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한 이상적인 조건은 무엇일까?
내 생각으로는 전 세계의 주요 게임을 충분히 수집한 아카이브를 갖춘 뒤, 일부는 공공적인 형태로 전시하되, 자료의 손실과 분실 등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 자료는 연구자와 학자들을 위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제한적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박물관과 미술관은 어렵게 수집한 게임을 유물로 취급하여 유리관 속에 가두어 놓고, 기기와 게임을 전혀 가동해보지 않는 모순에 빠져있다.
주요 게임 아카이빙 기관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더 스트롱, 국립게임박물관
미국 뉴욕 주 로체스터 시에 위치한 ‘더 스트롱: 국립놀이박물관'(The Strong: National Museum of Play)은 게임뿐만 아니라 놀이와 관련된 장난감, 인형, 보드 게임, 놀이와 게임 관련 문헌과 서적에 관해 전세계적으로 가장 충실한 콜렉션을 보유한 곳이다.
이 박물관은 현재 게임 2만 7,000여 개, PC게임 8,000여 개를 포함해 총 3만 5,000여 개의 디지털 게임 콜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닌텐도와 세가, NEC에서 개발한 콘솔에 활용되는 게임들은 지금까지 발매된 모든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콜렉션의 충실도가 뛰어나다.
현재까지 상업용으로 발매된 게임이 3만 개 가량 되는 것으로 추청하고 있기 때문에, 더 스트롱은 거의 완벽한 게임 콜렉션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박물관은 TV와 연결 가능한 최초의 게임 콘솔인 마그나복스 오딧세이(Magnavox Odyssey)를 개발한 랄프 베어의 노트나 게임 산업 초창기의 주요 개발자인 돈 대글로우(Don Daglow), 조단 매크너(Jordan Mechner), 켄 & 로베르타 윌리엄스(Ken & Roberta Williams), 윌 라이트(Will Wright) 등의 게임 디자인 노트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게임 디자인 방법론의 원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더 스트롱은 일반적으로 게임을 공공적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의 성격과 게임 연구와 관련된 주요 자료들을 폐가식(절차에 따라 제한적으로 열람 가능)으로 운영하는 도서관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 실제로 더 스트롱 내에는 게임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International Center for the History of Electronic Games(이하 ICHEC)’와 놀이와 게임 관련 전문 자료와 잡지, 논문 등을 열람할 수 있는 브라이언 서튼 스미스 도서관(Brian Sutton-Smith Library)를 양분해서 운영하고 있다.
더 스트롱은 게임 초기의 아케이드 게임이나 콘솔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볼 수 있는 공공적인 상설전시도 운영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ICHEC와 브라이언 서튼 스미스 도서관은 게임 연구자에 한해 폐가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전시와 연구 목적의 열람을 분리해 운영하는 더 스트롱의 방침은 게임 연구와 공공적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독일 컴퓨터 게임 박물관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컴퓨터 게임 박물관(Computerspiele Museum)은 유럽에서 나온 게임의 가장 충실한 콜렉션을 바탕으로 더 스트롱 못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는 박물관이다.
유럽산 게임들은 TV의 주사방식(PAL)이 북미 및 한국, 일본(NTSC)과 다른 이유 때문에 게임 산업 초기부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독자적으로 유통됐고, 이에 따라 북미나 일본과 다른 독자적인 게임문화를 형성해왔다.
컴퓨터 게임 박물관은 2015년 8월을 기준으로 2만 4,000여 개의 게임과 PC 게임, 300여개 이상의 콘솔과 컴퓨터, 1만 권 이상의 게임 관련 저널을 보유 중이다. 규모로 보면 더 스트롱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유럽에서 출시된 게임 수가 북미와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유럽에서 발매된 거의 대부분의 소프트를 소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박물관이 더 스트롱과 다른 점은 대부분의 소장품이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고, 큐레이터의 기획에 의해 그 일부만 전시를 통해 공개된다는 점이다. 공개된 소장품 대부분은 플레이 가능한 형태로 전시되지만, 관람객이 전시품의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 없고 플레이할 수 없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더불어 폐가식 형태의 전시품 관람 신청도 현재로서는 받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전체 소장품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나 공공적인 활용을 제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게임 박물관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동독 지역에서 개발된 게임이나 19세기에 개발된 독일식 전쟁 게임(Kriegspiel) 같은 희소가치를 지닌 유럽 게임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 정부는 게임을 문화유산 가치를 지는 기록물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실례로 쾰른을 비롯한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를 시작으로 공공도서관에서 게임을 수집하고 지역주민들에게 무료로 플레이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컴퓨터 게임 박물관에서 게임 수집과 관련된 일을 총괄하고 있는 빈프리트 베르크마이어(Winfried Bergmeyer)는 필자와의 현지 인터뷰를 통해 독일 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이러한 게임 아카이빙 정책이 게임 박물관에 적용될 경우 지금의 폐가식 형태의 전시품 관람을 체계적인 부분 개가식(자유롭게 열람 가능) 형태로 바꿀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컴퓨터 역사 박물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마운틴 뷰(Mountain View)에 위치한 컴퓨터 역사 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은 주로 컴퓨터 역사에 관한 전시를 진행하고 있지만, 게임 분야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전시품을 보유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특히 최초의 디지털 게임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스페이스 워>(Spacewar!)의 경우 1962년 이 게임이 처음으로 구동됐던 컴퓨터 PDP-1의 하드웨어를 복원해 전시하고 있고, 해마다 날짜를 정해 PDP-1에서 <스페이스 워>를 구동해 시연한다. 또한 1972년 앤디 캡의 술집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던 <퐁>(Pong)의 최초 프로토타입 역시 오리지널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컴퓨터 역사 박물관의 컴퓨터 관련 전시 규모는 전세계에서 그 규모를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방대하지만, 게임에 한정지었을 경우 초창기 게임 역사와 관련된 희귀 자료를 제외하면 별도의 게임 관련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컴퓨터 역사 박물관은 과거의 게임을 당대에 그 게임이 구동되었던 하드웨어를 복원, 전시해야 한다는 미디어 고고학적인 원칙에 입각하여 초창기 게임과 그 시스템을 복원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넥슨 컴퓨터 박물관
넥슨 컴퓨터 박물관은 2013년 국내에서는 최초로 컴퓨터를 주제로 삼아 그 전시물을 기획,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실제로 넥슨 컴퓨터 박물관의 많은 전시물들이 컴퓨터 관련 전시품이지만, 넥슨이 국내를 대표하는 게임 기업인만큼 게임 분야에 대한 전시품도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다.
2015년 4월 기준으로 1세대부터 8세대에 걸친 약 3,000여 개의 게임과 PC 게임을 수집했으며, 최초의 가정용 콘솔에 해당되는 마그나복스 오딧세이나 애플 Ⅰ 등의 희귀한 하드웨어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특히 게임의 경우 2층에 위치한 NCM 라이브러리를 통해 당대의 유명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 볼 수 있게 배려하고 있다. 그러나 NCM 라이브러리에 전시된 게임 규모는 전체 소장 규모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개가식으로 직접 플레이해 볼 수 있는 게임은 콘솔당 10여 종에 불과하다.
또한 전시대 뒤쪽에 개가식처럼 비치해 놓은 다수의 게임들은 실제로는 관람객이 직접 체험해볼 수 없는 반폐가식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 그 용도가 제한적이다.
다만 넥슨 컴퓨터 박물관은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게임과 콘솔, PC의 목록을 박물관에 위치한 키오스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배려하고 있어, 추후 이러한 자료들이 부분적으로나마 개방된다면 게임 역사 연구에 일조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고무적인 것은 세계 최초의 MMORPG 중 하나인 자사 게임 <바람의 나라>의 최초 버전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MMORPG를 비롯한 온라인 게임은 잦은 업데이트 때문에 최초 버전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람의 나라>나 <리니지> 같은 경우 현재 서비스하고 있는 버전과 최초 버전은 다른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변화가 심한 편이다.
때문에 클라이언트의 경우 96년의 버전을 복원했지만, 서버와 일부 DB의 경우 97년도의 버전 밖에 남아있지 않아 일부 혼합된 버전으로 복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넥슨 컴퓨터 박물관의 <바람의 나라> 복원은 온라인 게임이 주를 이루고 있는 한국 게임계에 복원의 표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러나 아직까지 게임 소프트를 분류하고 검색할 수 있는 DB가 온라인으로 공개되어 있지 않고, 대부분의 자료들이 일반인 입장에서는 원천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부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콘텐츠진흥원 콘텐츠도서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콘텐츠진흥원이 운영하고 있는 콘텐츠도서관은 2009년에 개관한 이래로 5세대(플레이스테이션 1, 닌텐도 64 등) 이후의 게임들부터 시작하여 현 세대인 8세대까지의 게임들을 약 2,500여 개 보유하고 있다. 콘텐츠도서관은 더 스트롱을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드물게 게임을 개가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다만 콘텐츠도서관은 몇 가지 부분에서 여전히 개선해야할 점이 있다. 우선 게임의 분류 방식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게임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콘텐츠 도서관의 게임 분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우선 10번대 PC 게임, 20번대 보드 게임, 30번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40번대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게임, 50번대 닌텐도 게임, 60번대 세가 게임, 70번대 휴대용 게임으로 분류되어 있다. 우선 이것만으로도 닌텐도 콘솔인 게임큐브가 60번대로 분류되어 있거나, PC 게임만 장르별로 구분되어 있는 등 일관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또한 34번으로 분류된 플레이스테이션 무브나 43번으로 분류된 엑스박스 키넥트의 경우 별도의 콘솔이 아닌 주변기기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항목이 존재하여 일관성을 해치고 있다.
수집의 차원에서도 5세대의 세가 새턴이나 핸드헬드 콘솔 중 현 8세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플레이스테이션 비타(Playstation Vita), 현재 8세대 콘솔인 엑스박스 원, 위 유(Wii U) 등은 제외되어 있어 다양성 역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콘텐츠도서관의 개관이 2009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4세대 이전의 고전 게임의 수집이 여의치 않았던 점은 감안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 정식발매가 이루어진 게임들까지 특정 콘솔 게임이라는 이유로 수집에서 제외된다면 아카이브로서 높은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워보인다.
마치며
이 글에서는 게임의 역사를 보존·연구하기 위한 아카이브들의 국내외 사례를 비교 조사하고, 이를 통해 게임 역사박물관 구축을 위한 기초적인 자료 분류와 구축 방식을 제안해 보았다. 아직 시론적인 연구다. 분류 과정과 복원 방식에 대한 더 자세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