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날 보습학원은 따분했습니다. 우선순위 영단어를 외우지 못해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맞던 나날이었습니다. 방학에도 학원에서 매를 맞았던 저의 '우선순위'는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아파트 상가의 학원에서 벗어난 우리는 분식집으로, 놀이터로, PC방으로 몰려다니며 놀았습니다.
우리 코스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학원에서 나왔으니 우선 배를 채워야 했고, 배가 부르니 놀이터에서 탈출이나 경찰과 도둑을 했고, 오래도록 뛰어다녔으니 PC방에 앉아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서늘하고 어두운 PC방은 에어컨을 세게 틀지 않아도 시원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흔한 <카트라이더> 초딩이었습니다.
뻑뻑하게 돌아가는 대형 선풍기가 전해주는 '흡연존'의 퀴퀴한 담배 연기도 우리의 질주를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시끌벅적하게 떠들었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리니지>나 <뮤>를 하던 아저씨들은 우리한테 시끄럽다고 소리쳤습니다. 아르바이트 형은 자기 여자친구를 데려와 <큐플레이>를 했던가 그랬을 겁니다.
떳떳하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옛날에 넥슨에 가입하려면 아버지의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야 했습니다. 저는 영어단어는 못 외웠지만, 건강보험증에 적혔던 아버지 주민등록번호는 지금껏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 14세가 안 됐기 때문에 여러 게임을 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카트라이더>의 세계에서 제일 중요했던 건 쉬프트를 얼마나 잘 끊어 누르는지가 아니라 다오, 배찌, 모스, 우니를 안 겹치게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우니를 기피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오와 배찌는 언제나 인기가 많았습니다. 다오를 빨간색으로 칠하면 친구들은 욕을 했습니다. 역시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어봐야 2시간을 넘지 않는 레이싱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우리는 '아이스 상어의 무덤 마지막 점프대를 넘어가려면 부스터를 써야 한다', '바나나는 드리프트 들어가는 코스에 잘 심어야 한다' 같은 공략을 열심히 나눴습니다. 라이선스를 못 깨면 놀림당할 게 뻔했기 때문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참, 요즘은 톡톡이지만 옛날엔 연타가 대세였습니다.
요즘 <카트라이더 러쉬플러스>를 하는데 자꾸 그때 생각이 납니다. 출시 이후 <카트라이더>는 정말 많이 변했고, <카트라이더 러쉬플러스>도 훨씬 깔끔해진 모바일 레이싱 게임으로 나왔지만, 불현듯 옛날이 떠오르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땐 그랬지" 하는 아저씨가 되어버리는 것인지.
방치가 없는 정직한 실력 게임이다 보니 한참을 '풀 집중' 하는데, 게임을 끄고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면 이내 그런 감상에 빠지곤 합니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냄새를 맡고 7권짜리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죠. 요즘 <카트라이더 러쉬플러스>는 저의 마들렌입니다.
담배빵 난 누런 키보드,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MMORPG 포스터, 꼭 몇 페이지씩 찢어진 게임 잡지,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바둑을 두고 있을 것만 같은 할아버지, 카운터를 비운 알바 형이 틀어놓던 휘성이며 버즈 노래... 쓰다 보니 예나 지금이나 저는 게임보다는 그 주변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 자체가 게임을 잘 만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카트라이더 러쉬플러스>는 원작의 간단한 조작과 시스템을 잘 가져왔습니다. 무엇보다 다 아는 모습이기에 다른 모바일 레이싱 게임을 할 때보다 몇 배는 친숙합니다. 터치로 옮긴 좌우 방향키와 부스터, 드리프트, 브레이크가 어색하지 않습니다. 끊김도 없죠.
그때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요? 저는 그 애들과 다른 중학교에 진학했고 연락은 자연스레 끊겼습니다. 걔네들한테 "잘 지내냐" 문자라도 해볼까요? 더이상 <카트라이터> 초딩이 아닌 지금, 그 일을 벌였다가 몰려올 어색함을 상상하니 역시 그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당시 PC방에서 흘러나왔을 유행가 중에 '친구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조PD는 '이젠 뭘 하더라도 / 그때와 같을 순 없으리오 / 이젠 바쁘더라도 / 우리의 추억을 기억해 줘'라고 랩합니다. 어디선가 잘 지낼 옛 친구들에게 이 노랫말이라도 전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