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건 그대일까 그때일까" ― 본인을 '시팔이'라고 소개하는 하상욱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짧은 시만큼은 탁월하다. 스몰비어 가게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맥주를 마실 때 눈에 들어온 분홍 네온사인에 이렇게 써있을 법하다. 뒤에 깔리는 노래는 윤종신의 '좋니'가 좋겠다.
최근 따끈따끈한 최신 모바일 MMORPG를 한다. <라그나로크 오리진>과 <바람의나라: 연>. 그리운 그때를 오늘날에 맞게 다시 만든 게임이다. 7월 23일, 구글플레이에서 <바람의나라: 연>은 두 번째로, <라그나로크 오리진>은 네 번째로 돈을 많이 번 게임이다.
<바람의나라: 연> 위아래로는 <리니지M>과 <리니지2M>이, <라그나로크 오리진> 밑에는 <뮤 아크엔젤>이 보인다. 정말 역사는 두 번 반복되는 걸까? 한 번은 PC로, 한 번은 모바일로. 누군가에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오늘날의 게임은 예전 것과는 많이 다르다.
두 게임을 통해 다시 MMORPG의 세계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을 텐데 큰 맥락부터 짚어보자. <검은사막>, <로한>, <블레스>, <블레이드&소울>, <에오스>, <테라> 등 이미 수많은 MMORPG가 모바일로 재탄생했다. <라그나로크>처럼 여러 번 나온 게임도 있다. 이 흐름은 계속될 예정인데 앞으로 <마비노기>, <테일즈위버>, <씰온라인> 등이 모바일로 출시된다.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바일 MMORPG 소식을 보면 "또?"라며 피로감을 나타내는 이유다. 하지만 자본은 지칠 줄 모른다. 언급한 게임들은 대부분 돈을 벌었다. 어떤 게임은 아주 많이 벌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MMORPG는 모바일화를 완료됐거나 준비 중이다. 그러니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하기 충분하다.
작년 MMMO(모바일 MMORPG) 열풍 속에서 <로한M>과 <에오스 레드>의 출시 소식을 듣고 "옛날에 이거 열심히 한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보기 좋게 틀렸다. 두 게임은 2019년 모바일 게임 매출 상위권에 오래 머물렀다.
많은 분석이 뒤따랐다. 익숙한 IP를 활용하면 신규 IP와 비교해서 개발도 쉽고 과거 유저들을 모바일로 흡수할 수 있다. 신규 IP보다 마케팅 비용 지출도 적고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더 많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이 과거 IP가 모바일로 등장하고 나름 성공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밖에 "현물 경품을 내건 이벤트 덕", "IP의 힘", "중국산보다는 낫다", "그런 게임 왜 하는지 모르겠다" 등 이야기가 많았지만 현상을 넘어선 평가에 얹을 말은 없다. 부족한 MMORPG 경험과 식견으로는 이 모든 것을 전부 명료하게 답할 수 없다. 그저 유튜브 중년게이머 김실장 채널에서 몇 가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권할 뿐이다. (바로가기)
여기 또 다른 피로감이 있다. 작년 여름 '직장인이 된 오타쿠들에게 흔히 보이는 현상'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녔던 트윗은 많은 공감을 얻었다.
사회인이 된 오타쿠가 피곤에 쩔어서 신장르/콘텐츠를 즐기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덕질은 계속하고 싶어서 옛날에 본 애니나 이미 클리어 한 게임 등
'이미 자신 안에서 소화된 콘텐츠'를 즐기며 오타쿠 성분을 섭취하는 현상.
씹는 힘이 약해져서 유동식만 먹을 수밖에 없는 노인 같은 비애가 느껴진다.
'오타쿠'의 자리에 '문화 향유자'를 넣어도 좋을 텐데 저 트윗을 읽던 시점 SBS 온라인 탑골공원에선 유승준이 찾길 바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MBC의 싹쓰리가 음원차트를 싹쓸이하고 있다. 정말 다들 늙고 피로해서 옛것이나 '옛것 비슷한 것'을 찾는 걸까?
코로나19 유행 전부터 극장가에는 재개봉이 유행이었다. 술에 취한 한석규가 담벼락에 오줌 누는 멜로 영화(<8월의 크리스마스>)를 극장에서 직접 본 게 벌써 수년 전 일이다. <덤보>, <알라딘>, <라이온킹>, <뮬란>, <미녀와 야수>. 최근 디즈니는 옛 애니메이션을 다시 만들어 재미를 보고 있다.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레트로 마니아>라는 책에서 "오늘날 대중문화가 과거에 중독됐다"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대중문화가 복고에 천착하고 산업이 계속 이런 장면들을 부추긴다면, 문화의 독창성과 독자성에 종말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하늘 아래 새것 없다지만 이 진단은 꽤 섬뜩하다. 주장의 설득력과 별개로 문화 전반에서 '이즈백'이 유행 중이다.
이런 와중에 MMORPG 적극 소비층도 늙고 있다. 옛날처럼 단축키를 신나게 눌러가면서 새벽까지 파티원들과 사냥할 상황이 아니다. 게임은 하고 싶고, 성장은 느끼고 싶고, 관계도 필요한 사람에게 MMMO는 나쁘지 않은 대안이다. 아예 못 벌지 않으니까 돈도 좀 쓰고, 디스코드에서 수다도 떨고, 길드 톡방에서 매일 아침 뉴스 모음을 올리는 형님이 하루 없어지면 괜히 걱정도 되고.
오늘날 적지 않은 게이머들이 느끼는 두 가지 피로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옛날 게임 M>이 또 나와서 질리지만, <요즘 게임>에 수십 시간을 쓰기도 어렵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라는 격언은 하나의 역사가 나중에 그대로 재생된다는 말이 아니다. 반복된 역사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 다른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21일, 데이터 분석 업체 IGA웍스의 모바일 인덱스에 따르면 <바람의나라: 연>의 서비스 첫날, 70만 명이 게임을 했다. <라그나로크 오리진>은 안드로이드 기준 13만 명이 플레이했다. 두 게임 모두 다른 MMMO와 비교했을 때 젊은 여성이 많이 플레이하고 있다. 서두에 쓴 매출 순위에는 그런 유저들의 소비가 포함되어있다. MMMO 시장에 뉴비가 생겨난 것으로 풀 수 있다.
실제로 그동안 어떤 게임에도 돈을 안 써봤다는 기자의 지인은 <바람의나라: 연>으로 모바일게임 자체를 처음 접했다. 지인은 게임을 하면서 전사의 길 패키지와 붉은 보석을 구매했다. 생애 첫 과금이었는데, 지인의 친구는 '의상실'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옷을 뽑으려다가 20만 원 가까이 썼다고 한다.
과금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의 자유. 그렇지만 MMMO 뉴비들이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옛날의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정액제의 시대는 예전에 끝났다. 오직 옛날의 좋음으로 새로운 추억을 조그만 스마트폰에 아로새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MMMO에서 구매력을 발휘하던 게이머에게는 익숙한 요소가 들어있다.
며칠 전부터 <바람의나라: 연>이 <리니지> 형제를 떼어놓을 수 있을까 기대하는 기사가 많이 나왔고, 오늘(23일) 현실이 됐다. 하지만 정작 <바람의나라: 연>의 비즈니스 모델(BM)을 따져보는 기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바람의나라: 연>이 세일즈하는 추억과 감성에는 이러한 수준의 BM이 없었기에 보기에 따라 괴리감이 느껴질 수 있다.
과금을 하지 않고도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업체도 그렇게 설명하고, 유저들은 무과금 육성법을 쓰고 있다. <바람>과 <라그> 모두 시간을 들여서 노가다를 하고 있으면 옛날처럼 무지 안 큰다. 하지만 같은 세계에서 시간을 돈으로 극복한 사람들을 마주한다는 사실은 옛날의 것이 아니다.
예전에도 현질 유저는 많았지만 오늘날의 과금 유저는 시스템이 유도한 방법대로 재화를 소비한다. 원작과 모바일 버전의 게임 플레이는 많이 다르다.
세간의 말처럼 인앱 결제 시대의 모바일 MMORPG는 달리려면 써야 한다. 정액제에 준하는 고정 비용 지출이 있는데 돈을 쓰면 경험치를 더 주기 때문에 (달리려면) 필수적이다. 그와 별개로 추가 비용도 발생한다. 정액제 시절의 게임은 시간 대비 비용이 고정적이지만, 요즘 게임은 시간 대비 비용이 천차만별이며, 그 비용은 강함과 연결되기 때문에 노닥거릴 겨를이 없다.
<바람의나라: 연>부터 보자. 경험치 증가, 아이템 획득률 증가, 금전 획득률 증가 옵션 등이 포함된 '태고의 보물'을 14일 기준으로 판매한다. 드랍률이 증가하는 옵션, 금전 획득량이 증가하는 옵션, 경험치가 증가하는 옵션 전부 따로 사서 적용할 수 있다. 여기에 시즌패스 , 환수 뽑기 패키지, 장비 각인 시스템도 있다.
<라그나로크 오리진>의 유료 몰에는 외형을 바꿔주는 각종 복장, 경험치와 추가 휴식 보너스를 지급하는 월 구독형 '카프라 회원권'을 판매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돈으로 시간을 대체하는 개념이다. 기타 옵션들도 준비되어있지만, 성장과 득템의 왕도는 카프카를 끊고 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카프카 회원권만큼 눈에 띄는 것으로는 각종 꾸미기 아이템이 있다. 그만큼 도드라지는 상품이 없어 <바람의나라: 연>보다는 수평적으로 느껴진다.
인앱 결제 시대의 모바일 MMORPG는 대부분 이렇게 설계되어있다. 시간은 문자 그대로 돈이고, 그 안에서 얼마나 빨리 자기 강함을 증명해내느냐의 싸움이다. 그래서 MMMO는 언제나 만드는 입장과 사서 쓰는 입장 사이 긴장의 연속이다.
게임사는 옛 IP를 되살린다 하더라도 소비자에게 정확히 그때 그 시절 순백의 추억을 제공하기 어렵다. '그때 그 시절'이 사람마다 다를 뿐더러 기업은 결국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 앞선 '유동식' 비유로도 볼 수 있듯, 옛날 게임과 똑같이 노가다를 해야 하는데 이걸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면 그것도 유저들 나름대로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언급 중인 두 게임의 그래픽과 디자인, 사운드는 실로 빼어나다. 원작에 누가 되지 않을 수준이라는 뜻. 흥미로운 사실은 두 게임은 공통적으로 IP홀더가 개발하지 않았다. <바람의나라: 연>은 슈퍼캣이 만들었고 <라그나로크 오리진>은 중국의 환러후위와 그라비티가 같이 만들었다. 뒤집어서 보면 두 케이스 마찬가지로 밖에서 만들고, 안에서 BM을 짰다는 말이 된다.
다른 MMORPG는 몰라도 <바람의나라>와 <라그나로크>에는 얹을 말이 조금 있다. 두 게임 다 적잖이 즐겼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기억의 8할은 채팅인데, <바람의나라>에서는 돈을 내지 않기 위해 19까지만 키워놓고 노닥거렸고 <라그나로크>에서는 아무 데나 자리 깔고 앉아서 떠들었다. 두 게임은 초창기 각종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하지만 모바일 환경에서 장터에서 자음퀴즈를 하거나 광장에서 채팅방을 열고 몇 시간씩 떠드는 일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국내성진입로의 구걸은 주막 앞 NPC로 대체되었으며, <라그> 원작에서는 다른 유저에게 부탁해야 했던 포탈은 이제 마음껏 타고 다닐 수 있다. 요즘 세상에서 한가로운 대화,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느낌 같은 것은 꼭 게임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두 게임에 추가된 커뮤니케이션 기능은 허전하다.
최근 <라그나로크 오리진>에서 활동이 활발한 길드에 들었는데, 들어오자마자 길드장은 나를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으로 안내했다. 길드 공간은 그렇게 자주 사용하지 않았고, 오픈 채팅방에서는 길드 레벨 올리는 이야기만 올라오고 있었다. 잡담을 금지하지 않았지만, '친목 길드'가 아니라 '빡겜 길드'이기 때문에 굳이 살가운 말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바람의나라: 연>에는 게임 안에서 오픈 채팅방을 지원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룹원이나 문파원을 모집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태성 디렉터는 이 채팅방 기능으로 "게임 안에서 자전거를 좋아하는 분들은 자전거 이야기를 하고, 여행 좋아하는 분들은 모여서 여행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소개했는데 아직 그런 사례는 보지 못했다.
요즘 모바일게임의 커뮤니케이션은 바깥에서 이뤄지고 있다. 앞서 말한 단톡방과 디스코드의 사례가 그렇다. 공략은 유튜브나 공식 카페로 찾아본다. 옛날에도 게임 커뮤니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게임 안에서도 충분히 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경우 자체가 많지 않아서 물어본다고 해도 답변을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인게임 소통은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다. 모바일 자판은 키보드와는 분명 다르다. 발열도 무시할 수 없다. 한 게임은 뜨거워서 쥐고 있을 수가 없을 정도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동 사냥만 해야 했다. <바람의나라: 연>은 채팅이 쉽게 되게끔 세로 모드를 지원하는데, 들고 다니며 하기에 편한지 몰라도 애초에 채팅 할 일이 없다. 솔로잉 중에는 물론 그룹 사냥 중에도 할 말이 많지 않을 정도로 오토 시스템이 고도화됐다.
두 게임의 외형적 만듦새는 추억에 잠기기에 충분할 정도다. 하지만 과금을 통한 성장, 채팅 등 접속의 측면에서 예전 그 게임이 아니다. 스마트폰으로 들어온 국내성과 프론테라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는 건 잠깐이다.
예전 좋았던 그 느낌을 계속 찾아다닌다면 실패할 공산이 크다. 브로콜리너마저는 '앵콜요청금지'로 노래했다.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수는 없다고. 새로 태어난 옛날 MMORPG를 즐긴다고 그리운 그때가 되살아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