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출장에서 돌아와 뒤늦게 파리 올림픽 개회식을 보았다. 센강을 무대로 펼쳐지는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는 굳이 생중계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인 볼거리였다. 성화 봉송 주자 또한 장안, 아니 파리의 화제가 되었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 파쿠르 액션을 선보이는 성화 봉송 주자. 단박에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의 주인공 아르노를 오마주한 인물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반면 <어쌔신 크리드>를 모르는 이라면 도저히 알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KBS의 간판 아나운서 이재후 씨는 편안한 진행으로 두루 사랑받지만, 이번 중계에서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다. 봉송 주자와 유비소프트의 게임 캐릭터의 관계를 모르고 연신 '괴도 루팡'이라 설명했던 것이다. 주자가 파리의 지붕을 달릴 때 국내 중계진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제작진이 급하게 자료를 조사해 전달을 해줬을 법하지만, 으레 '괴도 루팡'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린 느낌이었다.
한국의 중계진은 아르노처럼 생긴 캐릭터에게 성화를 전달한 축구 스타 지네딘 지단에 대해서는 말을 얹을 수 있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에 대해서도 은근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유독 게임 캐릭터에 대해서만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게임 캐릭터가 긴 시간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를 맡는 역사적 장면을 한국 방송은 제대로 해설하지 못했다.
이 유감을 뒤로 하고도 복면을 쓴 인물의 성화 봉송은 기념비적이다. 먼저, 그간 천대받던 게임의 달라진 위상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불에 탄 노트르담 대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50만 유로를 기부하면서 복구 전까지 볼 수 없는 대성당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기회를 준다며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를 무료로 배포했던 프랑스 유비소프트의 행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파리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의 주인공 아르노를 모델로 한 듯한 캐릭터가 한참 동안 성화를 봉송했다. (출처: 올림픽 공식 X)
그러나 지난밤 기자의 머리에 번득 떠오른 키워드는 간접광고와 스포츠워싱이었다. 개회식은 센강변을 따라 프랑스 공화국의 자유, 평등, 박애를 보여주면서 현대 프랑스가 추구하는 다양성을 찬미했다. 그 다이나믹스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 요소가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 명품'으로 그 이름을 공영방송에서는 언급하기 까다로웠던 루이비통과, 아예 그 정체조차 말할 수 없었던 유비소프트 게임 캐릭터였다.
유비소프트는 전 세계 시청자에게 자사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유비소프트는 개회식 직후 X에 "파리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글을 올리며 쐐기를 박았다. 실로 훌륭한 마케팅 전략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개회식 내내 야외 무대에서는 다양한 인종과 성의 출연자가 나와 춤추고 노래했지만, 정작 그 배경에 자기 주인공을 질주시킨 유비소프트는 수년간 성추문으로 지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 설문에 따르면, 유비소프트 직원 25%가 회사에서 성추행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이 일로 임원진 다수가 "조직적인 성추행 가해 혐의"로 회사를 떠났다. 유비소프트를 둘러싼 성추문 고발은 2020년부터 수년간 이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 폭로는 불과 3개월 전 흑인 여성 아티스트로부터 나왔다. 작년에는 옛 유비소프트 임원 5명이 프랑스 현지 경찰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우리는 게임이 스포츠워싱의 짝꿍으로 등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게임과 올림픽을 이용해 반등을 노린 이들이 또 존재했으니 바로 일본의 아베 내각이었다. 2016년, 아베 신조 당시 총리는 리우 올림픽 폐회식에서 닌텐도의 마리오 모자를 쓰고 등장했다. 직후 내각 지지율은 60%를 넘어섰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도쿄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한 "슈퍼 마리오 효과"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베 내각의 정점이었다. 훗날 아베 내각과 총리 본인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프랑스 이야기로 돌아와서, 유비소프트는 개회식을 자기 무대로 만들었지만 회사에 부정적 이미지를 미친 고발은 수년간 이어지고 있다. 개회식 이후, <어쌔신 크리드>를 포함한 프랑스 콘텐츠로 가득했던 이번 행사를 프랑스 시민 87%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직전의 부정 여론을 생각해 보면 대조적이다. 이같은 긍정 평가는 축제가 끝나도 이어질까? 스포츠워싱은 잠깐의 환희를 줄 수 있지만,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아베 신조 총리는 2016년 리우 올림픽 폐회식에서 슈퍼 마리오로 등장해 화제를 모았으나 정작 도쿄 올림픽 개회식에는 불참했다. (출처: IOC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