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솔랭 환경에서는 서포터 품귀 현상이 지속되어 왔다. 프로씬으로 진출하려는 선수들 역시 서포터 기피 현상을 보이며, 최근에는 포지션 자체의 품귀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서포터의 몸값이 그야말로 금값으로 매겨지게 된 셈이다.
이러한 생리 속에서 3년 넘게 최상급 서포터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선수가 바로 ‘케리아’ 류민석이다.
케리아는 데뷔 초기 당시 종종 강약조절이 안된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강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시도하는 모험적인 플레이가 가끔씩 찾아오는 큰 경기에서 위험성 높은 플레이로 돌아와 패배의 원흉이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해로 데뷔 4년차를 맞이한 케리아의 플레이에는 마치 수묵화에서 예술적으로 그려진 농담(濃淡)의 표현처럼 농익은 맛이 서려있는 듯 하다.
특히 올 시즌 ‘원딜 서폿’의 적극적 채용으로 너른 챔프폭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는 케리아의 플레이는 가히 ‘경지에 올라섰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케리아에게 웃어주는 메타, 그리고 메타 속에서 함께 웃는 케리아를 통해 LCK를 넘어 <롤>의 틀과 규격을 파괴하는 그의 플레이를 조명해본다. /장태영(Beliar) 필자, 편집=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출처: LCK)
본 콘텐츠는 디스이즈게임과 오피지지의 협업으로 제작됐습니다.
# 서포터에 웃어주는 메타, ‘돈으로 패는 서포터’
‘베릴’ 조건희는 지난 1월 29일, 광동 프릭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 믹스드존 인터뷰를 통해 서포터 시작 아이템인 ‘주문도둑의 검(이하 ‘도둑검’)’과 ‘영혼의 낫’의 하향 필요성을 제기했다.
두 아이템 모두 고유 효과인 ‘헌납’ 효과를 통해 아군 챔피언과 인접할 경우 구조물이나 상대 챔피언을 공격할 때 30초 당 3번씩 20 골드를 획득할 수 있다. 아이템 고안 당시 출시된 물리형 서포터 ‘세나’와 맞물려 활용되곤 했는데, 특히 주문력을 올려주는 도둑검과 달리 영혼의 낫은 공격력을 올려준다는 점에서 각광을 받았다.
문제는 올 시즌 스프링의 메타가 지난 롤드컵을 기점으로 크게 격변한 데에 있다. 롤드컵 토너먼트에 접어들며 당시 DRX가 선보였던 애쉬-하이머딩거 조합과 같은 강력한 바텀 라인 푸시력과 막강한 시야장악력은 많은 팀들에게 시사점을 안겼다.
라인을 강력하게 밀어둔 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서포터의 로밍 탓에 체급이 비슷한 팀에겐 어지간한 라이너 못지않은 서포터가 전 맵을 돌아다니는 효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더군더나 하이머딩거의 폭발력 있는 스킬 구성 탓에 쉽사리 한타를 열기도 어려운 난국에 몰려, 서포터의 공격적 기용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메타는 스프링까지 이어져 아예 하이머딩거가 아닌 물리형 원거리 딜러를 서포터에 적극 기용하는 밴픽이 스스럼없이 등장하는 형국이 되었다. 통계를 살펴보면 LCK만의 독특한 흐름이라 보기에도 힘들 만큼 애쉬와 같은 원거리 딜러를 전 세계 리그에서 너나할 것 없이 적극적으로 채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LCK / LPL / LEC 애쉬 서포터 채용 빈도 ↔ 2022년 각 리그별 비교
나미와 유미의 갈라먹기가 뚜렷한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물리형 원딜 애쉬의 기용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애쉬는 2022년 서머부터 유틸형 서폿-원딜 스왑 챔피언으로 주목받긴 했으나, 바루스-애쉬 조합의 발견 이후 출현율이 서머 대비 비약적으로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나미와 유미는 모두 전형적인 주문력 계수에 영향을 받는 챔피언들이다. 도둑검과 궁합이 잘 맞는 챔피언이라 할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상대 챔피언을 공격해 골드를 수급하기에는 전투와 약간의 거리가 있다. 반면 애쉬의 경우 W 스킬과 평타 조합을 통해 최대 60 골드를 단시간에 수급해 낼 수 있고, 궁극기 쿨타임이 여타 챔피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르다는 점을 활용해 원딜과의 순간 카이팅 및 이니시에 용이하다는 장점도 존재한다.
이런 추세는 곧 솔로 랭크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는데, 최근 한 달간 그랜드마스터 랭크 이상의 서포터 챔피언 기용 추세는 카르마에 이어 애쉬가 2위, 챌린저 랭크 이상으로 올라가면 애쉬는 단연 1위의 기용 추세를 보였다.
그랜드마스터/챌린저 서포터 기용폭(최근 1달)
서포터가 돈으로 상대팀 바텀 듀오를 때리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서포터에 웃어주는 메타가 도래했음에도 ‘베릴’ 조건희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조정을 언급한 것은 궁극적으로 두 아이템이 게임 밸런스를 해칠 만큼의 성능을 지녔음을 시사한다. LCK에서 이런 언급이 나온 데에는 LCK가 여타 리그와 달리 초반 바텀 주도권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음 또한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기용된 서포터 챔프의 추세를 보면, 원거리 딜러 포지션의 챔프 폭인지 헛갈릴 만큼 극단적인 공격적 성향이 두드러진다. 소위 ‘투원딜’ 체제의 등장으로 라인 푸시력은 물론 전반적인 초반 게임 주도권을 틀어쥘 수 있다는 점은 돈으로 패는 원딜 서포터의 기용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경기 당시 ‘클템’ 이현우 해설 또한 “라이엇이 만든 규격을 깨버렸다”는 표현으로 픽의 경악스러움을 대변했다.
케리아의 칼리스타 서폿 픽 (vs. DK) (출처: LCK)
# 메타 속에서 웃는 케리아, 서포터의 규격을 깨다
서포터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풀이할 경우 지원, 연락, 경계 등의 임무를 맡는 보조적 인물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롤>에서도 서포터의 역할은 삼성 갤럭시 화이트가 2014년 시즌에 보여줬던 탈수기 메타가 등장하기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지원과 경계의 연장선 어딘가에 머물러왔다.
적극적인 타 라인 개입과 정글 동선의 난입, 폭넓은 시야싸움의 선봉장으로서의 서포터는 이 시기부터 대두되며 프로씬에서도 서포터의 역할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이어졌다. 사실상 오늘날 서포터의 인-게임 오더와 적극적인 시야 확보가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시점이 2014년 삼성 갤럭시 화이트의 플레이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텀 지역 플레이 양상의 정석 역시 이 시기에 정립된 운영 방식에서 출발하는데, 최근의 메타는 ‘과연 서포터가 로밍과 라인전 중 초반엔 무엇에 더 힘을 주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고민에 빠지게 한다. 어려운 난제에 정답은 없지만, 케리아는 ‘라인전’에 무게를 두어 대답한다.
아래 그림은 LCK 스프링에서 서포터 포지션에 기용된 선수들의 15분 간 골드 격차를 그래프로 정리한 것이다. 케리아의 격차는 +471로 2위인 ‘켈린’ 김형규보다 178 골드가 많고, 3위 ‘딜라이트’ 유환중과는 334 골드로 큰 격차를 보인다. 서포터의 골드 수급 방식은 킬/CS 외에도 달리 서포터 아이템을 통한 것도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케리아가 여러 서포터들보다 더 공격적인 챔피언 운용을 시도하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서포터 포지션 GD@10 & GD@15
라인전이 무난하게 풀린 서포터의 다음 임무는 다시 본연에 맞게 시야장악과 적극적인 로밍으로 이어진다. 여기서도 케리아의 특색이 관찰된다. 15분 이후 ~ 25분까지의 리그 내 평균적인 시야장악 히트맵은 탑 라인과 바텀 라인을 가로지르는 대각선 구도 아래 바론 둥지 근처 그리고 드래곤 둥지 근처의 핵심 부쉬를 중심으로 집중되는 반면, 케리아의 히트맵은 전 맵에 걸쳐 매우 산재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2차 포탑 ~ 진영 내 외곽 포탑까지 찍힌 와드의 분포도는 빠른 주도권을 바탕으로 일궈낸 스노우볼의 성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리그 전체 15~25분 와드 히트맵 대비 케리아 15~25분 와드 히트맵
바론 트라이가 집중되는 시점부터 해당 지역 전반에 대한 시야 장악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케리아의 와드 분포 히트맵은 이보다 다소 이른 시점인 15~25분 사이부터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라인전에 집중할 경우, 노란색 원으로 표기된 부분은 안정적인 플레잉을 고려하면 정글러의 동선에 좀 더 가까우나, 케리아는 과감한 동선 채택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롤이 오래전부터 시야장악과 정보전의 중요성을 강조받는 게임임을 감안하면 바텀 라인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까지 전방위적인 시야장악에 힘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매우 이른 시간부터 팀의 정보전에 기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케리아는 초중반부에 걸쳐 바론 트라이 루트에 시야장악을 집중하면서 팀 전체에 불필요한 동선 낭비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임을 가져간다. T1의 리그 1위 선 바론 확률(81%)과 리그 1위의 바론 획득률(77%)은 결국 케리아의 한 템포 이상 빠른 시야장악이 가져온 결과인 셈이다.
이어 26~40분 경에는 전 맵을 밝히는 등불처럼 와드를 설치하며 변수를 줄이는 플레이를 통해 게임의 종지부에 기여한다. 사실상 T1의 '템포 게임'에는 케리아의 영향력이 매우 지대함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케리아의 장점과 영향력은 올 시즌 들어 더 독창적인 방식으로 빛나고 있다. 바로 방대한 챔프 폭을 통해서다. 스프링 시즌 가장 많은 챔피언을 기용한 서포터 플레이어인 ‘라이프’ 김정민(총 10개 챔피언)의 승률이 8승 8패로 50%를 보이고 있는 반면, 케이틀린, 애쉬, 칼리스타, 진 등 원거리 딜러 플레이어가 집어도 결코 이상함이 없는 챔피언을 기용해 승률 100%를 달리며, 총 전적 11승 5패, 68.8%의 기이한 성적을 내고 있다.
메타에 웃어주는 서포터 챔피언인 나미와 유미를 적극 채용하는 분위기에 역행하더라도 얼마든 성적과 실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한때 서포터 챔피언에 독특한 챔피언을 던져놓으면 '독을 풀었다!'와 같은 걱정이 앞서던 것과 달리 너른 챔피언 폭을 바탕으로 얼마든 메타에 걸맞게 소화해내는 모습은 어쩌면 ‘독도 잘 쓰면 약’이라는 선현들의 진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 모든 지표에서 웃어주진 않지만… “해야 할 일을 한 박자 빠르게”
실제로 올 스프링 시즌 지표 전반을 살펴보면 ‘딜라이트’ 유환중이나, ‘카엘’ 김진홍, ‘켈린’ 김형규 등 여러 서포터 지표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것에 비해 케리아의 지표는 ‘독보적’ 이라는 표현과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다.
오히려 전체 지표만 놓고 보면 서포터 포지션에는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큼 매력적인 선수들이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케리아는 해야 할 것들에 충실하되, 팀의 템포를 끌어올리는 한 박자 빠른 주도적 플레이로 서포터의 가치를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포터의 영향력이 점차 증대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서포터의 책무는 '팀의 게임'이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적절하게 보조하는 데에 있다. 어느 포지션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자칫 무리한 엑셀러레이팅은 팀의 승리를 그르치는 쓰로잉이 될 수 있다. 팀의 정보전을 책임지는 서포터 포지션의 역할을 고려하면 모험보다는 정석에 더욱 충실할 때 1인분을 챙길 수 있는 셈이다.
자칫 정보전에 충실하겠다는 목적은 무리한 움직임이나 때에 걸맞지 않은 움직임으로 팀 전체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케리아의 플레이는 이 모든 것을 현실로 옮기고 있다. 흔히 '입롤'처럼 여겨질만한 과감한 밴픽과 한 박자 빠른 장악력은 T1에서 케리아가 가지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비록 시즌 초반이지만 가을철 잘 익은 감처럼 달디단 성과를 T1이 얻는다면, 그 영광의 핵심에는 단연 절정에 이른 케리아의 플레이가 자리할지도 모르겠다.
(출처: L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