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인가, 탈출인가?
역대 최고의 열기를 보여줬던 MSI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 e스포츠 판에 큰 폭탄이 떨어졌다. 북미 역사상 최다 우승팀인 TSM(Team SoloMid)이 전격적인 시드권 매각과 타 리그로의 이적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핵폭탄은 자연히 로스터 발표로도 이어졌다. 서머 시즌은 그들에게 안중에 없는 시즌임을 천명하듯, 보기 좋게 수년간 안식을 보냈던 노장을 대거 영입하며 겨우내 슬롯만 채워내는 모습을 보였다.
한 때 북미 지역 최고 인기 팀이었던 TSM과 LCS의 시간은 점점 끝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 팬들은 그 이유를 궁금해한다. TSM의 말에 담겨 있는 뼈를 찾는 시간을 가져본다. /장태영(Beliar) 필자, 편집=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본 콘텐츠는 디스이즈게임과 오피지지의 협업으로 제작됐습니다.
(출처: TSM)
# TSM은 왜 북미를 등지려 하는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북미의 시장성과 경쟁력이 핵심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TSM의 구단주 ‘레지날드’ 앤디 딘이 지난 4월 2일 남긴 트위터에서 시장성에 대한 이유를 더듬어 볼 수 있다. “TSM is committed to esports"(TSM은 e스포츠에 전념합니다)로 서두를 뗀 레지날드는 2023년 말 <카운터 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이하 글옵) e스포츠 시장에 TSM이 투자할 것임을 천명하며, TSM 창단 사상 가장 큰 투자 규모임을 강조했다.
흥미로운 건 이미 6년 전, TSM은 <글옵>에서 손 뗀 전례가 있다는 점이다. 아직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라이엇 게임즈의 <발로란트> e스포츠와 비교해 보더라도 뷰어십의 피크 포인트(144만 뷰)는 여전히 <글옵>의 우위긴 하다(152만 뷰). 상금 규모만 놓고 보면 현재까지 진행된 리그 기준으로, <롤>과 <발로란트>를 합친 수준을 훨씬 웃도는 625만 달러 수준이기에 시장성은 <글옵>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줄 법도 하다.
여기에 핵심적인 문장이 뒤에 따라 붙는다. “TSM은 항상 어떤 e스포츠 생태계가 투자하기에 가장 좋은 지 평가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게임의 진퇴를 고민할 것입니다"(TSM is always evaluating what esports ecosystems are best to invest in and will continue to enter & exit games). 이 말인 즉슨, TSM이라는 클럽을 대표하는 종목인 <롤> 역시 그들의 고민 거리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발언이라 볼 수 있다.
(출처: 트위터)
팬들 역시 TSM이 간접적으로나마 LCS를 떠나겠다는 발언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며 "만우절 거짓말이지, 그렇지?"(April's Foll, Right?)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돌고 돌아 눈덩이가 크게 굴러온 셈이다.
하지만 경쟁력의 측면에서는 의문 부호를 붙게 한다. 치고 올라오는 <발로란트>도, 매 국제전마다 뷰어십 기록을 경신하며 10년의 강자를 구가하고 있는 <롤>도 아닌 <글옵>이라는 점은 투자의 방향성에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게다가 TSM은 팀을 보유한 상황도 아니기에 이러한 투자는 경쟁력 확보와 더 큰 괴리감을 준다. 그렇다면 TSM은 가진 패, 즉 <롤>라는 종목 안에서 만족할 만한 경쟁력 역시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의미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TSM의 마지막 롤드컵 무대(2020년)가 0승 6패라는 치욕적인 결과를 맞이한 채 끝나버린 2020년이 마지막이라는 점은 그들의 결론이 약간의 타당성을 갖는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TSM의 사라져버린 국제 무대 경쟁력은 결국 더 나은 판으로의 이적을 꿈꾸게 만든 이유가 된 셈이다.
TSM의 마지막 롤드컵, 2020 롤드컵에서의 로스터 (출처: TSM)
# TSM의 탈출은 도망인가?
하지만 TSM은 명실상부한 북미의 최고 인기팀이자 최다 우승팀이다.
재창단이 점쳐지는 LPL이나 LEC로의 진입은 팀의 역사성을 저버리는 행동으로 비칠 여지가 크다. 사실 TSM의 탈출 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22년 LEC 소속 팀 '미스피츠'의 프랜차이즈 슬롯 매각 당시, TSM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TSM도 프랜차이즈 권리를 매각하고 LEC로 합류하려 했었다”는 폭로를 한 바 있다.
이유는 추측할 만하다. LEC가 72만 뷰에 달하는 최고점을 찍을 동안 LCS는 고작 38만 뷰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으며, 평균 시청자 수도 2배를 상회하는 수치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외적인 환경이 LEC가 보다 웃어주는 환경이었다면, 내적인 측면은 곪아 있는 TSM의 내부 사정 탓이었다.
TSM이 점차 자신들이 벌려놓은 e스포츠 분야의 과도한 투자 규모를 줄이고 싶어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일부분을 매각하길 희망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내 여러 ‘아이디어’ 중 하나라며 부정하였으나 LCS의 사업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을 TSM이 인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업성을 떨어뜨린 장본인 중 하나가 TSM이라는 점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당장 2023년 스프링 시즌의 라인업만 보더라도 TSM이 컨텐더를 향한 열망이 있어 보인다는 주장을 내세우기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전성기가 훌쩍 지난 탑 라이너 ‘솔로’ 콜린 어니스트와 경쟁력을 소폭 상실한 ‘메이플’ 황이탕은 둘째 치고, 지도력 자체에 의구심이 따르는 ‘차위’ 웡싱레이 감독을 유임한 건 크나큰 패착이었다.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가 누군지 찾기는 어렵지만, 팀을 망치는 범인은 너무 많아 더 찾기 어려운 총체적 난국의 라인업이 과연 경쟁력을 운운할 팀이 맞는 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TSM의 2023 스프링 시즌 로스터 (출처: TSM)
경쟁력을 표방하는 TSM의 방조적 태도도 이번 행동에 도망이라는 명분을 심기에 알맞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29일 자로 LCS 선수협회(LCSPA)가 파업을 결의한 핵심적인 이유인 ‘NACL(LCS의 2부 리그 격)’의 경쟁력 상실에 TSM 역시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NACL과 같은 2부 성격의 리그는 LCK나 LPL도 운영하고 있으며, LEC는 지역 단위 리그로 더 광범위하게 설정해 오히려 유럽 전역의 <롤> e스포츠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 NACL과 같은 하위 리그를 축소하는 데에 1부 리그 팀들이 대거 동조한다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출처: LCS PA)
심지어 리그 경쟁력이 떨어졌다며 LCS 탈단을 감행하고 있는 TSM마저 이탈하는 건 아이러니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 팀이 LCS의 리딩 클럽으로서의 자부심을 얼마나 갖고 있었는지마저 의심케 하는 행보다. 선수들이 먼저 경쟁을 찾는 리그에서 경쟁력이 없다는 리딩 클럽의 불만은 TSM의 도망치는 발걸음에 힘은 커녕 야유를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고 있다.
TSM은 서머 시즌을 앞두고, 정글러 ‘부기’ 이성엽과 서포터 ‘차임’ 조나단 폼피니오를 제외한 모든 선수를 방출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우는 데에 95년생 원거리 딜러(와일드터틀)와 탑 라이너(하운처)를 활용했고,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루비’ 이솔민을 미드라이너로 영입했다.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발표된 서머 시즌 로스터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이미 팬들은 NBA에서 주로 활용되는 밈을 활용해 “중국어 배울 준비나 해라”라며 비아냥대거나, “10위에 안착, 의심할 여지가 없다"(LCS는 10팀으로 운영된다)는 식의 조롱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손가락질은 결국 TSM의 로스터 구성이 소위 ‘한 시즌 때우기’를 위한다는 점을 팬들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 TSM의 탈출은 도약이라 할 수 있는가?
이미 TSM과 레지날드의 머릿속에는 LCS 소속으로서 가질 다음 시즌이 사실상 없어 보인다.
LCS와의 오랜 동행이 끝을 향해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LEC나 LPL로의 합류(LCK 합류 역시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배제할 수 없는 카드라고는 하지만)는 TSM이 상상하는 장밋빛 미래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LEC는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데다가, 이미 한 뿌리나 다름없던 두 리그였기에 합류 자체는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LEC로의 합류가 TSM의 내부 경쟁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데에 얼마나 일조할 것인가의 물음에는 선뜻 답을 내리기 어렵다.
LPL로의 합류 역시 이러한 물음표를 가중시킨다. 현재 17개 팀으로 운영 중인 LPL 리그의 구조 상 신규 시드권을 구매해 합류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MSI 결승에서 맞붙은 JDG, BLG를 비롯해 TES, EDG, RNG, IG, LGD, WE 등 숱한 강팀이 즐비한 가운데에서 신생팀이 걸출한 성과를 낼 것이라는 기대감은 현저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결국 더 나은 리그로 향할 것이라는 풍운은 되레 몇 년 간의 담금질이 뒤따를 가능성만 높이는 행보로 비질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오히려 자국 경쟁력이 뒷받침된 상황에서의 탈단과 합류라면 LEC와 LPL, 양 쪽 리그 모두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결국 현 상황에서 TSM의 미래를 예견하는 데에는 그리 밝은 전망을 낼 수 없을 것이지만, 도약을 바라는 TSM의 심정과 녹록치 않은 현실 사이의 괴리는 라이엇이 내놓은 300만 달러(LCS+NACL 운영 보조금, 약 39억 원)로도 채울 수 없는 간극인 듯 하다.
(출처: 트위터)
# 도약과 도망 이전에 신의를 생각하다
롤드컵을 위한 성과, 더 나은 경쟁력을 위한 도약도 좋다. 팀을 위한 이기적이지만 필요한 선택이다. 이 모든 선택이 조금 더 팬과 동업자로서의 다른 LCS 팀들을 위한 이타적인 도약이었다면 어땠을까?
TSM이 서머 시즌 행보에서 보여주는 당당함은 어쩌면 LCS에 만족하지 않는 모든 팀들에게 LCS에 만족하지 않으면 떠나도 좋다는 면죄부를 줄 지도 모른다.
리버풀 출신 프로 축구 선수, 마이클 오언은 생애 첫 우승 트로피를 라이벌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들어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If you can’t beat them, join them), “매 경기 수준낮은 팀에서 뛰는 것보다 최고의 팀에서 종종 뛰는 게 더 좋았다”. 팬들은 오언의 우승 소감을 들으며 손가락질했다.
높은 수준의 리그를 찾아 떠나는 TSM의 여정이 마냥 박수갈채를 받을 수 없는 이유다. 결국 팬과 고향을 등진 채 외딴 곳으로 떠나는 프랜차이즈의 숙명이지 않을까?
물론 팬은 다시 생긴다. 새로이 자리잡은 터에서 내는 성과는 자연히 유럽 또는 중국의 현지인들을 동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쌓아온 명성과 평판, 신뢰는 무너진 모래탑 위에서 다시 쌓아 올려야 할 숙제로 남게 된다. 돈으로 성과는 살 수 있지만, 역사와 신뢰를 살 수는 없다. 실망한 LCS와 TSM의 팬들이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이유, 돈이 모든 걸 대신할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되새기게 한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