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주목해야 할 베트남 게임씬
▶20년 묵은 게임 '실크로드 온라인', 베트남에서 대박 난 사연
2005년 나온 MMORPG가 지난해 7월 베트남에서 부활했다. ‘부활’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실크로드 온라인> 개발사 위메이드맥스는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베트남 퍼블리셔로부터 한푼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부터 갑자기 베트남에서 매달 10억~20억 원씩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덕분에 위메이드맥스는 2023년 3분기는 10여 년만에 최대 해외 매출을 기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 새옹지마 같은 현상은 한국 게임사에게 어떤 시그널을 보내는 걸까? /호치민(베트남) = 디스이즈게임 시몬(임상훈 기자)
2007년 호치민 PC방에서 찍은 한 모니터 바탕화면. 당시 인기를 얻던 <실크로드 온라인>과 함께,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를 얻고 있던 중국 2D 무협 MMORPG <무림전기>(Swordman online)와 <최초신화>(First Myth) 아이콘이 깔려 있었다.
2000년 베트남 게임 시장은 한국 MMORPG의 무덤이었다. <뮤>, <라그나로크>, <길드워>, <구룡쟁패>, <아틀란티카> 등 내로라하는 게임들이 연달아 실패했다. 온라인게임을 늦게 접했고, 경쟁의식이 강한 베트남 유저들은 중국 유저들처럼 ‘오토’를 자연스럽게 활용했다. PC방 모니터 바탕화면에는 게임사가 지원한 <무림전기> ‘오토’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VTC인터콤이 서비스한 <오디션>(06년), <크로스파이어>(08년), <피파 온라인2>(08년) 등은 성공했지만, 모두 캐주얼 장르였다. MMORPG 시장은 오토를 지원하고, 빠른 레벨업이 가능한, 2D 그래픽 무협풍의 중국 게임이 점령해갔다. 해외 시장이 대부분 베트남에 한정됐던 당시 중국 게임은 가격은 낮았지만 로컬라이제이션 등 지원은 빵빵했다. <실크로드 온라인>은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중국 MMORPG과 경쟁해야 했다.
하지만, 더 큰 고난이 밀려오고 있었다. 16세기 신항로 개척 시대(대항해시대) 이후 대서양 무역이 확대되며 실크로드의 위상이 위축됐듯, 2010년대 초반 모바일 패러다임 시프트 이후 PC 온라인게임도 커다란 위기를 겪었다. <실크로드 온라인>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베트남 매출이 뚝뚝 떨어졌다. 2010년대 후반 한 달 수익 배분금으로 한국에 송금되는 금액이 200만~300만 원 수준으로 확 줄었다.
설상가상, 더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위메이드맥스는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인 2018년 말부터 베트남 퍼블리셔에게서 수익 배분을 받지 못했다. 마침 VDC-NET2TE와 재계약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위메이드맥스는 계약금과 함께 미수금을 줘야 재계약하겠다고 전했다. 베트남 퍼블리셔는 추가 금액 없는 연장계약을 원했다.
위메이드맥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새로운 퍼블리셔를 찾는 게 나았다. 미수금을 보내주면 깔끔하게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했다. VDC-NET2TE는 연락두절로 대응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절이었다. 베트남에 직접 날아가기도, 적극적으로 사람을 만나 문제를 해소하기도 어려웠다.
계약은 종료됐고 연락은 두절됐지만, 베트남에서 <실크로드 온라인>은 계속 서비스되고 있었다. 여러 시도 끝에 연락이 닿았지만, “미수금을 마련 중”이라는 이야기를 한 며칠 뒤 다시 연락이 두절됐다. 분노가 누적됐다. 위메이드맥스는 가능한 빨리 베트남 서버를 내리게 만들고 싶었다. VTC인터콤과 계약하게 된 이유도 ‘수익’보다는 ‘응징’이었다. VTC인터콤이 정보통신부 산하 국영기업이어서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위메이드맥스는 2023년 봄, VTC인터콤과 <실크로드 온라인> 베트남 퍼블리싱 계약을 했다. 비슷한 시기 VDC-NET2TE는 게임 사업을 접었다. 과거 수익 배분 규모를 알고 있던 터라 위메이드맥스는 베트남 매출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계약의 카운터파트였던 VTC온라인 이용득 부사장 생각은 달랐다. 베트남에서는 <실크로드 온라인> 사설서버 60여 개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60개가 넘는 사설서버는 게임의 인지도를 증명했다. 마케팅 비용을 쓸 필요가 없었다. 정보통신부 산하 국영기업 VTC인터콤은 사설서버를 단속할 라인이 확실히 있는 회사다.
2023년 7월 25일 VTC인터콤은 <실크로드 온라인> 베트남 서비스를 시작했다. 기존 유저 DB가 없던 터라 맨땅에서 시작했다. 모든 유저가 1레벨부터 다시 키워야하야 하는, 쉽지 않은 재론칭이었다. 하지만, 위메이드맥스의 예상과 달라, VTC인터콤의 기대처럼 첫달부터 유저들이 몰려들었다. 깜짝 놀랄 성과가 나타났다. 이는 위메이드맥스의 해외 매출 변화(이하 위메이드맥스 감사보고서 내용)로도 확인할 수 있다.
위메이드맥스의 PC 온라인게임 매출은 <실크로드 온라인>이 대부분이다. <실크로드 온라인>의 해외 서비스는 중국, 터키, 글로벌서버 세 축이었다. 2023년 3분기 베트남이 추가됐고, 그 덕분에 2021년 35억 원, 2022년 27억 원에 머물던 위메이드맥스의 PC 온라인게임 해외 매출이 23년 3분기에 약 50억 원으로 크게 점프했다. 3분기 매출이 전년 연간 매출의 2배 가까이 나온 것이다. 10여 만에 최대 분기 매출이었다.
국내 매출보다 해외 매출이 이익률이 높다. 마케팅이나 서비스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모바일게임보다 온라인게임이 이익률이 높다. 플랫폼 수수료가 없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의 성과 덕분에 위메이드맥스 영업수익에서 <실크로드 온라인> 비중이 급격히 올라갔다. 2023년 상반기 13억 원으로 3.9%에 불과했던 영업수익 비중이 2024년 1분기 45억 원으로 26%까지 수직 상승했다.
<실크로드 온라인>은 어떻게 부활했을까? VTC온라인 이용득 부사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1) 코로나 격리
사람은 시대를 이길 수는 없다. 코로나 팬데믹은 많은 걸 바꿔놨다. 모바일에 밀렸던 PC 온라인게임의 인기가 부활한 것도 그중 하나다. 집에 머물러야 했던 베트남 게이머들 중 일부는 과거 PC로 즐겼던 게임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이용득 부사장은 “<크로스파이어>, <오디셔>, <피파온라인 2> 등 모든 온라인게임의 매출이 코로나 기간 크게 올랐다. 특히 <크로스파이어>는 100% 수준으로 상승세가 높았다. 사설서버를 포함한 <실크로드 온라인>의 인기도 그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2) 2000년대 후반의 레거시
레트로 시대지만, 아무 콘텐츠나 인기를 얻는 것은 아니다. <실크로드 온라인>은 베트남에서 인기를 얻었던 거의 유일한 한국 MMORPG였다. (<뮤>는 사설서버로 인기.)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중국인들처럼 <삼국지>와 김용의 무협지를 읽는다. 중국 MMORPG가 잘 됐던 주요 이유 중 하나다. 실크로드 안에는 중국, 유럽, 이슬람 문명과, 각 문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늦은 스펙과 함께 <실크로드 온라인>이 2000년대 중반 여러 지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다.
3) 중년이 된 왕년의 MMORPG 게이머
베트남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하게 경제가 성장한 국가다. 동남아 바트경제권의 패권국 태국이 위협을 느낄 정도다. 그래서 두 나라가 축구를 하면 그렇게 난리다. 2000년대 이후 경제 성장과 함께 베트남의 중산층도 늘어났다. 왕년의 온라인게임 유저들은 ‘어른’이 됐다. 지갑이 두툼해졌다.
<실크로드 온라인>은 초기 MMORPG답게 레벨업 위주의 단순한 성장 구조를 가지고 있다. 피지컬이 필요한 소울류 게임이나 탄탄한 스토리나 퀘스트를 선호하는 유저도 있지만, 성장 위주의 익숙한 게임을 편안하게 즐기는 유저도 존재한다. 이런 흐름은 우리나라 리니지라이크 유저도 비슷하다.
4) 국영기업 VTC인터콤의 파워
사설서버 정리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운영자들이 꽁꽁 숨어있어 잡기 어렵다. 대신 서버 제공 회사, 홍보 채널, 결제 회사 등을 사설서버의 밸류체인을 하나하나 타격해야 한다. 사설 서버 운영자는 일반적으로 IDC 등에 서버를 놓고, 페이스북 등에서 홍보를 해 유저를 모은 뒤, 결제 솔루션을 통해 돈을 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회사들은 게임사 요청에 우호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당장 매출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요청 주체가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명백하게 확인하기도 어렵다. 설혹 단속했다 쳐도 사설서버 운영자는 또 다른 서버를 연다. 돈 내고 여는 건 쉬운데, 서류 내고 단속하는 건 번거롭다. 해당 게임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증명하고, 서버 단속에 대한 위임장 등을 제출해야 한다.
정부 권위가 센 국가에서 공권력이 나선다면 그나마 좀 수월할 것이다. <실크로드 온라인>을 퍼블리싱하는 VTC인터콤은 정통부 산하 국영기업이다. 사설서버는 자신들의 매출과 연결돼 있다. 가장 큰 사설서버 5개는 문을 닫았다.
5) 경쟁 없는 시장
<실크로드 온라인>의 약점은 신규 유저 확장력은 크지 않다는 점이다. 사설서버에서 게임을 하고 있거나, 과거 <실크로드 온라인>을 경험해본 유저로 범위가 좁혀진다. 하지만, PC MMORPG가 귀해진 시대다. 새로운 게임이 공급될 확률도 거의 없다. 독과점 사업자에 가깝다.
사설서버 단속 성과와 주기적인 게임 업데이트는 계속 기존 <실크로드 온라인> 유저를 호출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은 모바일게임에 비해 지속적인 매출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말이 있다. 위메이드맥스는 베트남 게임개발사 고수온라인에게 <실크로드 모바일> 동남아 판권을 줬다. 올해 6월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10년 전 웹젠을 떠오르게 한다. 중국 천마시공에서 개발한 <뮤 오리진>(전민기적)은 중국과 한국에서 대박이 났다.
최근 들어 글로벌 시장에서 <실크로드 온라인> 사설서버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 기존에 비해 3~4배 수준이다. 스팀과 에픽게임즈 스토어에도 사설서버가 버젓이 ‘Coming soon’하며 페이지를 만들 정도다. <실크로드 모바일> 사전예약 사이트가 <실크로드 온라인> 인지도가 높은 지역에 꾸준히 광고를 해서 ‘추억’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크로드 온라인>은 스펙이 가볍고, 다양한 문명을 커버하며, 퀘스트가 단순해서 글로벌 ‘롱테일’이 가능한 IP니까.
위메이드맥스 해외사업을 책임지는 오병훈 실장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설서버가 늘고 있는 것은 게임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설서버는 단속해나갈 것이고, 해외 퍼블리셔와 계약도 늘려나갈 예정이다. 이길형 대표(위메이드맥스)와 IP를 후려치는 식으로 계약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까지 반응은 좋다. 신규 계약 때마다 계약금을 조금씩 올리고 있는데, 다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 러시아 퍼블리셔와 계약했다. <실크로드 온라인 2> 공동제작에 관한 문의도 오고 있다.”
아마존닷컴 설립자 제프 베조스는 이런 말을 했다.
“10년 후 어떤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구태의연한 질문이다. 1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게 무엇이냐는 질문은 왜 하지 않는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 전략을 세우고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불확실하거나 경쟁이 치열한 큰 변화를 쫓느라 놓치고 있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지 않은지 살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베트남에서 성공한 <실크로드 온라인>은 그런 메시지를 전해주는 한 사례이지 않을까.
2000년대 성공했던 한국 온라인게임 중 다시 인기를 재현할 수 있는 타이틀이 나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