 룰 브레이커>는 ‘독점게임’에서 규칙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해 시청자들의 불만을 샀다. 이러한 사례는 모두 제작자가 사건에 잘 개입하지 못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창발적 플레이를 목표로 하는 게임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창발적 플레이는 개발자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기본 규칙 간의 상호작용을 핵심으로 하는 방식. 개발자는 이를 포기하고 다시 테마파크형으로 돌아가야 할까?
“결국,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기초 규칙 간의 결합을 추구하는 상향식 구성이나, 상위의 특수 규칙으로 게임에 개입하는 하향식 구성 하나만으로는 게임을 온전히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서 절충안을 찾아야 하죠”
실제로 샌드박스 게임의 대명사인 <심즈> 시리즈도 기본적으로는 NPC들의 AI에 의해 게임이 진행되지만, 그 뒤에는 마을 단위의 AI가 있어 캐릭터들의 성비나 실업률 등을 꾸준히 체크하고 관리한다. 서바이벌 게임인 <레프트 4 데드>같은 경우에는 ‘AI 디렉터’라는 장치로 좀비나 보스 몬스터의 생성을 조율해 유저들이 보다 밀도 있는 경험을 하게끔 제어한다.
그가 개발 중인 <야생의 땅: 듀랑고>도 게임의 생태계를 관리하는 AI 산신령(?)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조정자들의 원칙은 간단하다. 어떻게 하면 유저들에게 더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하는가, 혹은 어떻게 하면 게임 내 자원이 효과적으로 배분되는가.
게임의 규칙들이 자유롭게 상호작용을 하다가, 게임이 추구하는 것과 어긋난 결과를 발생시키면 ‘기준’에 따라 환경을 제어하는 방식이다. 게임의 목적과 원칙이 확실할수록, ‘막장 사태’를 통제할 수 있는 비상열쇠가 더 단단해지는 셈이다.
“<야생의 땅: 듀랑고>는 PC 온라인 게이머의 눈높이에 맞춘 게임”
그렇다면 이러한 '창발적 게임'을 꿈꾸는 이은석 실장의 신작은 어떤 모습일까? <야생의 땅: 듀랑고>는 모바일로 즐기는 생존형 샌드박스 MMORPG를 표방한다. 유저는 ‘듀랑고’라는 거대한 원시시대 오픈월드 속에서 생존해야 한다.
듀랑고의 세계는 실제 자연처럼 자체적인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 동물들은 자신의 먹거리를 찾아 이동하고, 이것은 다시 생태계에 그 영향을 주기도 한다. 유저를 도와주는 NPC나 퀘스트는 없다. 유저는 어느 날 야생에 떨어진 문명인처럼 하나하나 생존법을 배워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유저와 함께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나 자원을 거래할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이들과 경쟁도 해야 한다.
게임은 임의로 생성된 오픈월드에서 진행된다. 샌드박스형 게임을 표방하는 만큼, 유저에게 주어지는 자유도도 상당하다. 유저는 대부분의 지역에 집이나 부락을 지을 수 있고, 아이템을 제작할 때도 틀에 철괴와 나뭇가지가 더해져 도끼가 되는 일반적인 방식보다, 날붙이와 막대기, 접착제가 결합해 도끼가 되는 식으로 조합의 폭을 넓혔다.
이은석 실장은 이러한 다양한 제작 시스템을 이용해 다양한 특성, 다양한 종류의 아이템을 제공함으로써, 유저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독과점의 폐해를 막겠다고 설명했다. 그가 <야생의 땅: 듀랑고>를 설명하며 특히 강조한 점은 ‘PC 온라인 게이머의 눈높이에 맞춘 모바일 게임’이라는 점이다.
오픈월드 샌드박스라는 게임 특성, 그리고 창발적 디자인에서 오는 게임의 깊이를 통해 모바일 게임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PC 온라인 게이머를 사로잡겠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