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공대는 3월 1일부터 교내 주거지역에 게임 셧다운제를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디스이즈게임은 지난 1월 30일 [“기숙사에서 게임하지마!” 포항공대 셧다운제 실시]라는 기사를 통해 이 사실을 보도했죠.
특별히 이 보도에 더 관심을 갖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포항공대 출신 게임인들이겠죠. 넥슨에서 모바일게임 디렉터로 재직 중인 함선우 님은 포항공대 97학번입니다. 모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따끔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디스이즈게임
‘아……, 달라진 게 없구나…….’
포항공대의 게임 셧다운제 공지를 뒤늦게 알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습니다. 모교는 여전했습니다. ‘학생은 성인이 아니라 애’로 보고, ‘게임은 나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자랑스럽고 때로는 아쉬운 게 모교라지만, 이미 성인이 된 대학생을 항상 애 취급한다는 점에서 포항공대는 대부분의 경우 아쉬운 모교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80년대에 폭력시위에 참여해 학생들이 다치는 일을 우려한 초대 총장께서 학교 설립 당시 만드신 ‘정치활동 불참 서약서’를 들 수 있습니다. (90년 12월 이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인 학생회 간부 등 6명이 정학 징계를 당한 일이 있었음. 편집자 주)
그 시절에야 좋은 의도로 만드신 것일 수도 있겠지만 97~99학번까지도 시위 등에 일절 참여하지 않겠다는 이 서약서를 써야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생을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규정은 2000년대 들어와서 사문화 되어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슈가 된 대학 주거지역 내 게임 규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개개인의 자유인 것처럼, 게임이나 각종 엔터테인먼트 같은 생활 문제 역시 이미 성인이 된 학생 본인이 알아서 할 문제이지 학교가 이래라 저래라 할 이슈는 아닙니다.
말하자면 앞에서 예를 든 ‘정치활동 불참 서약서’나 현재 논란 중인 ‘주거지역 게임 셧다운제’는 포항공대 측이 아직도 학생(말이 학생이지 박사과정까지 가면 30살 근처의 분들도 많은데!)을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애로 여기는 후진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며, 인권 침해의 소지 역시 다분합니다.
1월 22일 포항공대 자유게시판에 게재된 총학생회 공지.
포항공대의 모토는 “잠재력과 도전정신을 갖춘 학생을 발굴하여 인류에 공헌할 인재로 양성한다”인데 오히려 학생을 대하는 방식은 ‘도전적이고 능동적인 인재’가 아니라, 소위 ‘말 잘 듣는 공돌이’를 양산하려는 쪽에 가깝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수면권 이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디로 우스운 소리죠.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 볼 때 룸메이트가 자고 있으면 각자 알아서 볼륨을 줄여주는 것이 맞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게임 셧다운이 아니라 단체생활에서의 예절교육 문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룸메이트가 밤에 너무 시끄러워서 같이 지낼 수가 없다는 학생이 있다면 그건 셧다운이 아니라 방을 바꿔줘야 할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책을 야밤에 소리 내서 읽는 게 문제가 된다고 해서 ‘독서 셧다운’을 하실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학교 공용 자산인 트래픽 데이터를 게임과 같은 소모적인 곳에 사용한다”는 언급이 저로 하여금 가장 헛웃음을 내게 만든 부분입니다. 일단 게임을 ‘소모적인 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학교 측의 고루한 시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97학번인 제가 졸업할 때 게임 기획자가 되겠다고 했더니 어떤 교수님이 “(고작) 게임 만드는데도 기획이 필요해?”라고 되물어 보셨습니다. 그 시절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해외 유수의 대학들이 창업가 정신을 강조하고 그 중에서도 게임 개발은 특히 창의적인 직업이라고 권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왜 셧다운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선택을 강요 받아야 할까요?
실제로 미국에서는 가장 좋은 직업으로 소프트웨어 설계, 그리고 비디오 게임 디자이너가 뽑히기도 하고, 실리콘밸리에서는 수많은 게임 관련 창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게임을 통해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현실에서, 게임을 “하찮은 것, 소모적인 것”으로 취급한다면 정말 미래를 놓치는 실수를 학교 측이 범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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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학교의 네트워크 트래픽을 게임이 많이 잡아먹는다고 발표한 것은 정말 ‘오죽 핑계가 없으면 이런 소리를 할까’ 싶을 정도로 한심한 주장입니다. 포항공대신문에서 게임 중 가장 많은 트래픽을 차지한다고 발표된 <리그오브레전드> <디아블로 3> 등은 휴대폰 테더링으로도 할 수 있을 정도의 게임입니다.
게임 패킷이 차지하는 트래픽이 아무리 커도 유튜브나 아프리카TV, 다음TV팟, 각종 인터넷 강의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100배 이상 많은 트래픽을 차지할 것임에 분명합니다. 아예 비교할 필요도 없이 명약관화한 것입니다. 설마 공대에서 이걸 모를 리가 없는데 얼마나 할 말이 없으면 트래픽 이야기를 꺼내는지 참….
게다가 포항공대는 한국에서 흔치 않은 클래스B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기관입니다. 클래스B 네트워크란 쉽게 말해서 IP를 매우 많이 갖고 있다는 거죠. (//mintnlatte.tistory.com/44)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50개 이하의 기관만이 클래스B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자산을 갖고 있는 학교가 정말로 “게임 때문에” 전체 망 속도가 느려져서 일을 제대로 못할 정도라면, 학교 측이 망 설비에 너무 투자를 소홀히 하여 아까운 클래스B 네트워크를 썩히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런지요?
또 재학 기간에 모든 학생을 무조건 기숙사에서 지내게 하고, 사설 네트워크를 설치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셧다운을 한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입니다. 그럴 거면 기숙사 밖에서 맘대로 살 수 있게 하던지, 아니면 기숙사에서 사설 네트워크를 설치할 수 있게 허용하든지 해야죠. 누가 보면 학생들이 기숙사비를 내지 않는 줄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게임 셧다운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이대로 강행한다면 포항공대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많은 고교생들을 상당수 잃어버릴 것임이 분명하다는 우려가 듭니다.
포항공대는 네덜란드와 함께 게임잼 코리아를 개최하기도 했다.
학생들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중고생 때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셧다운 당하고, 대학생이 되었더니 기숙사에 산다는 이유로 셧다운 당하는 황당한 일을 계속해서 겪어야 합니다. 납득할만한 일인지 아니면 비웃음을 살만한 코미디인 것인지는 누구라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학교 다닐 시절에도 너무 규제가 많은 것 같다는 이유에서 학생들끼리 가끔 자조적인 농담으로 “포항공대가 아니라 포항공고”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2015년에도 여전히 “포항공고”로 불리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주거지역 게임 셧다운이라는 당혹스러운 제도의 시행은 재고해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며 긴 글을 마칩니다.
- 현재 넥슨 모바일 게임 디렉터로 재직 중인, 산업경영공학과 97학번 졸업생 함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