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국 게임사들은 줄곧 협·단체를 통해서 확률형 아이템 정보공개 의무화를 반대했다. 그 근거는 바로 "영업비밀"이었다.
2021년 2월 16일, 게임산업협회는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게임업계 검토 의견>(이하 검토 의견)이라는 의견서를 배포했다. <검토 의견>에는 "고사양 아이템을 일정 비율 미만으로 제한하는 것은 게임의 재미를 위한 본질적인 부분이고, 상당한 비용을 투자해 연구하는 영업비밀"이라며 "확률형 아이템 정보를 모두 공개하게 하는 것은 영업비밀이라는 재산권을 제한하므로 입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지금은 시행 중인 법을 반대했다.
그리고 <검토 의견>에는 "해당 게임의 개발자들도 그 확률의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게임사업자로서는 애당초 특정한 확률형 아이템의 정확한 공급확률의 산정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많음"이라는 문구가 들어갔다가 삭제되었다. 이 설명은 서버에서의 결괏값을 클라이언트나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산정하는 데 어려운 부분이 있음을 피력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당시에는 큰 공분을 샀다.
그밖에 소위 '업계'에서 확률형 아이템 정보공개를 반대하며 꺼낸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사업자의 영업 비밀에 해당할 수 있는 정보까지 제출의무를 두도록 하여 일방적인 자료의 제출이나 의견의 진술을 강요하는 형태는 행정편의주의" [2021.2.15.]
"(한국 게임업계는) 전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자율규제로 정책기구까지 수립해서 이를 이행하고 있다" [2020.1.14.]
"확률은 업계의 핵심 영업 비밀이다. 이를 강제 공개하는 것은 영업 자유 침해다. 규제 효과보다는 산업계의 피해가 더 클 것이다" [2016.08.30.]
"(공정위) 개정안에는 유료 아이템과 무료 아이템에 대한 구분이 없어 특정을 할 수 없고, 엄격한 규제 적용으로 소비자 피해까지 야기할 수 있다" [2020.1.14.]
'업계'는 자율규제를 통해서 이용자와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자율규제의 필요성을 최전방에서 피력하던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GSOK)는 8년간 지속하던 자율규제 모니터링을 중단했다. 그간 슈퍼셀 게임은 GSOK '확률형 아이템 미준수 게임물'에 수차례나 이름을 올린 '상위 랭커'였지만, 이들 BM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별로 없었다. 심지어 슈퍼셀은 한국 게임사들은 시도하지 않았던 확률형 아이템 삭제를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보공개에 대한 정부의 타율(他律)이 시작되자 속속 민낯이 드러났다.
웹젠은 <뮤 아크엔젤>에서 확률 정보 표기에 "오류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 게임에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 50번 이상 뽑기를 해야 하는 '바닥' 시스템이 존재했다. 웹젠은 '다이아' 같은 인 게임 재화가 아닌 "가치를 환산하여 지급 가능"하다며 초유의 현금 환불을 예고했다. 법률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된 것이 2023년 2월의 일인데, 이들은 계속 같은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라비티의 <라그나로크 온라인> 확률도 최대 8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자율적으로 여러 확률형 아이템의 등장 확률을 공개했는데, 법이 시행되기 이전과 이후의 확률이 달랐던 것이다. 그라비티는 뒤늦게 "최신화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지만, 유저들은 반발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민원을 접수받고 조사에 착수했다. 공정위는 "의도적 조작이 있었는지"를 살펴볼 예정이다.
표기 오류는 위메이드의 <나이트 크로우>에도 발생했다. 위메이드는 오류의 원인에 대해서 "정보 등록 시의 실수"라고 표현했다. 운영진이 공지와 함께 공개한 실제 확률 도표를 보면, 낮은 등급 아이템의 획득 확률은 실제보다 낮게 나타났고, 높은 등급 아이템의 확률은 실제보다 등장 확률이 높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인게임 UI상의 한계까지 존재했다는 것이 운영진 측 설명이다.
자율규제의 방패가 사라진 지금, 앞으로 "의도"와 "실수"의 진위를 살피기 위해서는 그간 "영업비밀"이라고 주장되던 것(로그, 기획서)들을 검증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공정위는 <메이플스토리>의 상황을 "기만행위"라고 발표하면서 넥슨의 기획 고려 사항, 확률 구조 변경 사실 등을 전부 대중에 공개했다. 그간 '업계'에는 수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103%의 성공 확률에도 실패하는 사례가 왕왕 있었다. 그렇게 불거진 조작 의혹에 "네트워크 오류" 같은 설명이 줄을 이었다. 이런 사건을 취재할 때마다 늘 석연치 않은 뒷맛이 남았다. 기업의 자체 해명 과정에서 제3자의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수가 반복되면 그것이 곧 실력이라 그랬다. 이제 "영업비밀"의 민낯은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2015년 4월, 본지는 몇몇 모바일게임에서 설정된 뽑기 확률이 0%였다는 개발자 진술을 보도했다. 당시 본지는 "현실적인 가이드라인"과 "명확한 비전"을 요구했지만, '업계'의 대답은 언제나 자율규제에 머물렀다. 그렇게 유지된 자율규제는 오늘날의 민낯을 더 부끄럽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니 자율규제를 끝내게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일까?
뼈아픈 검증의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기자가 만난 '업계인'은 "지금의 BM에 종언을 고할 때"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한국게임산업협회는 조만간 창립 20주년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