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에 계신 분들도 기자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취재를 하다 보면 자주 드는 생각입니다. 매일매일 이슈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잠시 차 한 잔, 술 한 잔 기울이며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멋진 게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분들을 만나, 뜨거운 현안들로 담소를 나눠보는 코너 '인디 한 잔'입니다.
지난 두 달 사이 <나혼렙>, <명조>, <쿠키런: 모험의 탑>, <젠레스 존 제로>까지 국내외 기대작들이 연달아 나오며 모바일게임 시장이 조금이나마 활력과 다양성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의 모습은 <버섯커 키우기>, <라스트 워>로 대표되는 경쟁지향형 캐주얼 게임과 국산 리니지라이크 게임들의 매출 순위 경쟁판이었죠.
"과열된 마케팅 경쟁 때문에 거대 자본 없이는 국내 모바일 시장에서 성공하기 더 어려워졌다", "국산 게임이라도 해외 진출을 먼저 해야 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곤 했습니다. 결국 다시 PC(스팀), 콘솔로 돌아가 유료 패키지 게임을 개발하는 일명 '모바일 엑소더스' 현상이 펼쳐지고 있죠. <P의 거짓>, <데이브 더 다이버>, <스텔라 블레이드>의 흥행 이전부터 이런 흐름을 일찍 읽은 개발사들도 있었습니다.
정만손 대표를 포함한 트라이펄게임즈의 코파운더들은 20년 넘는 개발 경력을 가진 게임 업계 베테랑입니다. 이들이 대기업에서의 삶을 떠나 과감하게 인디 창업을 꿈꿨던 이유 중 하나는 "재미"로 대표되는 초심 때문입니다. "게임의 핵심은 재미인데, 왜 BM부터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됐는가"라는 일종의 "회의감"이 들었다고 하죠. 이들이 출사표를 던진 곳도 PC 콘솔 진영이었습니다.
정만손 대표가 트라이펄게임즈에서 만들고 있는 게임은 <V.E.D.A>(이하 베다)라는 소울라이크 게임입니다. 최근 <엘든 링> DLC 난이도에 대한 갑론을박이 뜨거웠던 장르지만, <베다>의 방향성은 조금 다릅니다. 장르 특유의 "손맛"은 살리면서도, 기존 작품들보다 쉽게 입문할 수 있는 난이도를 지향하고 있죠. 트라이펄게임즈의 도전을 포함해, 위기를 극복해가고 있는 업계 전반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눠봤습니다.
정만손 대표는 조이온, 웹젠 등의 회사에서 <거상>, <임진록 2+ 조선의 반격>, <썬>, <뮤 레전드>의 운영, 기획, PM, PD로 지낸 이력이 있습니다. "재미"를 찾기 위해 다니던 회사를 나와, 코어 멤버들과 팀을 이뤄 작은 회사를 옮겨다닌 시기도 있었다고 하죠. 그러던 때에 만난 게임이 <리틀 데빌 인사이드>였습니다. 2년 가까이 이들과 함께 작업하며 콘솔 게임 시장에 대한 가능성과 만드는 재미를 되새기게 됐죠.
그렇게 '콘솔' 게임을 만들기 위해 설립한 회사가 트라이펄게임즈였습니다. 첫 프로젝트는 고도 엔진으로 만든 복셀 그래픽의 뱀서라이크 게임 <기간틱 소드>였습니다. 지금은 홀드되어 있는 프로젝트지만, <기간틱 소드> 개발 과정은, 정만손 대표를 포함한 멤버들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언리얼 2.5부터 다뤄온, 액션 게임에 익숙한 이들이 눈을 돌린 곳은 '소울라이크'였죠.
프롬 소프트웨어의 <엘든 링>은 이전까지 마니아들의 장르였던 소울라이크를 대중화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2,500만 명이 즐긴 타이틀이지만, 어려운 난이도는 매력인 동시에, 허들이기도 했습니다. 트라이펄게임즈의 <베다>는 소울라이크 '트레이닝' 게임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소울의 재미를 더 쉽게 느낄 수 있게 해보자는 것을 목표로, 보스 전투부터 프로토타입으로 만든 게 <베다>의 시작이었죠.
소울라이크에서 직접 플레이하는 유저만 느낄 수 있는 "손맛"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정만손 대표는, 보스전 빌드로 게임쇼에 나가 현장 유저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상작으로 꼽히기도 하고, 긍정적인 유저 피드백을 받으며 지금의 형태까지 개발을 이어올 수 있게 됐죠.
<베다>는 방구석인디게임쇼 2023 '스토브인디 특별상', 지스타 인디 어워드 '최고 기대작상', 경기게임오디션 17회 탑3 겸 플레이스테이션 픽, 인디크래프트 2024 대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게임쇼에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 도쿄게임쇼 2023 참가 당시 인게임 티저 영상입니다.
정만손 대표는 대만 인디 개발사의 <티메시아>와 콜드 시메트리의 <모탈 셸>이 꾸준히 판매 기록을 내는 것을 보며 소울라이크 시장에 인디도 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는 2D 소울라이크는 종종 나오고 있지만, 3D 소울라이크 게임이 적은 점을, 두 게임의 인기 요인으로 분석했습니다.
소울라이크의 대중화를 이끈 <엘든 링> 본편은 2,500만 장이나 판매됐지만, 전체 유저 중 60% 이상이 보스 '모그'를 물리치지 못해 DLC 플레이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80%에 가까운 <엘든 링> 유저가 엔딩을 보지 못했죠. 최근 발매된 DLC는 "너무 어렵다", "불합리하게 느껴진다"는 평을 면치 못했습니다.
정만손 대표 또한 <엘든 링> DLC에 대한 유저들의 반응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엘든 링> 본편이, 만약 <다크 소울 4>로 나왔다면, 필연적으로 <다크 소울 3>보다 어려운 난도의 보스, 패턴을 등장시킬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엘든 링> DLC도 <엘든 링> 엔딩을 본 분들이 즐겨야 하니 난도를 높일 수 밖에 없어, 어려움을 겪는 분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트라이펄게임즈의 <베다>가 더 눈에 띄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만손 대표는 소울라이크 장르답게 <베다>도 어느 정도의 도전적인 요소는 갖추고 있지만, <엘든 링> 본편보다 쉬운 난이도를 목표로 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다크 소울>이나 <엘든 링>의 묵직한 전투를 따라가면서도, 패링의 타이밍은 조금 더 여유 있게 했으며, 패링, 회피 등 다양한 시스템으로 공략이 가능하게 밸런싱에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지구온난화로 고대 바이러스가 부활하며, 인류의 90%가 사망한 근미래, 변이 생명체를 피해 인류는 지하로 벙커에 들어왔습니다. 지상의 공간을 되찾기 위해 훈련용 AI 시뮬레이터 '베다'로 요원을 길러내고 있죠. 기억이 없는 플레이어는 어머니처럼 자상한 '베다'와 훈련을 방해하는 외부의 해커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며, 기억을 되찾는 여정을 떠납니다.
▲ <베다>의 핵심 메커니즘이 소개된 영상입니다.
소울라이크에 '로그라이트'를 접목한 것이 <베다>의 가장 큰 차별점 중 하나입니다. 진행 과정 중에 아이템과 장비를 획득하게 되는데, 사망하면 로비로 이동하고 장비는 소멸되는 방식이죠. 여러 장비를 활용해볼 수 있는 동시에, 영구 성장 요소를 통해 재도전의 부담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맵, 몬스터와 아이템 배치, 숨겨진 공간이 랜덤하게 생성되어 다회차 도전의 재미도 강조됐습니다.
'벙커'라는 설정답게 좁은 공간도 종종 등장하는데, 넓게 휘두르는 무기는 벽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장소에 따라 찌르는 무기가 유용할 때도 있고, 여러 적을 상대할 때는 공격 범위가 넓은 무기가 유리하기도 하죠. 레이저 트랩과 같은 환경 요소로 적을 상대할 수 있는 구간도 있습니다.
길에서 헤매는 구간을 줄이며 전투 요소에 집중한 것 또한 <베다>의 강점입니다. <다크 소울>, <엘든 링>과 달리 오픈월드를 선택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전투의 재미를 더 집약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었죠. 트라이펄게임즈가 개발 중인 '프로젝트 B'는 <베다>의 세계관에서 더욱 확장된 게임으로, 프로젝트 B에서는 원거리 무기 도입 및 오픈월드에 도전할 의향도 있다고 합니다.
앞서 다른 게임쇼 현장에서 <베다>를 플레이해보셨던 분들은, 올해 남아 있는 다른 게임쇼에서 새로운 빌드를 꼭 플레이해보시길 권장합니다.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 기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묵직한 동작을 반영하는 6등신 디자인이었던 반면, 앞으로의 빌드에서 만나볼 수 있는 캐릭터는 8등신으로 그 모습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또한, 로그라이트 요소 안에서도 방어구나 아이템을 얻을 때, 인벤토리에서 고민하고 교체하는 방식이 아닌, 현재 착용 장비와 교체할 것인지 여부를 묻는 방식으로 바꿔, 빠른 플레이를 지향했다고 합니다. 방어구를 개별 파츠가 아닌 하나의 방어구로 통일한 것도 역시 빠른 진행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네요.
<P의 거짓>, <데이브 더 다이버>, <스텔라 블레이드> 등 국산 콘솔 게임이 흥행하면서, PC, 콘솔 시장에 도전하는 국내 인디 개발사들에겐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2년 전엔, <베다> 게임 소개 문서가 80페이지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PC 콘솔 시장에 대한 설명부터, 소울라이크 장르에 대한 설명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죠. "대미지 수치가 왜 표시되지 않느냐"는 장르 이해도가 부족한 질문을 받을 때도 있었고, "이게 인디게임이 맞느냐"는 질문이 돌아올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력직 개발자들의 3D 액션 게임을 인디게임의 범주로 쉽사리 받아 들여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2년 사이 그 인식은 조금 바뀐 것 같습니다. <P의 거짓>이 국산 소울라이크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트라이펄게임즈가 꾸준히 게임쇼에 참가하며 <베다>의 인지도를 높인 덕분에, 현재는 게임 소개 문서가 18페이지로 압축됐다고 합니다.
기자와 정만손 대표는 "인디 정신, 도전 정신"이 곧 인디게임이라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정만손 대표는 <하데스>를 만든 슈퍼자이언트 게임즈의 예시를 들었습니다. 인원은 적지만 자금이 부족한 회사는 아니었던 그들도 '인디'로 분류되었다는 것이죠. 콘솔 불모지에서 소울라이크를 로그라이트와 결합한 트라이펄게임즈의 시도 또한, 인디 개발사 입장에선 매우 과감한 도전의 과정이었다고 합니다.
▲ 2022년 7월 업로드된 <베다> 인게임 티저 영상입니다.
최근 넷마블 <나 혼자만 레벨업: 어라이즈>가 글로벌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나혼렙>이 주인공 성진우만 레벨업을 하는 설정이었다면, 정반대의 설정을 가진 작품이 있습니다. 노블코믹스 <레벨업 못하는 플레이어>는 세계를 구할 플레이어로 각성했지만 주인공이 레벨업을 하지 못해, 레벨 1의 상태로 적을 상대하는 내용을 그려 많은 인기를 끈 작품이죠.
<레벨업 못하는 플레이어> 또한 PC, 콘솔 액션 게임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인데, 이 게임을 만드는 개발사가 바로 트라이펄게임즈입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경력직 인디 트라이펄게임즈의 멤버들이 PC 콘솔 액션 게임에 강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나혼렙>이 모바일게임으로 출시된 것과는 대조적이기 때문에, 이 게임은 어떤 신선한 액션을 선보일지 기대됩니다.
또한 트라이펄게임즈는 게임 <레벨업 못하는 플레이어>에서 "오리지널 스토리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 밝혔습니다. 기존 IP를 알던 유저들이, 스토리라인과 설정을 모두 알고 있어 IP 기반 게임을 오래 할 필요성을 못 느끼던 지점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국내에서도 PC, 콘솔 게임에 도전하는 인디 개발사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경력직 인디 트라이펄게임즈의 행보처럼, '게임성'과 '재미'로 승부할 수 있는 게임을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