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K 스프링도 이제 4월 8일과 9일, 이틀에 걸친 결승 두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다. 토요일에는 젠지와 KT 간의 최종 결승 진출전이 있고, 승자는 다음 날 정규 시즌 1위이자 결승전에 직행한 T1과 대결한다.
달리는 말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한 나머지 세 팀이 보여준 존재감도 봄바람에 식혀 흘려보내기엔 대단히 뜨거웠다.
결승 주간을 앞둔 지금, 플레이오프에 투신했던 여섯 팀 모두를 놓고 울고 웃었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꼽아 보고자 한다. /장태영(Beliar) 필자, 편집=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본 콘텐츠는 디스이즈게임과 오피지지의 협업으로 제작됐습니다.
# 기쁠 희(喜): KT 롤스터 - 어느 때보다 길고 따뜻한 봄
‘서머의 KT’라 불릴 만큼 KT 롤스터는 봄보다 여름에 강하고 더 뜨거운 팀이었다. 마지막으로 LCK 왕좌에 올랐던 때가 2018 서머 스플릿이었고, 준우승 2번의 기록도, 서머, 승강전에서 살아남았던 짜릿한 기억도 모두 여름날의 추억에 서려 있던 아련한 시간들이었다.
그에 비해 KT의 봄은 조금 춥고, 짧았던 기억들이었다. 오랫동안 왕좌를 향해 달렸던 기억은 어느덧 6년 전, SKT T1과의 결승전으로 먼 기억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2023년 KT 롤스터의 따뜻한 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따뜻할 전망이다. 장장 2주에 걸친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KT가 거둔 승리는 8승, 패전은 그의 절반인 4패뿐이다. 과거 KT 롤스터가 LCK의 패권을 다투던 시기의 향수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플레이오프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기 충분했다.
(출처: LCK)
‘서머의 KT는 얼마나 더 무서울까?'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경기력이었다. 어쩌면 이번 플레이오프의 가장 큰 수확은 KT가 쏘아올린 부활의 신호탄을 보고 듣고 느끼며 기뻐할 수 있던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KT의 활약상이 더 기쁜 이유는 이 팀에 의존도 높은 에이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요할 때 누구나 큰 존재감으로 상황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게임 체인저가 되어주고 있고, 이는 에이스를 잃으면 안정감을 잃던 과거와 매우 다른 모습이다.
지난 몇 차례의 시즌에서 '에이밍' 감하람에게 순간 폭딜은 물론, 플레이메이킹까지 기대해야 했던 밸런스 깨진 팀에서 벗어나, ‘기인’ 김기인, ‘커즈’ 문우찬, ‘bdd’ 곽보성, ‘리헨즈’ 손시우 등 이름만 열거해도 누구나 상황을 뒤바꿀 수 있는 저력이 있는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KT의 봄이 길어지도록 만든 동력이었다.
말파이트와 우르곳으로 탑 라이너 특유의 변수 창출의 정수를 보여주었던 리브 샌드박스와의 PO 1라운드, 트위스티드 페이트 픽을 통해 미드 중심의 변수 창출로 T1을 휘청이게 했었던 PO 2라운드, 패자조에서 탑 라이즈를 꺼내며 턴 게임으로써의 <롤>을 입증했던 모습들은 팔색조의 화려함을 보는 듯했다. 자칫 밸런스를 무너뜨릴 수 있는 조커픽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왜 KT 롤스터가 스프링의 왕좌까지 넘볼 만한 저력이 있는 지를 입증했다.
KT 팬들의 오랜 바람이 이루어질 적기는 어쩌면 2023년 봄이 아닐까? (출처: LCK)
# 늙을 로(老): 한화생명e스포츠 - 전차, 닦고 조이고 기름을 쳐야할 때
군대에서 화포나 전차를 정비할 때 주로 쓰는 구호는 “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다.
‘오늘도 무사고’ 하나만을 외치는 것보다 좀 더 실질적이고, 행동 지향적이면서 예방 정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호다. 한화생명 e스포츠의 전차는 분명 멈췄지만, 더 먼 미래와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닦고 조이고 기름을 쳐야 할 때라는 분명한 이유를 보여주는 플레이오프였다.
주장 ‘클리드’ 김태민의 기복, ‘제카’ 김건우의 좁아진 챔프폭은 분명 한화생명e스포츠에게 재정비의 목소리를 내는 대목이었다. 시즌은 길고, 이전 시즌에 비해 성과는 뚜렷했지만, 같은 문제를 시즌 내내 안고 플레이오프로 그대로 돌입했던 건 결국 젠지와 KT를 연이어 만나면서 큰 약점으로 노출되는 부분이었다.
(출처: LCK)
상대적으로 디플러스 기아의 압승을 전망했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찍어누르며 3:1 완승을 가져왔던 짜릿함은 파괴밖에 모르는 중전차의 묵직함을 바탕으로 봄날의 돌풍을 이끌 한화생명e스포츠의 모습을 예고한 듯 했다.
하지만 젠지, KT 전에서 연이어 터진 스노우볼의 취약성, 갑작스레 나타난 선수들의 저점 문제는 한화생명e스포츠의 폼이 전반적으로 평균 아래로 내려올 때 어디까지 걱정의 수위를 높여야 하는지의 고민을 깊게 했고, 결국 조율과 재정비라는 숙제를 떠안고 무대를 퇴장했다. 다시 정비창으로 들어선 파괴전차에게 플레이오프가 떠안긴 숙제 분량이 많다는 것은 성적보다 더 큰 걱정거리다.
앞서 언급한 클리드와 제카의 문제 뿐만 아니라 시즌이 흐를수록 ‘바이퍼’ 박도현의 캐리 의존도에 너무 치우쳤던 팀 컬러 역시 재조정이 필요해 보인다. 바텀 라이너가 기본적으로 한타와 게임 흐름 모두를 캐리하는 포지션이라지만, 한화생명e스포츠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밸런스가 깨진 강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특히 PO 2라운드에서 ‘페이즈’ 김수환과 ‘딜라이트’ 유환중의 젠지 바텀 듀오를 상대로 무기력하게 주도권을 내주던 한화생명의 바텀 듀오는 MSI~서머 시즌에 이르는 오랜 휴식기동안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노력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잠시 쉼은 있어도, 전차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출처: LCK)
# 슬플 애(哀): 디플러스 기아 & 리브 샌드박스 - 이렇게 무너지기엔 무언가 아쉬웠던 봄
D/F 논쟁으로 유명한 핵심 소환사 스킬 점멸(Flash)은 순간적으로 앞으로 도약하는 스킬이다. 번쩍하는 사이에 바로 앞은 물론 벽도 넘는 등 워낙 유용성이 많기에 <롤>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디플러스 기아와 리브 샌드박스의 플레이오프는 분명 도약의 전기였다. 디플러스 기아에게는 주춤했던 스플릿 1라운드와 달리, 반등의 2라운드를 맞이하며 플레이오프의 기대감을 높였고, 반대로 리브 샌드박스는 사막의 모래 폭풍이라는 수식어처럼 1라운드를 그야말로 모래로 잠식하는 돌풍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스플릿 2라운드에서 벌어놓았던 수확물을 모두 잃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기도 했다. 양팀의 봄은 지킬과 하이드를 방불케 할 만큼 극적이었다. 기대했던 슬롯은 아니었지만 절치부심한다면 두 팀 다 상위라운드로 치고 올라갈 저력이 분명했던 팀이었다.
모든 것은 한낱 봄날의 꿈으로 허망하게 흩어졌다. 잘못 누른 점멸처럼 눈 깜빡할 새에 사라져버렸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불안한 탑 라인의 불안함을 바텀 라인의 안정감으로 묵직하게 버텨주던 디플러스 기아는 한화생명e스포츠를 만나 시즌 내내 발목을 잡던 조급함이 바텀 라인에서까지 터지면서 봄날의 레이스를 끝내야 했다.
(출처: LCK)
리브 샌드박스는 중심을 잡아야 했던 ‘클로저’ 이주현의 챔프폭 문제가 결국 스플릿 2라운드부터 크게 부각되더니 플레이오프까지 팀의 큰 고민거리로 남게 됐다. 중심이 흔들리니, 흡사 어린 패기로 중무장해 공격적인 정글러의 전통을 이을 재목으로 꼽히던 ‘윌러’ 김정현의 저돌성도 어느덧 퇴색되어 버리고 말았다.
분명 이렇게 무너지기엔 너무 아쉽고 짧은 봄이었다. 눈물을 뒤로하며 여름날의 뜨거움으로 한 발 더 빠르게 투신할 수 있다는 장점을 안고, 두 팀 모두 더 강인하게 봄날을 등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직 두 팀의 점멸 쿨타임은 200여 초, 조급함을 버리고 초읽기에 신중한다면 다시 번쩍일 수 있는 도약의 시기는 다가온다.
(출처: LCK)
# 즐길 락(樂): T1, Gen.G - 봄날에는 역시 클래식
옛 유행가가 자주 귀에 익는 이유는 나름의 풍류와 정취가 뚜렷하기에 매력이 퇴색되지 않기 때문이다. 젠지와 T1, T1과 젠지의 패권 경쟁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질리지 않는 LCK 클래식을 보는 듯하다.
T1은 KT와의 PO 2라운드에서 그야말로 혈전 그 자체였던 통신사 더비를 치르고 올라왔고, 젠지는 체급의 젠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한화생명e스포츠를 꺾는 저력을 보여줬다. 양 팀의 분위기가 대비되는 가운데 열린 PO 3라운드는 가히 미리 보는 결승전이라는 표현이 손색이 없을 만큼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즌 내내 파격적 밴픽으로 상대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혼란한 틈을 타 상대를 압도하던 T1의 패턴은 고스란히 젠지의 카운터 전략으로 되돌아왔다. 오히려 젠지가 콩자반(콩콩이 자르반)의 탑 기용, 탑 말파이트, 유럽산 정글 올라프 등 T1의 밴픽을 쥐고 흔드는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치열함으로 한껏 갖추어 왔다. 오히려 T1이 중후반 스노우볼 전략을 준비해 오며 양 팀의 색깔은 흡사 서로의 물감을 서로에게 끼얹은 듯 상반된 모습을 보여 재미를 더했다.
밴픽의 틈을 공략하려 했던 젠지 (출처: LCK)
결과는 T1의 승리로 끝났지만, 두 팀 다 다채로운 색깔을 보였고,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색을 뒤바꿀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색채미가 다양한 팀임을 입증한 게임이었다. 결과야 어떻든 강팀의 좋은 경기를 보는 것만큼, 흥미롭고 즐거운 시간이 또 있을까? 플레이오프 단골손님인 두 팀은 플레이오프 다운 뜨거움으로 팬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비록 더 나은 성적을 갖고 집으로 돌아갈 팀은 오직 한 팀이지만, 두 팀의 진한 클래식은 봄날의 풍류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음악이었다.
T1의 급행열차는 종합운동장역에 미리 선착했다 (출처: L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