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하반기 이후 NFT 기반 P2E 게임은 '뜨거운 감자'입니다. 올해 많은 게임이 쏟아질 예정이지만 공론장에서는 겉핥기식 기대나 당위 기반의 비판 등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해보고 들여다 보고 고민할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괜찮은 시도나 관점이 있을 수도 있고요. P2E에 관해 한 발 더 들어간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이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막연한 낙관이나 게으른 냉소 대신 이모저모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본 연재물 내용은 디스이즈게임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지만 퀄리티는 저희가 담보합니다. /디스이즈게임
위메이드, 컴투스, 넷마블, 네오위즈 등 국내 대형 게임사들이 3월부터 본격적으로 블록체인 기반 P2E(Play to Earn) 게임을 내놓고 있다. 위메이드와 컴투스는 아예 자체 플랫폼까지 만들고 전사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다. ‘돈 버는 게임’을 무기로 빠르게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게이머들 반응은 시큰둥하다. 게임 플레이를 통한 현금화 이익 추구 행위, 일명 ‘쌀먹’ 경험이 있는 게이머들조차 그렇다. 게임 플레이로 돈을 버는 것은 이전에도 가능했고, 그다지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P2E로 공장식 ‘쌀먹’이 합법화되면서 기존 게임들의 질이 하락할 가능성에 대해 민감해 하는 분위기다.
유명 게임 IP를 보유한 국내 게임사들이 P2E 분야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무사히 거둬갈 수 있을까? 미래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케이스로 보면 단순히 덩치가 큰 IP가 있다고 해서 P2E 문제들을 안전히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부딪힐 수 있는 주요한 문제들을 <로스트아크> 사례를 통해 정리해봤다.
생각보다 복잡한 P2E 세계…'쌀먹'만 문제가 아냐
P2E 게임과 비 P2E 게임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게임 내 재화의 통제권이 사용자에게 있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있다. 기존 게임들은 게임 내 재화의 거래나 계정 통제권을 전부 게임사에서 직접 관리했다. 가령 게임사가 특정 계정을 제재하면 그 계정의 가치는 바로 0원이 되는 식이었다.
그러나 P2E 게임에선 기본적으로 재화의 교환을 제한하지 않으며, 사실 제한할 방도도 없다. 재화가 기본적으로 NFT 형태로 블록체인에 기록되고, 전자지갑에서 자유롭게 거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현금화 절차가 합법화되고 간소화되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자체가 게임에 다른 복잡한 문제를 야기한다. 바로 재화의 가치하락 문제다.
지난해 10월, 스마일게이트의 MMORPG <로스트아크>에서는 골드 시세가 시즌 1에 비해 300%가량 폭락하는 인플레이션 사태가 발생했다. 골드 가치 하락의 주요 이유는 배럭(부캐)의 급증이었다. 골드를 팔아 현금을 챙기려는 ‘쌀먹’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전체 게임 생태계의 골드 생산량 자체가 증가했던 것이다.
<로스트아크>의 골드 인플레이션 문제는 운영진에서 기간 한정 골드 상점이나 이벤트를 진행하고 크리스탈 대신 골드로 추가 클리어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일단락됐다. 그런데 P2E 게임에서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게임 이코노미를 대규모로 조정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이 구조를 건드는 것이 게임사의 수익과 사용자의 플레이 경험과만 직결됐지만 P2E 세계에서는 더 많은 이해 관계자를 감안해야 한다.
가령 P2E 게임에 투자한 벤처캐피탈(VC)이나 코인을 보유하고 사고 파는 트레이더 등이 P2E 게임에서 새롭게 추가된 이해 관계자의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게임 플레이는 전혀 하지 않지만, 인게임 재화 가격 변동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P2E 게임인 <엑시 인피니티>(Axie infinity)를 예로 들어보자.
<엑시 인피니티>의 생태계 메인 토큰인 AXS는 발행량이 2억 7,000개로 한정돼있다. 그리고 그중 전체 발행량의 20%만이 게임 보상으로 할당돼 있으며 나머지 토큰은 초기 세일이나 프로젝트팀, VC에 주어진다.
<로스트아크>로 치면 게임 정식 오픈 전에 골드를 지금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미리 구입한 사람이나 게임 제작자들이 시장에서 골드를 마음대로 팔 수 있게끔 구조가 짜여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싼 값에 골드를 산 사람은 게임에서 골드를 얻은 사람보다 더 쉽게 팔 수 있다. 자연스럽게 골드의 가격이 하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P2E 게임 제작사들은 이런 하방 압력을 줄이기 위해 2종류 이상의 재화를 엮어 토크노믹스를 짜기도 한다. 아까 예를 든 <엑시 인피니티>도 AXS와 SLP 두 가지 토큰을 활용한다. 두 토큰 모두 인게임에서 사용처를 가지지만 AXS의 활용처가 좀 더 많으며 발행량이 한정돼 있는 반면 SLP는 무한한 발행량을 가지고 있으며 AXS에 비해 얻기 쉽다. <로스트아크> 식으로 굳이 비교하자면 AXS는 골드, SLP는 실링에 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토큰을 다분화하는 방식도 임시방책일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본질적인 문제는 P2E라는 구조 자체가 끊임없이 그 게임에 얽혀있는 게임 이해 관계자들의 시선을 게임 바깥으로 밀어낸다는 점에 있다. 게임이 잘 될수록, 보유한 토큰을 내다 팔아야 할 이유가 증가하고, 결국 P2E의 토크노믹스는 망가지기 쉽다. 이는 모든 P2E 게임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이제 막 이 시장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국내 게임사들도 마찬가지로 이 숙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에스더 무기를 돈 주고 살 수 있다면
<로스트아크>의 최상위 아이템은 ‘에스더 무기’다. 최고 난이도의 콘텐츠에서 극악의 확률을 뚫고 얻을 수 있는 재료로만 강화할 수 있는 성장형 아이템이다. 에스더 무기의 재료 중에는 돈을 주고 구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직접 수고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도 상당하다. 열심히 한다고 빨리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강화용 재료 중에는 어떻게 하든지 1주일에 얻을 수 있는 개수가 한정되어 있는 재료도 있다. 무엇보다 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만든 에스더 무기는 계정에 귀속되는 설정을 가지고 있어서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
이런 복합적인 설정들은 통상 게임 이용자가 게임 자체에 더 집중하게끔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게이머가 아이템을 얻기까지 들어간 유무형의 비용을 게임 바깥의 재화와 교환할 수 있다면, 그는 언제든지 엑싯(Exit)을 선언하고 게임에서 걸어나갈 수 있게 된다. 계정 귀속은 이런 이탈을 막아주는 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P2E 게임에는 이런 요소를 도입하기가 어렵다. NFT로 만들어진 게임 아이템들은 원칙적으로 게이머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양도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게임 1일차인 초보 게이머가 에스더 무기 NFT를 구입하면 몇 년째 시간을 쏟아 왔던 게이머를 깔아뭉개며 게임을 누빌 수 있는 세계가 P2E다. 이 세계에서는 에스더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단순히 ‘돈이 많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담보해주지 않는다.
직접 캐릭터를 육성하고 게임에 개인의 시간과 노력을 갈아넣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여러가지 부산물들을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것이 함께 공유하는 문화다. 같은 몬스터를 잡고, 같은 물약을 소비하고, 동일한 사냥터에서 ‘네가 하는 것을 나도 했다’는 동질감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문화적인 체취가 P2E에서는 옅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같은 세계관을 가진 게임이더라도 P2E 버전에서는 게이머가 게임에 대해 느끼는 애착이 비교적 빈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기존에 존재하는 대형 IP를 이용해서 만든 P2E 게임은 이 부분을 더 신경써서 보강해야 할 것이다. ‘원본’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애착이 약한 게임은 유행의 흐름에 금방 떠밀려 흘러가버린다. 기존 IP 활용을 강점으로 꼽고 있는 국내 게임들이 미리 감안해야 할 지점이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P2E는 앞으로도 계속 Earn을 위한 Play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그것은 ‘게임’이 아니라 ‘노동’이라고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