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앤파이터>의 성장 시스템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22년 시작된 시즌 8 업데이트의 일환이었던 105레벨 에픽 장비의 ‘옵션 성장’ 시스템은 2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지난 5일 공식적으로 삭제됐다.
앞서 진행된 ‘DNF 디렉터 컨퍼런스(이하 DDC)’에서 박종민 총괄 디렉터는 이번 시즌에 대해 “문제가 너무 많았다”고 자평했다. 새로운 시즌 ‘중천’ 출시를 앞당기면서 성장 시스템을 급하게 종료한 점을 고려하면, 현재 문제의 상당수가 이 성장 시스템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성장 시스템은 유저들에게 어떤 경험을 남겼을까. 오는 1월 중천 업데이트를 앞둔 지금, 성장 시스템과 함께한 2년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2021년 '던파 페스티벌' 중 한 장면. 윤명진 전 총괄 디렉터의 말대로, 옵션 성장 시스템은 당시 기준으로는 혁신이었다.
시즌 8 당시 추가된 105레벨 장비는 여러 방면에서 기존 장비 체계와 확실히 달랐다. 에픽 장비의 옵션과 성능이 고정되어 있던 기존과 달리, 105레벨 에픽 장비는 성장을 통해 장비의 성능을 높일 수 있었고, 일부 장비(커스텀 에픽)의 경우 장비의 옵션도 무작위로 결정됐다.
이로 인해 캐릭터의 성장 방식도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얻기는 힘들지만 강력한 성능을 가진 에픽(또는 신화) 장비를 획득해 캐릭터를 성장시켰다면, 105레벨 이후부터는 에픽 장비 획득이 쉬워진 대신 이를 재료로 사용해 장비의 옵션 레벨을 높여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시즌 8 당시 추가된 옵션 성장 시스템. 장비 옵션이 4개로 나뉘어있으며, 각 옵션별로 레벨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옵션 성장 시스템은 2년간 수차례의 변화 과정을 거쳤다.
출시 초기에는 에픽 장비마다 4개의 옵션을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옵션을 가진 장비를 재료로 사용해야 각 옵션의 레벨 성장에 필요한 경험치를 최대치로 획득할 수 있었다. 이후 다른 옵션의 장비가 가진 경험치를 온전히 전송할 수 있는 ‘완전 성장’ 시스템이 추가되고, 불필요하게 4개로 나뉘어 있던 옵션을 하나로 통합됐으며, 올해 2월에는 새로운 옵션 성장 재료로 ‘경계의 파편’을 추가하는 등 최근까지도 꾸준한 개선이 진행됐다.
후술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그렇다면 이러한 성장 시스템이 가진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유저들이 “시간에 비례하는 확실한 성장 경험”을 장점으로 평가한다.
성장 시스템 도입 이전, 특히 신화 장비가 기승을 부렸던 시즌 7을 돌이켜보면 성장에 필요한 건 돈도, 시간도 아닌 운이었다. 가뜩이나 얻기도 힘든데 장비별 성능의 격차도 컸기 때문에 신화 장비 착용 여부에 따라 캐릭터의 성장 정도가 크게 달라졌고, 특정 신화 장비가 없으면 콘텐츠 참여가 불가능한 사례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신화 장비를 겪었다면 "너가 왜 거기서 나와?"가 절로 나오는 장면
이와 비교해보면 성장 시스템하에서는 느릴지언정 확실한 성장이 가능했다. 우선 캐릭터 세팅에 필요한 에픽 장비 획득 난이도가 낮았으며, 장비 세팅을 마친 이후에도 파밍을 이어가 옵션 성장에 필요한 재료를 획득할 수 있어 유저들에게 게임을 플레이할 동력을 제공했다.
그런데 여기엔 문제가 있었다. 한 시즌 전반에 걸쳐 성장이 이뤄질 수 있도록 성장 속도를 조절한 탓에 성장 속도가 너무 느려 이에 대한 체감이 약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장비를 맞추고 드라마틱한 변화를 체감하다가 세팅이 끝나면 계속해서 성장 재화만 들이붓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성장 비용이 저렴한 것도 아니었으니 성장의 매력은 계속 떨어졌다.
'골든 베릴이 와다다' 이벤트는 시즌 8 당시 성장난을 상징하는 이벤트로 역사에 남았다.
실제로 대규모 업데이트를 맞아 게임을 시작했다가 “재미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유저가 적지 않았다. DDC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이렇게 이탈한 신규 유저가 무려 90%에 육박한다. 게임에 마련된 성장 노선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경우가 다수였다.
캐릭터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가 ‘모험가 명성’ 밖에 없는 것도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장비 옵션 레벨이 높을수록 모험가 명성은 빠르게 상승하는데, 높은 모험가 명성이 실제 캐릭터의 성능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 간극이 계속 커지니 유저들은 ‘던담’ 등 외부 사이트에 의존해 캐릭터의 성능을 파악하는 문제가 빚어진 것이다.
2년 넘게 함께 했던 성장 시스템을 떠나보내며 유저들은 말한다. “틀리진 않았다, 다만 아쉬웠을 뿐”이라고.
성장 시스템은 과거 ‘헬 파밍’과 신화 장비에서 크게 덴 유저들을 달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노력한만큼 성장한다는 ‘공정’은 현재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지 않았던가. 잘 다듬어졌다면 많은 유저들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하는 양질의 콘텐츠로 자리 잡았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부족했던 애프터 서비스가 지금의 문제를 키웠다. 시즌 9의 선계 출시 이후 문제를 개선할 여러 차례의 기회가 있었지만 제대로 잡지 못했고, 성장 재료 변경과 융합 장비 개편 등 여러 차례의 노력은 충분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번 DDC에서 공개된 중천 업데이트의 키워드에선 ‘장비옵션성장’, ‘커스텀장비’와 함께 과거의 장비 시스템을 대표하는 ‘영고(영원한 고통)’도 함께 지워졌다. <던전앤파이터>는 신규 시즌에서 지나치게 운에 의존하지도, 성장 경험이 부족하지도 않은 새로운 장비 시스템을 선보일 수 있을까.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영고'도, '옵션 성장'도 없는 새로운 장비 시스템이 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