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플팀 5픽의 권한으로, 제가 하고 싶은 것 했습니다"
어디선 나온 말이냐고? 담원 기아의 롤드컵 8강 승리 기자회견 중 언급된 코멘트다. 담원 기아의 서포터 '베릴' 조건희는 마지막 세트에서 '서포터 파이크'라는 프로 무대에선 잘 등장하지 않는 희소한 픽을 꺼내 들어 승리했고, 기자회견 중 파이크 선택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물론, 경기 내용은 베릴의 답변과는 조금 달랐다. 담원 기아는 파이크의 뼈 작살 - 망자의 물살로 이어지는 연계에 신드라와 직스가 적극 호응하면서 자칫하면 패배할 수 있었던 경기를 화려한 연계를 통해 승리했다. 파이크로 보여준 퍼포먼스도 2020년 롤드컵에서 '서포터 판테온'으로 활약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이처럼 이번 롤드컵 8강은 재미있는 이슈로 가득했다. 속담을 비틀어 보자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많았"던 셈. 이번 기사에서는 10월 25일 시작될 4강 경기 전 리마인드 차원, 8강 경기에서 나온 이모저모를 모았다.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출처 : 라이엇 게임즈)
본 콘텐츠는 디스이즈게임과 오피지지의 협업으로 제작됐습니다.
# "하고 싶은 것 했다"기엔 귀중했던 파이크 픽
파이크는 하이리스크 - 하이리턴 챔피언인 만큼 프로 무대에서는 활약하기 어렵다고 여겨져 왔다. 궁극기 '깊은 바다의 처형'을 통해 서포터라고는 믿을 수 없는 킬 캐치력과 골드 수급량을 선보일 수 있지만, 상황이 받쳐주지 않으면 몸도 약하며 라인전, 한타 모두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
파이크의 성적도 이를 잘 증명한다. 담원 기아의 경기 전까지 파이크는 2021 롤드컵에서 0승 2패라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한화생명e스포츠의 '뷔스타' 오효성이 PSG전에서, 프나틱의 힐리생이 RNG전에서 파이크를 선택했지만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주지 못하고 패배했다. 특히 힐리생의 파이크는 데스만 '10'을 기록할 정도로 부침을 겪었다. 그만큼 다루기 어려운 픽이다.
힐리생의 파이크는 데스만 10을 기록했다 (출처 : 라이엇 게임즈)
이에 대한 담원 기아의 해답은 간단했다. 스킬 하나하나가 강력한 포킹 조합에 파이크를 곁들임으로써 적 챔피언이 그랩에 적중했을 때의 폭발력을 극대화했다. 실제로 엘요야의 그라가스는 파이크의 그랩에 적중당할 때마다 이어지는 신드라의 '적군 와해'와 직스의 '지옥 화염 폭탄'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덕분에 매드 라이온즈는 한타에서 담원 기아보다 조합상 유리했음에도 불구, 사이드에서 끊임없이 그랩 각을 노리며 자신들을 괴롭히는 파이크에게 휘둘리다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포킹 조합을 선택한 담원 기아를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선 그라가스나 오공이 사이드에서 이니시에이팅을 걸어야 했지만, 담원 기아는 파이크를 통해 매드 라이온즈의 의도를 무력화시켰다.
파이크의 그랩과 동시에 신드라의 스킬과 직스의 궁극기가 연계됐다. 그라가스 입장에선 어쩔 도리가 없다
(출처 : 라이엇 게임즈)
결국 담원 기아는 리스크 있는 조합으로 놀라운 호흡을 보여주며 끝끝내 3:0 승리를 가져왔으며, '롤도사'라는 별명을 가진 베릴의 폼이 다시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단순히 "5픽의 특권"이었다기에는 상당히 많은 것을 증명해 낸 파이크 픽이었다.
베릴은 자신이 여전한 '롤도사'임을 증명했다 (출처 : 라이엇 게임즈)
# 누가 스크림에서 약 팔았어요? '미드 애니'
"잘못 누른 건 아니겠죠?"
EDG와 RNG의 8강전에서 가장 이목을 끌었던 픽은 미드 애니다.
애니는 픽률이 낮지만, 승률이 높은 대표적인 장인 챔피언이며, 프로 무대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픽이다. 스킬 구성은 단순하지만, 패시브 '방화광'의 스택을 잘 관리해야 해 적지 않은 숙련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기를 통해 상대 입장에서 대처하기 힘든 이니시에이팅을 걸 수 있다는 장점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이 능력을 위해 희생해야 한 능력치가 너무나 많았다. 특히 프로 경기에서 덕목으로 여겨지는 라인 관리 능력이 매우 부실하다. 마나 소모량이 높아 유지력도 떨어지는 편이다.
덕분에 프로 무대에서 애니가 활약한 것은 2015년 시즌 이전 '서포터 애니'가 활약했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긴 사거리와 궁극기를 통한 이니시에이팅을 통해 변수를 만들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딱 한 번 뿐이지만 브랜드와 같이 바텀 라인에 서 '바텀 파괴' 조합을 선보인 적도 있다.
이후 다른 이니시에이팅형 서포터 챔피언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애니 본체마저 너프당하면서, 애니는 프로 무대에서 설 자리를 완전히 잃었다.
아주부 프로스트가 선보인 애니-브랜드 조합. 아쉽게도 경기는 패배했다 (출처 : OGN)
그렇기에 이번 롤드컵에서 '미드 애니'의 등장은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변수였다. 2세트에서 미드 애니가 RNG의 마지막 픽으로 깜짝 등장했을 때 해설진은 순간 말을 잃었고, 커뮤니티에서는 "잘못 누른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중국 <롤> 클라이언트에서 애니의 픽창 주변에 '트페', '오리아나' 등의 메타 챔피언이 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근거가 제시되기도 했다.
역시는 역시나였을까. 애니는 "실수일지도 모른다는" 예상대로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중간중간 무리하게 타워를 공격하던 이즈리얼을 기습적으로 잘라내긴 했으나, 결국 스킬셋이 단순하고 라인 관리 능력이 부실하다는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미스 포춘 - 알리스타 - 애니로 이어지는 강력한 연계가 나오기도 전에 RNG는 교전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경기를 그대로 내줬다.
이에 LCK 분석데스크는 "스크림의 폐해다"라는 재치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본선에서 미드 애니를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 연습 경기에서 유의미한 결과값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연습 경기에서 애니에게 당해준 상대 팀의 잘못(?)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다. 실제로 RNG는 기자회견에서 애니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연습 과정에서 결과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애니 픽은 무리수였나... (출처 : 라이엇 게임즈)
패배에 굴하지 않은 RNG는 4세트에서도 다시 미드 애니를 꺼내 들어 자신들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려 했다. 이번에는 애니가 적절한 이니시에이팅을 통해 승리에 큰 보탬을 했지만, 4세트에서도 라인 관리와 미니언 파밍에 어려움을 겪거나, 신 짜오의 궁극기에 스킬을 쏟아붓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경기 후 분석 데스크에서도 "오늘의 EDG였기에 가능했던 픽"으로 평가했다.
그래도 EDG에게는 미드 애니가 큰 변수로 느껴졌는지, 결국 애니는 마지막 5세트에서 칼같이 밴을 당하고 말았다. 프로씬에서 외면받는 애니가 오래간만에 등장해 승리를 챙겨가며 밴까지 당한 의미 있는 경기였지만, 승리한 경기에서도 확실한 한계를 보여주며 여러모로 아쉽게 됐다. 애니가 다시금 프로 무대에 등장해 활약하기 위해선 리워크가 아닌 리메이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신 짜오의 궁극기에 주력 스킬을 쏟아부은 애니. 경기는 승리했지만, 애니가 승리의 주역은 아니었다 (출처 : 라이엇 게임즈)
# 한화의 미라클 런, 8강에서 마무리되다.
서머 정규시즌 8위라는 성적에도, 끝내 롤드컵 진출에 성공한 한화생명e스포츠(이하 한화)의 '미라클 런'은 8강에서 마무리됐다.
한화의 이번 시즌은 쉽지 않았다. 스프링 시즌에는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3위에 올랐지만, 서머 시즌에는 시작부터 무너지는 모습을 연발하며 8위라는 암담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기 때문. 스프링 시즌에 쌓은 써킷 포인트로 겨우내 선발전에 이름을 올렸지만, 한화가 롤드컵 티켓까지 따낼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적었다.
(출처 : 라이엇 게임즈)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한화의 미라클 런은 여기서 시작됐다. 선발전에서 샌드박스 게이밍을 3:1로 잡아낸 후, 롤드컵 진출이 유력하다고 평가받은 농심 레드포스를 3:0의 스코어로 격파했다. 조별 리그 직행 티켓이 걸린 T1과의 마지막 선발전에서도 5경기까지 혈투를 선보이며 경기력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증명했다.
인수 후 처음으로 롤드컵에 진출한 한화는 플레이-인, 조별 리그를 모두 통과하며 8강이라는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다시 한화 앞에 선 T1은 롤드컵 진출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기력으로 한화를 압살했다. 한화는 특유의 경기력을 살리기 위해 초반 교전에 집중한 밴픽을 계속해서 선보였지만, T1은 이마저도 운영을 통해 파훼하며 경기 초반부터 한화를 압박했다. 결국 한화는 3:0이란 스코어로 여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다만, 아쉬운 결과라고 평하기엔 한화가 이번 시즌 달성한 성과는 분명 의의가 있었다. 스프링 시즌 성적은 롤드컵 진출과 큰 관련이 없다는 "스프링 이즈 낫띵"을 결과로 반박해낸 것. 한화의 미래를 책임질 '윌러' 김정현, '뷔스타' 오효성이 첫 국제무대를 치르며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는 점도 무시할 순 없다. 이제 한화에게 남은 과제는 휴식기를 잘 마무리하고, 차후 스토브리그를 어떻게 보내느냐이다.
'쵸비' 정지훈과 '데프트' 김혁규의 계약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출처 : 라이엇 게임즈)
# 롤드컵 4강, 한국팀만 3팀
8강 마지막 일정이었던 젠지 e스포츠와 C9의 경기에서는 젠지가 3:0 승리를 가져가며 마지막 4강행 티켓을 따냈다.
이로써 LCK는 롤드컵 4강에서 세 팀이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다시 LCK의 황금기가 돌아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성적이다. 롤드컵 4강에 LCK 세 팀이 진출한 것은 약 5년 만이다. 2016년 롤드컵에서 SKT T1과 락스 타이거즈, 삼성 갤럭시가 4강에 진출했고, 우승컵은 결승에서 삼성을 꺾은 SKT T1이 들어 올렸다.
더욱이, 4강 중 유일한 LPL 출신 팀인 EDG는 한국인 용병 '스카웃' 이예찬과 '바이퍼' 박도현을 기용하고 있다. 스카웃은 LPL 5년 차로 로컬 자격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 점을 고려하면 2021 롤드컵 4강에 진출한 팀의 '주전 선수' 20명 중 17명이 한국인인 셈이다.
확정된 사실도 있다. 시즌 2 롤드컵에서 TPA가 우승을 차지한 후 8시즌 동안 롤드컵 우승팀의 미드 라이너는 한국인이었다. 4강에 진출한 팀 모두가 한국인 미드 라이너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이번 시즌까지 포함하면 9년 연속 한국인 미드 라이너의 우승이다.
4강에 진출한 젠지 (출처 : 라이엇 게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