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저는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에 내릴 때부터 긴장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용돈을 손에 꼭 쥐고, 돈을 갈취하는 형들(진짜 있었습니다)과 공 CD에 '구운' 불법게임 매대를 지나 지금은 폐업한 모 지하상가에 입장하면 주얼시디를 잔뜩 쌓아놓은 가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 구매한 게임이 바로 RTS <천년의 신화>였습니다.
돈은 항상 부족한데 게임은 고구려, 백제, 신라 버전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한 번도 안 뺏긴다는 전제하에 같은 모험을 3번이나 떠나야 <천년의 신화>를 다 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막상 세 게임을 다 모으고 나니 드라마 <태조 왕건>의 인기로 고려편이 출시되어 허탈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큰 박스로 출시됐던 '고려편' 합본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미션이 모두 들어있었습니다.
<천년의 신화>의 쌍화살/독화살/불화살 시스템은 대단히 참신했던 기능입니다. (출처: 앙ㅋ[eeuu1133] 네이버 블로그)
요즘 나오는 PC에 CD-롬이 없어진 이유는 단순합니다. DL(디지털 다운로드) 방식으로 거의 모든 게임을 구매하고, 플레이하기 때문입니다. 필요가 없어진 셈이지요.
2023 게임백서에 따르면, 스팀 등 온라인 유통망에서 게임을 구매한 이들은 전체 82.8%였고, CD 실물 패키지를 구매한 이들은 34.2%였습니다. (중복 답변 허용) CD-롬이 없는 '디지털' 콘솔 기기가 나온 지도 수년이 지났으니 말 다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무시무시하던 용산 던전은 PC 조립 부품이 쌓여있는 쓸쓸한 공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스팀 라이브러리에 게임을 잔뜩 사놓고 플레이하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스팀 포럼에서는 흥미로운 Q&A가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유언장을 통해 스팀 계정 소유권을 양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밸브는 "스팀은 다른 사람에게 계정을 액세스할 권한을 제공하거나, 다른 계정과 병합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전에도 밸브는 "귀하의 계정은 귀하의 것으로, 가족과 공유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다"며 스팀 계정의 양도나 상속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스팀 포럼에 게시된 게임 오너십 상속에 대한 질문과 답변
우리가 ESD에서 구매한 것은 게임이 아니라 게임에 접속할 수 있는 접근 권한입니다. 패키지 구매 행위 또한 그 게임 안에 있는 접근 권리를 구매했을 때 물화(物化)된 저장장치를 함께 구매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최종 사용자 라이선스 협약'(EULA)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게임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게임을 플레이할 권한을 빌렸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허가 없이 소프트웨어를 개조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됩니다. 결국 스팀 라이브러리는 소프트웨어에 접근할 권리의 집합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 저승에 <팀 포트리스>나 <배틀그라운드>를 들고 갈 수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년간 수백만 원 이상 쓴 ESD(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 계정을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건 안타까움으로 남습니다. 이제 패키지로 게임을 구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게임 이력은 오직 스팀에 저장됩니다.
만약 후손이 생긴다면 그들이 제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 플레이 사실은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들어 자기 게임을 비공개 처리하는 기능이 추가되었으므로 건강할 때 숨기면 됩니다.) (출처: 렐루게임즈)
소비자 운동 'Stop Killing Games'의 공식 홈페이지
DCMS는 "사용자 기반이 감소하는 비디오게임의 오래된 서버를 유지 관리하는 데 드는 높은 운영 비용이 들기 때문에 기업이 상업적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아무튼 <더 크루>를 돈 주고 샀던 사람들은 이제 <더 크루>를 플레이할 길이 없습니다. 여건만 잘 갖추고 있다면, 수십 년 전 구매한 고전게임을 곧잘 실행할 수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기자도 이따금 어린 시절 구매했던 '레전드' 피처폰게임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PC에 가상 환경을 구현해 피처폰게임을 다시 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고는 합니다만, <놈>이나 <짜요짜요 타이쿤> 같은 게임은 피처폰의 물성(物性)을 고려하여 개발됐기 때문에, PC로 하면 그 맛이 안 날 듯합니다. 중고나라에는 이틀 전에도 <영웅서기 3>이 담긴 피처폰이 12만 원에 올라왔습니다.
지난 플레이엑스포에서 시연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처럼, 예전 게임을 요즘 환경에 맞게 새로 만들어 보여주는 모습은 분명 반가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게임업계가 과거의 게임을 오롯이 보존하고 전수하는 데에도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듀랑고: 야생의 땅>은 서비스를 종료했지만, '창작섬'은 남아있어서 게임을 추억하고 싶은 게이머가 가끔 찾아와서 놀 수 있듯 말입니다.
플레이엑스포 2024 대원미디어 부스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