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 ID/PW 찾기

연재

[덕후론_03] 한국 오타쿠, 코끼리 밥솥 대신 닌텐도와 세가가 들어오며 생겨나다

그렇게 오타쿠/덕후라는 단어는...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스카알렛 오하라(scarletOhara) 2022-06-20 10:03:13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만화나 애니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어요. 정책적으로 금지됐으니까요. 대부분 해적판으로 음지에서(그렇게 음지도 아니었던 것 같긴 한데...) 극히 일부만 일본 문화 콘텐츠를 접하고 씹고 뜯고 즐기고 맛보고 있었어요.

 

90년대 대학가와 대여점을 통해 대중과 만난 <이웃집 토토로>와 <슬램덩크>

 

하지만, 재미있는 콘텐츠는 장벽을 초월하죠. 권위주의 국가들처럼 폐쇄적인 사회에서도 규제 시스템을 넘어 디즈니 영웅물이나 한국 드라마가 유행하고, BTS와 블랙핑크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전에 언급한 일본 만화산업의 질적인 급성장과 매체 혁명, 즉 인터넷통신의 발달로 인해 1990년대 대학가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일본 오타쿠 콘텐츠가 유입되었어요. 도서대여점과 비디오대여점의 확산 역시 여기에 큰 역할을 했죠.

 

옛 만화방의 지저분한 환경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편하게 만화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친구들끼리 돌려보기도 가능해지면서 소셜하게 콘텐츠 확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어요. 대학가에서는 노천극장에서 애니메이션 상영회를 열기도 했고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1988). 시골로 이사한 어린 두 자매 사츠키와 메이와 숲의 요정 토토로의 이야기.

이 시기 유행한 콘텐츠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작품들, 지브리의 작품들, 그리고 <북두의 권>과 <슬램덩크> 같은 대작들이었죠. 

 

현실적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을 형식적으로나마 막고 있던 우리나라의 문화장벽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시기 본격적으로 문화시장을 개방하면서 무너졌어요. 일본 문화 콘텐츠를 TV에서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죠. 케이블TV 시대가 오면서 투니버스 등 전문적인 채널도 등장하며 그 영향력도 커져갔어요.

 

 

일본 콘텐츠 정보를 찾아내고 공유하는 사람들, 한국의 오타쿠의 탄생

 

이 당시 만화시장은 일본 만화가 지배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나라 만화와 소재나 작화 면에서 질적인 차이가 컸죠. 군사정권 시대에 소재에 대한 검열이 살벌했으니 문화상품이 자유롭게 창작되고 다양화될 수 없었죠. 당연히 성장하기 어려웠어요. 결정적으로 소득 수준이나 인구 규모 역시 일본에 비해 적었으니 시장 규모도 차이가 났고요. 자연스럽게 일본 만화가 전체 만화시장을 주도하게 되었어요.

 

게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어요. 1980년대에 일본은 이미 <팩맨>, <동키콩>, <슈퍼마리오>로 미국 시장을 휩쓸고 있었죠. 세계적으로 패미콤이 유행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구할 수 없었죠. 팔지 않으니까요. 구하려면 일본 가서 사와야 하는데, 우리나라 해외여행 자유화가 1989년이에요. 일본 출장가는 사람은 코끼리밥솥을 사서 가져오는 시절이었죠. 밥솥이야 어느 집에서나 탐낼 만한 물건이지만, 게임기는 그런 게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어요. 용산전자상가나 세운상가 등에서 복제품으로 들여와 암암리에 팔리고 있어 아는 사람만 사오는 수준이었어요.

 

그런 와중에 재믹스가 나왔죠. TV에서도 광고도 하고 서울 어린이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장난감 1위가 부루마블에서 재믹스로 바뀌었어요.

 

1990년에 나온 대우전자 재믹스(MSX) TV 광고

 

 

그러다가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우리나라 고소득층 중심으로 일본의 게임이 유입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1990년대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되며 재믹스가 만들어 놓은 게임기 시장에 닌텐도와 세가가 들어오면서 게임도 일본의 문화가 주도하게 되었어요.

 

1992년 10월 28일, 일본 게임기 수입에 대한 조선일보 기사

 

그리고 이런 콘텐츠를 선호하는 열성적인 팬들이 생겨났어요. 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그것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원하고, 가지고 싶어하죠. 그래서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권위가 생기죠. 자랑스러운 거거든요. 하지만, 만화나 게임이나 일본 콘텐츠예요. 한국에서 쉽사리 정보를 얻기 쉽지 않았어요.

 

정보의 불균형은 정보의 갈증을 심화시키죠. 정보를 찾아내고 공유하는 사람들이 생겨요. 그러기 위해 일본어를 익혀버리는 사람들도 있죠. 일반인들은 라틴어를 읽을 수 없었던 중세 유럽에서 성경의 해석 권위는 성직자에 있었던 것처럼, 일본어로 일본 콘텐츠를 숙지한 사람들은 권위를 가질 수 있었어요. 후에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오타쿠라고 불려지기 시작했어요.

 

여기에 일본의 히키코모리 이미지도 함께 묻어와 확증편향을 일으키면서 한국에서 오타쿠는 ‘일본 애니나 게임을 열성적으로 좋아하고 수집하는 괴짜’라는 의미로 자리잡았어요. 일본에서처럼 멸칭의 뉘앙스가 강했어요. 오타쿠는 한국 언어 습관에 맞게 ‘오덕후’로, 다시 한국적 두자약어 변화로 ‘오덕’ 혹은 ‘덕후’로, 그리고 ‘입덕’이나 ‘탈덕’같은 용어까지 다양하게 파생되어 갔어요.

 

 

그냥 ‘팬’이 아니다. "나는 덕후다"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의미는 계속 변하죠. 네, 또 변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이 지속되고, ‘취향’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어요. 생존에서 유희로 소비 중심이 변해가고 있죠. 주5일제가 정착되며 여가가 많아지고, 여가를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해졌어요.

 

사람들은 업무 외에 취미에 대한 대화가 많아졌고, 누구나 취미를 가지는 게 당연시되었어요.

 

사람을 소개받을 때 "뭐하는 사람이야?"뿐 아니라 "취미가 뭐래?" 혹은 "주말엔 뭐한대?"가 등장하기 시작했죠.

 

온라인 세상의 발달로 다음카페가 흥하면서 일부 매니아들이나 즐기던 동호회 문화가 대중화되었어요. 온라인 세상이 스마트폰을 통해 모바일로 이동하자, 동호회 문화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마저 떨쳐내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가 되기 시작했어요.

 

이제 자신이 무언가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 주변에 알리는 것이 매력적인 것이 되었어요.

 

무언가를 즐기는 사람을 동호인, 팬, 매니아... 같은 용어로 지칭하다가, 좀 더 힙한 용어를 찾던 이들에게 덕후라는 아주 좋은 단어가 눈에 띄네요. 덕후는 물론 단순한 팬이나 동호인 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아요. 본래 의미는 ‘생계가 아닌 이유로 대중문화가 아닌 특정 분야에 심취하며 전문적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고, 이후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었죠.

 

그들은 덕후의 ‘원래 의미’를 가져와서는 그들 혹은 자신들이 얼마나 매력적인 팬, 동호인, 매니아인지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냥 팬이나 매니아라는 표현은 힙하고 싶은 자신을 표현하는 데 부족했거든요. 더 쎈 표현이 필요했죠.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나의 로열티를 더 강하게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팬이 되면 바로 ‘입덕’했다고 표현하고, 그 대상이 대중문화의 대표 중 하나인 아이돌이 되기도 하네요. 물론 상업적인 이유나 립서비스가 중요한 방송에서 그 방향을 강하게 푸시하게 되죠.

 

사실, 일본에서도 유사한 변화를 겪었어요. 코트라에서 인용한 일본 닛세이 연구소, 야노경제 연구소 등의 자료에 의하면 일본에서 역시 오타쿠가 취미 생활자, 팬 등으로 의미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KOTRA(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의 일본 오타쿠 관련 트렌드 리포트(2021) [링크]

그렇게 오타쿠/덕후는 현재 본래의 의미와, 두 번째 의미와, 마지막 캐주얼한 의미까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어요.

 

두 번째 의미인 ‘일본 애니를 열성적으로 좋아하고 수집하는 사람들’로서의 덕후도 다시 심화되는 의미를 파생시키는데요. ‘미소녀물을 열성적으로 좋아하고 수집하는 사람들’이에요. 일본과 한국 모두 방송이나 웹툰 등의 매체에서 이런 의미로 덕후를 묘사하는 경우가 있었고, 한국에서는 <프리드로우> 같은 웹툰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면서 이런 의미가 잘 뿌리내리고 확산되었어요. 그리고 젠더 이슈도 이런 경향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앞으로 연재할 덕후론에서는 캐주얼한 의미로 쓰이는 덕후에 대해선 논하지 않을 거예요. 기본적으로는 ‘생계가 아닌 이유로 대중문화가 아닌 특정 분야, 즉 다음 장에서 설명할 서브컬처에 심취하며 상당한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서의 덕후에 대해 논할 거예요.

 

그리고, 몇몇 토픽에서는 좀더 협소한 의미로서의 덕후, 즉 애니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더 좁게, 미소녀물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될 거예요.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해 볼게요.

 

1. 덕후는 오타쿠를 말해요.

2. 언젠가부터, 비즈니스적이지도 않고 친목적이지 않은 어색한 목적으로 만나는 일본인들이 서로를 오타쿠라고 부르는 일이 종종 있었을 거예요. 상황 상 적합한 호칭이었을 뿐이었겠죠.

3.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만들기 위해 모인 젊은 스태프는 서로를 오타쿠라고 부르며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4. 1983년 8월, 제22회 일본 SF 대회에서 대중 앞에서 <마크로스> 스태프는 대화를 나누며 상대를 ‘오타쿠’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였어요. 사적인 공간이 아닌 대중 앞에서 처음 ‘오타쿠’라는 호칭이 쓰인 시점이에요.

5. 이후 오타쿠라는 의미는 직업과 관계없이 서브컬처에 열광하고 많은 지식을 쌓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되었어요.

6. 한국에도 이 용어가 유입되는데, 마침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팬을 의미하는 이미지가 강할 때였어요.

7. 일본의 완성도 높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이 유입되면서 오타쿠라는 용어가 일본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중심으로 자리잡았어요.

8. 오타쿠는 덕후로 약자화되었어요.

9. 이후 대중문화를 즐기는 사람에게까지 캐주얼한 의미로 확장되었어요.

10. 앞으로 제 글에서 덕후라는 용어는 자신의 직업과 관계없이 서브컬처에 열광하고 전문적 지식을 쌓은 사람을 지칭하게 될 거예요.


이렇게 정의한 덕후에 대해서 앞으로 이런 내용을 다룰 거예요.

 

● 덕후의 탄생: 인류의 진화와 역사 속에서 덕후와 서브컬처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 알아볼 거예요.

●​ 덕후의 역사: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덕후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알아볼 거예요. 정보혁명이 어떻게 덕후들의 세상을 만들어 왔는지 살펴보겠어요.

●​ 덕후의 특성: 덕후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덕후가 아닌 이들과 어떻게 다르게 살아가는지 알아볼 거예요. 덕후의 스테레오타입이 왜 나타나게 되는지도 살펴보도록 하겠어요.

●​ 덕후와 경제: 서브컬처 혹은 덕후문화가 산업화 과정에서 어떤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게 되었고, 기술적으로는 어떤 것들을 기반으로 하게 되었는지 알아볼 거예요. 아이돌 산업과 같은 유사한 사례와 비교도 해보겠어요.

●​ 한중일 덕후: 우리나라보다 덕후문화가 더 크게 발달하고 있는 일본과 중국의 덕후 세계는 또 어떻게 다른지 알아볼 거예요. 비슷한 듯 보이면서도 철저하게 다른 이유를 세 나라의 역사와 환경을 비교하며 살펴볼 거예요.

●​ 양덕의 세계: 덕중의 덕이라는 서구권 덕후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거예요. 이들이 왜 아시아권보다 먼저 덕후문화가 발생했고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겠어요.

●​ 게임과 덕후: 덕후산업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게임 산업이에요. 게임 산업 안에서 서브컬처 느낌의 비주얼을 만들어 내기 위한 각종 기술의 발전과 독특한 BM, 커뮤니티, 바이럴과 KOL로부터 매스미디어까지의 마케팅 전쟁 등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어요.

 

다음 장에서는 서브컬처 및 서브컬처를 즐기는 이들의 성향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어요. 

최신목록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