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게임쇼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유가 뭘까? 이미 출시된 작품에 팬심을 가지고 방문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숨은 옥석을 만나보고 싶어하는 사람 또한 많다. 기자의 경우 후자에 가깝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BIC(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행사에 긴 줄이 이어진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신작, 말 그대로 신선한 작품을 찾고 싶은 마음이리라.
BIC 출품작들은 몇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25세 이하 개발자들이 만든 게임에 주어지는 '루키' 부문이다. 교내 동아리, 연합 동아리 등의 모임에서 함께 게임을 만들거나,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개발을 했다고 한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게임을 만드는 과정이 고되지만 모두 즐거웠다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쟁쟁한 출품작들 사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험만으로도 들떠 보였다.
특히 올해는 취재 과정 중에 루키 부스가 아닌 곳에서도 루키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곤 했다. 학생들이 만든 게임이라고 믿기 힘들다거나, 업계의 미래가 기대된다는 등의 말이었다. 루키 타이틀을 달고 나온 55개 게임을 모두 다룰 순 없기에, 기자의 사심픽을 다섯 작품 소개하려 한다. BIC 현장에 온다면 꼭 한 번 이 부스들에 들려보시길 권장한다. /부산=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BIC 홈페이지를 비롯한 게임 소개란에는 # 표시와 함께 태그가 붙는다. 이 게임의 태그는 #장르없음, #???이다. 태그만 봐도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장르 구분을 넘나드는 작품이다.
<Grayed Game>의 이니셜을 딴 것으로 보이는 GG 스튜디오의 게임은 설정부터 독특하다. 잊혀진 게임들이 떨어지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따라가며 시작된다. <언더테일>이 연상되는 어드벤처 베이스부터 진행에 따라 비주얼노벨처럼 변하기도 하고, <팩맨>과 같은 형태로 진행되기도 한다. 잊혀진 게임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 게임들이 가지고 있던 의미를 되새기는 여정이다.
우연한 기회에 BIC 현장 밖의 사석에서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연합 동아리로 모여 디스코드와 오프라인 모임을 함께 활용하며 개발을 이어왔다고 하며, 프로젝트를 시작한 작년 9월 이후로 개발 일지도 꾸준히 올린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언더테일>이 되어보는 게 꿈이라고. <Grayed Game>은 현재 2챕터까지 개발된 상태로 정식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인 게임이다.
<도박묵시록 카이지> 같은 만화를 보셨는지 모르겠다. 게임 중에 가장 스릴 있고 재밌는 게임은 역시 인생을 건 게임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취의 경험만 놓고 보면 수험 생활은 굉장히 스릴 있는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바삭한소프트가 작년 11월 출시한 <수험생 키우기: 수능 시뮬레이션 게임>은 입시를 소재로 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는 주인공. 운동과 학업을 비롯한 여러 활동과 이벤트,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며 최고의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한다. 게임에선 실제로 과목별 등급도 주어지고, 합격 이후 가상의 학생증도 발급된다. 결과에 따라 수십개의 엔딩으로 이어지며 학생증을 모아 캐릭터를 강화하는 과정도 포함됐다.
실제 수험 생활이라면 돈 주고 하라고 해도 다시 안 하겠지만,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거듭나니 꽤나 매니악한 인기를 끌었다. 론칭 이후 26만 명의 유저가 게임을 즐겼고, B2C 부스 운영 중에는 이미 게임을 알던 유저들도 이곳에 들르곤 했다. 실제 52개 대학 2097개 학과에 합격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게임을 보며, 아이템 11~13강 만큼이나 누군가에겐 수험 생활도 짜릿한 도파민이 될 수 있겠구나-라고 다시금 생각해본다.
기자의 경우 BIC에 오기 전에도 스팀에서 이 게임을 눈여겨 본 기억이 있다. 청강대 학생들의 졸업 작품이지만, 귀엽고 깔끔한 그래픽과 시원시원한 액션까지 만듦새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스팀 리뷰 82개 중 96%가 긍정적인 '매우 긍정적' 게임으로, '냉동 액션'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날씨가 추웠던 지난 1월에 출시됐다. 그리고 어느덧 뜨거운 여름이 되어 오히려 계절에 더 어울리는 게임이 되어버렸다.
악동으로 유명한 얼음 예술가 '코나'가 눈토끼 '스노래빗'과 함께 인어를 조각상으로 만들기 위해 수도원에 난입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게임은, 귀여운 캐릭터와 멋진 액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할 만하다. 입에서 얼음이 나가는 토끼를 무기로 사용하고, 토끼는 망치의 형태로도 변한다. 적을 얼리며 싸우는 과정은 타격감 또한 뛰어나니, 스팀에서 무료로 플레이를 해보시는 걸 권장한다.
어느 날, 동생이 사라졌다. 남은 건 편지 한 장. 평소 같지 않게 휴대폰도 두고 나간 동생. 급한 마음에 방안을 뒤져보기 시작한다. 동생이 알면 화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니 휴대폰과 PC도 열어보게 된다. 메신저, 사진, 약통까지. 모든 단서들은 어제 동생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암시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단어 '마약'이 있다.
팀 아리아드네가 개발 중인 <Exit from NO EXIT>는 마약 청정 국가가 아니게 된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참고로 다른 루키 부스에서도 팀 보약소녀가 만든 <Wanna Get Lucky?>라는 마약을 소재로 한 게임이 또 있었을 정도로, 학생들 사이에선 이 이슈가 스쳐지나가는 소식이 아니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럴 만 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Exit from NO EXIT>에선 아주 가까운 인물과 공간들에서 마약과 관련된 흔적들이 등장하는데, 긴장감은 주면서도 큰 위화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포인트 앤 클릭 퍼즐로 진행되는 이 게임의 가장 큰 장점은 유치하지 않은 대본이었다. 사회적 메시지만 남긴 것이 아닌 플레이어가 몰입하고 따라갈 만한 정보 배치가 꽤 재밌었다.
가령, 인게임에서 조작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거의 모든 기능이 파편화된 정보들을 담고 있었다. 사진을 열어보고, 메시지와 프로필을 조회하고, 지도 앱도 열어보게 된다. 무엇이 클릭 가능한 요소인지 별도의 표시를 하지 않은 구성이 맨 처음엔 미완의 요소라고, 불편하다고 느꼈는데, 적응하고 나니 금세 알려주지 않는 정보를 찾아냈을 때의 성취로 이어졌다. 뭔가 막혔는가? 그럴싸하지 않은 것도 다 눌러보시라.
<소희>는 부산에 내려오기 전부터 BIC 페이지에서 눈 여겨 본 게임이다. 소개 페이지에선 일상적인 순간에서의 감정을 탐구하는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게임-이라고 표현했지만, 직접 플레이해보면 평범한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비극에 반쯤 발을 걸친 일상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우려나.
"흴 소, 바랄 희. 바라고 바란다는 뜻이다"라고 '소희'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다. 하지만 소희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관계를 특정해 언급하진 않겠지만, 게임은 불완전한 만남과 이별, 오해와 갈등을 계속해서 제시한다. 오히려 이 게임에서 '바라는 바'가 있는 인물은 소희의 주변 인물들에 가깝다. 소희는 그 '바람'을(동시에 과거와의 이별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을지 말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게임 페이지에서 스토리를 유추할 만한 요소를 단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자 또한 가급적 말을 아끼고자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플레이하는 편이 훨씬 몰입도가 높기 때문이다. 빅커넥터즈 리뷰를 포함해 27개나 리뷰가 달렸다. BIC 페이지 기준으로는 눈에 띄게 리뷰가 많은 편에 속한다. 한 리뷰에선 "전체적인 분위기가 공포스럽다"고 하던데, 일견 공감한다. 현실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건 때론 아픔이고 공포니까.
대학생 여섯 명이 모인 아네모네에서 졸업 작품으로 만든 <소희>에는 묘한 흡인력이 있었다. 조목조목 뜯어보면 아쉬운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의 삶의 궤적과 접점이 하나도 없더라도 이입에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터랙티브 요소 배치도 좋았고, 묘하게 느껴지는 긴장감 때문에 뻔하지 않은 이야기로 느껴지게 만드는 호흡도 좋았다. 소개만 보는 게 아닌 꼭 한 번 직접 플레이해보시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