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의상이 패션쇼에 등장했다. 지난 14일 세종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3학년들이 주최한 패션쇼에서 <아키에이지>의 복장을 입은 모델이 당당한 표정으로 런웨이를 누볐다.
의상을 제작한 주인공은 <아키에이지> 유저기자단으로 활동 중인 세종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3학년 김정수 씨. 그는 약 한 달에 걸친 작업 끝에 <아키에이지>에 등장하는 NPC ‘누이여신상 신관’의 옷을 재현해냈다.
반응은 뜨거웠다. 그가 <아키에이지> 공식 홈페이지에 남긴 게시물에는 수 십 건의 댓글이 달렸고 패션쇼와 사진은 보도자료로 활용됐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의상을 완성하고 쇼까지 올렸던 김정수 씨는 정작 공식 홈페이지에 올린 후기에서 몇 번이고 <아키에이지> 디자인팀을 쫓아갈 뻔했다며 이를 갈았다. 그의 분노를 자아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디스이즈게임에서 김정수 씨와 그가 애타게 찾던 엑스엘게임즈 이창익 아티스트를 함께 만났다. <아키에이지> 속 의상이라는 공통된 작품을 두고 게임과 의상, 각기 다른 분야의 두 디자이너가 나눈 설전을 소개한다. /디스이즈게임 송예원 인턴기자
■ ‘멘붕’의 시작, 디테일을 살려라!
<아키에이지>의 의상을 제작한 세종대학교 패션디자인과 김정수 씨(왼쪽)와 엑스엘게임즈의 이창익 아티스트(오른쪽).
먼저, 김정수 씨. 왜 이런 일을 벌이게 됐나?
김정수: <아키에이지> 유저기자단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것을 많이 보여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래서 혼자 꽤나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웃음) 전공이 패션디자인이다 보니 <아키에이지>와 관련된 의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실 처음부터 패션쇼까지 올릴 계획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과는 3학년이 되면 학교 축제에서 패션쇼를 개최한다. 마침 그 패션쇼를 준비하다 보니 이 때다 싶더라.
그냥 만들기만 한 게 아니라 작품이 쇼까지 올라갔다. 주변에서 반대가 없었나?
김정수: 왜 없었겠나. 패션쇼의 주제가 게임의 세계관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서 개인적으로도 ‘이거 진짜 해도 되나’ 많이 고민했다. 학과의 이름을 걸고 많은 사람들이 같이하는 쇼다 보니 싫어하는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래도 다른 분들이 많이 배려해 주셔서 끝까지 올 수 있었다. 작업은 비밀리에 추진했다. 쇼를 주최하는 학생회 측과 몇몇 지인들만 게임 캐릭터 의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래서 작품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
김정수: 솔직히 쇼에 왔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못 들었고, 주변 사람들 의견은 완전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신선하다, 재미있다’는 의견도 많이 들었다.
이창익: <아키에이지> 의상을 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부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여자 직원들은 옷이 만들어지고 나면 입어 보고 싶다고 안달이 났었다. 다만 나중에 옷을 받고 나니 결과물이 모델에 맞춰서 제작됐기 때문에 사이즈가 맞지 않아 좌절해야 했지만.(웃음)
어쨌든 게임 속 콘텐츠를 유저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즐긴다는 것 자체가 개발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홍보팀에서 관련 자료를 요청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다. 원화를 그대로 보내지 않고 3D로 새로 작업해서 의상의 포인트에 각주까지 달아서 보냈다.
나름 열심히 도와준다고 도와준건데 제작과정 후기를 보니까 (옷을 만들기가 너무 어려웠던 탓에) 이 옷을 만든 디자이너 얼굴 좀 보고 싶다고 무려 빨간색으로 강조해서 얘기했더라. 만약에 서체까지 궁서체였으면 내가 당장 쫓아갔을 거다.
김정수: 아! 궁서체까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아쉽다.(웃음)
옷을 만든다는 소식에 각주까지 붙이며 관련 자료를 보낸 이창익 아티스트. 그러나 김정수 씨는 블로그에서 디자이너를 만나고 싶다고 빨간 글씨로 강조하여 말했다.
그러니까 보내준 자료가 도움이 됐나? 안 됐나?
김정수: 하하. 아니다. 큰 도움을 받았던 건 인정한다. 처음 파일을 열었을 때 “헐, 대박!”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사실 “옛다, 받아라” 하고 원화 정도를 던져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관련 자료를 무려 3D로 보냈더라.
원단도 많이 고민했어야 하는데 일일이 어떤 느낌인지 상세하게 적어 보내 줬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구나, 프로 디자인이란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김정수: 좀 다른 의미에서 ‘멘탈 붕괴’였다. 만만하게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했는데, 막상 의상의 디테일을 보고 나니 장난이 아니더라. 특히 자료를 받기 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 차이가 났던 부분이 좀 있었다. 예를 들어 게임에서 나는 붉은색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자료를 보니 남색이었다.
김정수 씨가 처음 기자단 카페에 올렸던 이미지. 포인트 부분 색상이 붉게 표현돼 있다.
■ “옷이 잘못했네!”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나?
말이 나온 김에,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김정수: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게임을 ‘디스’하는 건 아니고.(웃음) <아키에이지>의 NPC 의상은 평범하다.(이렇게 말하며 옆에 앉은 디자이너의 눈치를 살폈다)
<아키에이지> 속 의상은 절개라든지, 색상이 죽어 있다든지 하는 부분이 다른 게임과 달리 기성복의 느낌을 준다. 그래서 쇼에 올릴 만한 의상을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유저기자단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나마 제일 화려한 의상을 선택한 게 지금의 누이여신상 신관이다.
솔직히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오히려 반전이 기다리고 있더라. 막상 엑스엘게임즈에서 보내준 자료를 보니 복장의 퀄리티가 너무 높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자단 내부에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는데, 디자이너 분이 디테일을 너무 꼼꼼하게 체크해서 자료를 보내주셨다.
김정수 씨는 <아키에이지>에서 비교적 화려한 의상을 입은 ‘누이여신상 신관’을 택했다.
결국 이창익 아티스트가 보낸 관련자료가 너무 세밀해서 문제가 된 건가?
이창익: ‘이렇게 만들어내라!’는 느낌으로 강요하려던 건 아니다.(웃음) 처음 의상을 실제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했던 말은 “그게 가능해?!”였다. 게임 속 의상이라는 게 ‘옷’이라는 점은 현실과 같지만 그 목적은 현실과 다르다.
현실에서의 옷이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면 게임 속 복장은 보기에 아름답고 다른 콘텐츠들과 조화를 이루면 그만이다.
예를 들면 정수 씨의 문의사항 중에 복장에 사용된 게 지퍼인지 단추인지 묻는 질문이 있었다. 게임에서는 그냥 접합돼 있으면 됐지, 그런 걸 생각해 봤겠나? 그래서 가능한 고민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관련 자료에 이런저런 항목들도 추가해 넣었고.
김정수: 뭐. 디테일을 살릴 수 있어서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제 옷을 만드는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디자인이 복잡하면 제작과정 후반으로 갈수록 수정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니까….
이창익: 옷이 잘못했네.
김정수: 그렇다. 옷이 잘못했다. 농담이고.(웃음) 어쨌든 자료를 받고 3일 동안 이걸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분석했다. 다 쪼개고 나니 초기 패턴만 25조각이 나오더라.
감이 잘 안 온다. 25조각이 많은 건가?
김정수: 이건 기성복에서는 나올 수 없는 조각 수다. 일반 옷이 2~3조각, 주머니 같은 게 많이 달린 고가의 옷이 많아야 10조각 정도 나온다. 만약 이 옷이 명품 브랜드에서 나오면 무조건 500만 원 이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주변에서는 왜 고생을 사서 하냐고 하더라.(웃음) 덕분에 거의 보름 동안 꼬박 밤을 새웠다.
조목조목 힘들었던 점을 털어놓는 김정수 씨.
이창익 아티스트는 땀을 흘리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했다.
김정수 씨의 ‘멘탈 붕괴’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블로그의 코멘트.
적합한 원단 찾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김정수: 패션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동대문 시장을 많이 뒤지고 다닌 건 처음이었다.(웃음) 나름대로 ‘비단과 비슷한 광택’이면 공단, ‘무광택’이면 코튼 같은 식으로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맛을 살리려고 보니 마음에 드는 원단이 없었다. 동대문 원단시장을 다 외울 정도로 돌아다녔다.
기본 흰색 원단은 그래도 이틀 만에 찾았는데, 포인트가 되는 ‘펄 광택 재질 갈색’ 원단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4일을 찾아 헤맨 끝에 4층에서, 그것도 맨 구석에 있는 가게에서, 다른 원단에 섞여 있는 걸 간신히 찾았다.
이 때가 패션쇼 일주일 전이었는데, 이제 와서 말하지만 마지막 날은 디자인을 전부 엎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이창익: 하아~(아주 큰 한숨을 내쉬며), 이건 내가 잘못한 부분이다. 게임 안에서 옷 전체가 다 반짝거린다면 유저들이 유치하게 느낄 수도 있기 때문에 포인트가 되는 부분에만 은은하게 광택이 들어간다. 가급적이면 사실성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내 딴에는 배려한다고 상세하게 얘기해줬던 건데 이렇게 고생할 줄 몰랐다. 역시 옷이 나쁜 거였다.
김정수: 단호하게 말하지만 나쁜 게 아니라 ‘더럽게’ 어려웠다. 하하하.
이창익: 더럽게?!
김정수: 처음 밝히는 건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던 ‘금색 바이어스 테이프’는 사실 한국에서 구한 게 아니다. 아무리 뒤져도 못 찾아서 직접 일본에 가서 공수해 왔다. 물론 이것 때문에 일본에 간 건 아니었지만.(웃음)
김정수 씨가 일본에서 구해온 문제의 금색 테이프. 단가가 가장 높은 재료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었던 옷인데 아쉬운 점은 없나?
김정수: 시간이다. 조금만 더 일찍 시작해서 시간을 많이 투자했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디테일을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100% 만족스럽지 않다. 예를 들면 복장 하단의 금색 문양은 그대로 재현하지 못했다.
이 복장을 만드느라 <아키에이지> NPC 의상은 90% 넘게 수집했는데, ‘누이여신상 신관’은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특히나 문양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선택하기도 했던 거지만. 아무튼 그걸 그대로 재현하지 못해서 아쉽다.
이창익: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내가 ‘문양 덕후’다. 막 꼬불꼬불 화려한 문양을 넣는 게 너무 좋다. 하하…. 사실 지금의 ‘누이여신상 신관’도 원화에서 엄청 줄인거다.(웃음)
김정수: 어후… 지금보다 더 많았으면 난 죽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촉박해서 재봉틀을 사용했는데, 원단이 재봉틀을 이용하면 울어버리더라. 그래서 문양을 줄이고 뒷부분은 손바느질로 끝냈다.
작품의 완성본과 이창익 아티스트가 보내준 자료의 비교 이미지.
김정수: 하지만 제일 아쉬웠던 건 쇼였다. 원래 배정된 모델이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하면서 다른 모델로 교체됐는데, 사이즈가 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어지는 ‘핏’의 느낌이 중요한 옷인데 당연히 맞을 리가 없었다.
이창익: 패션쇼는 그 전에 리허설을 하지 않나?
김정수: 맞다. 쇼 시작전에 리허설을 3번 정도해서 다른 디자이너들은 수정할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남자다 보니까 여자 피팅룸에 들어가지 못해서 복장을 잡아줄 수가 없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케이프 후드와 메인 옷 사이로 모델의 머리카락이 삐져나왔다. 그때는 진짜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이창익: 원래는 케이프가 옷과 붙어 있고 후드만 따로 떨어진 거였는데….
김정수: 헉! 나는 처음부터 케이프가 떨어져 있는 걸로 봤는데? 아니, 그 전에 그 두 개가 붙어 있으면 이런 핏이 나올 수가 없다.
원단의 특성상 작품의 뒷부분은 전부 손바느질로 제작해야 했다.
■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걸 해보고 싶다”
이전에 코스프레 의상을 제작해 보거나 했던 경험이 있나?
김정수: 전혀 없다. 사실 게임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다만 2차 제작물을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전에는 <그라나도 에스파다>를 했었는데, 그때부터 게임을 이용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 <아키에이지> 유저기자단이 되어서도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올렸더니 조회수가 4,000이 넘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좋았다. 사실 댓글 한두 개 달릴 거라 예상했었다.
김정수 씨가 만든 <아키에이지> 단편 애니메이션 ‘무인도 표류기’
이창익: <아키에이지>를 너무 얕본 거 아닌가.(웃음)
김정수: 그렇다기 보다 어떤 큰 결심을 하고 유저기자단을 시작한 게 아니어서 좋은 반응에 놀랐고 또 기뻤다. 군 제대 직후 딱히 할 일이 없었고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있어서 방황하던 중에 친구의 권유로 <아키에이지>를 알게 됐다. 그러다 장난 삼아 지원했던 기자단에 덜컥 붙어버렸다.
처음에는 ‘어차피 2차 제작물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다른 유저 분들의 피드백을 받기 시작하면서 일종에 책임감도 느끼고 <아키에이지>에 대한 애정도 깊어졌다.
그렇다면 게임 옷 만들기, 또 도전할 생각이 있나?
김정수: 당연하다. 게임 속 옷을 만들면서 비록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배운 것도 많다. 내가 어디가서 25조각이 넘는 옷을 또 만들어 보겠나.(웃음) 좋은 경험이었다.
이창익: 다음엔 진짜 회사로 쫓아오는 거 아닌가?
김정수: 그럴지도 모르고.(웃음) 어쨌든 이번에 작업하면서 아쉬운 부분이 많아서 또 도전해 보고 싶다. 앞서 말했지만 새로운 것을 만드는 기자가 되겠다고 공약을 걸었던 만큼 계속 노력할 거다. 방학에는 <아키에이지>를 소재로 한 장편 애니메이션도 제작해 볼 생각이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계획인가? 혹시 게임 쪽에서 일할 생각인가?
김정수: 아니다. 최종 목표는 의상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다. 남들처럼 기업에 취직해서 실무도 배우고, 기회가 된다면 나만의 브랜드를 론칭하고 싶다. 하지만 필이 꽂히면 언젠가는 게임과 관련한 이런 옷들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웃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하지만 현실에 부딪쳐 실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머릿속에 상상하는 것, 고민했던 것을 구현해내는 게 너무 재미있다. 앞으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렇게 일하고 싶다.
이창익: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다. 앞으로 진짜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