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물에 그 밥이겠지”, “과금요소 잔뜩 넣어 나오겠지”, “또 속을 것 같냐?”
지난 2월 14일 엔씨소프트가 ‘장르 다변화’를 다짐하면서 내놓은 신작 티저 영상에 대한 유저 상당수의 반응이다.
불신은 늘 존재해왔다. 기름을 끼얹은 것은 지난해의 <블레이드 & 소울 2> 논란이다. ‘커스터마이징 화면’ 홍보 영상이 특히 문제였다. 출시 직전 공개한 티저와 실제 게임 속 화면은 아예 다른 물건이었고, 유저들은 분노를 넘어 황당함까지 느꼈다. BM의 ‘공격성’을 줄이겠다는 뉘앙스의 개발진 약속 또한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는 비판도 많다.
신뢰도 이슈는 엔씨소프트만의 문제는 아니다. 엔씨소프트, 넥슨, 넷마블 (이른바 ‘3N’) 등 국내 대표 게임 대기업 3사 모두 구작 운영에 대해서든, 신작 발표에 관해서든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식의 비판을 여러 번 들어왔다. 지난해 중반부터 있었던 3사의 신작 발표에서도, 전부 ‘뻔한 게임’이 되리라는 대중 반응을 실제로 마주쳐야 했다.
일각에서는 ‘전례’를 만든 회사들 쪽의 업보라 말하고, 다른 일각에서는 비판 아닌 비난에만 열을 올리는 유저들의 과열된 분위기에 우려를 표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기류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이번엔 정말로 ‘뻔한’ 게임들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8월부터 올해 2월 사이 3N은 각각 5~20개에 달하는 신작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다작 전략’을 잇따라 드러냈다. 다양한 플랫폼, 다양한 장르, 그리고 ‘게임성’과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략의 세부 내용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약 2분기 정도의 짧은 기간 안에, 국내 시장에서 최고 입지를 다지고 있는 세 개 게임사가 비슷한 전략을 발표했다면 업계에 어떤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일지 한 번 가늠해볼 이유가 충분하다. 3사가 감지한 시장의 변화는 과연 무엇일까?
잘 알려진 것처럼 2021년 게이머 일반에는 삽시간에 돈독해진 공통의 정서가 있다. 국내 게임계 ‘적폐’를 규정하고 비판하는 정서다. 경향을 추동한 키워드는 단연 ‘BM’(비즈니스 모델·과금 시스템)이다. BM은 ‘통치 도구’처럼 발음되기 시작했다. 유저들은 공고했던 BM 위에 올라탄 게임 운영진을 호명해 눈높이를 맞추라고 요구했다.
유저와 게임사의 ‘관계 재설정’은 파급력이 일파만파 커지면서 게임업계는 물론 정·재계에서도 주목하는 이슈가 됐다. 기업 입장에 한정해서 본다면, 십수 년 지속한 운영 방침을 일신해야 할 이유가 생겼던 셈이고 실제로 많은 변화와 약속이 이뤄졌다.
이런 규모의 변화가 신작 출시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리 없다. 2021년 5월과 8월 각각 <트릭스터 M>과 <블레이드 & 소울 2>가 출시했을 때, 그 게임성만큼이나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이 두 게임의 BM이다. 이들 게임의 BM이 엔씨의 기존 게임들과 유사하다는 평가가 출시 직후 빠르게 확산해 일종의 낙인효과로 작용했다.
<트릭스터 M>은 그 결과 일간 이용자 수가 한 달여 만에 1만 여 명으로 떨어지는 등 빠른 유저 이탈을 겪어야 했다. <블레이드 & 소울 2>는 초반 매출 순위가 6~10위에 머물면서 기존 엔씨소프트 게임들에 비해 성적 부진을 겪었다. 이후 인기를 회복해 2021년 4분기에는 총 3,576억 원 매출을 올려 엔씨소프트의 전체 모바일 게임 매출 중 절반 이상을 담당한 바 있다.
하지만 <블레이드 & 소울 2>는 당초 엔씨소프트의 변화를 기대하던 게임이었다. 결과적으로 매출은 어느정도 달성했겠지만 변화는 없었다. 2021년 초 100만 원 근처에 다가갔던 엔씨소프트의 주가는 <블레이드 & 소울 2> 론칭을 기점으로 계속 하락세를 이어가 2022년 2월 현재 49만 원 대를 기록하고 있다.
고액 과금을 유도하는 P2W형 MMORPG 장르가 시장성을 잃을 것이라는 진단은 물론 아니다. 단적인 예로 카카오게임즈의 <오딘>은 기업의 간판 게임으로서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여론도 딱히 나쁘지 않다. 2021년 게임 대상 수상의 영예도 안았다.
그러나 <트릭스터 M>, <블레이드 & 소울 2>에 대한 유저들의 가혹한 평가와 이후의 실적은 분명한 리스크를 보여주는 무시하기 힘든 사례다. 특히 국내 게임계 신뢰도 이슈의 ‘원흉’처럼 지목되곤 하는 3N의 고전적 평가를 생각하면 이러한 리스크는 배가한다.
글로벌 소비 트렌드로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는 ‘미닝아웃’(meaning out)도 고려 대상이다. 특정 브랜드, 혹은 제품군 구매를 통해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을 표현하는 경향을 말한다. 거꾸로 신념 상의 이유로 특정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불매 운동’ 또한 넓은 범주의 미닝아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런 미닝아웃 트렌드의 부작용으로서, 특정 제품 소비자에게 과한 비판을 가하는 등 구매행위로 개인을 속단하는 사례가 종종 문제시되고 있다. 브랜드, 제품이 지닌 이미지가 개인에 과도하게 덧씌워지는 것. 국내 게임계에서도 심화하는 현상이다. 특정 게임 이용자를 비하하는 ‘개돼지’ 등 용어는 이 현상을 대표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부정적 기업 평판이 주력 게임의 흥행에까지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확인된 현시점에서, 3N의 ‘다작 전략’은 새 먹거리 마련뿐만이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 제고까지 노리는 복안으로 판단된다.
가장 먼저 나선 넥슨의 사례를 살펴보자. 2021년 8월 넥슨은 8개 게임을 발표했다. 그중 4개는 기존 IP의 재활용으로, 기존에도 시도했던 분야다. 좀 더 주목할 부분은 나머지 4개 게임 쪽이다. 전에 없던 새 IP거나 시도해본 적 없는 장르들이다. 이후에 별도 발표된 <프로젝트 D> 역시 팀 슈터 포맷으로서 넥슨에게는 꽤 새로운 도전이다.
자주 간과되는 일이지만, 넥슨은 과거 참신한 시도를 몇 번이나 했고 실패도 많이 겪었다(잠시 <허스키 익스프레스>를 떠올리는 시간을 갖자). 그렇지만 이런 과거에 비해서도 루트 슈터, 백병전 PVP, 수집형 RPG, 팀 기반 TPS 등에 동시 도전하는 현 상황은 기존보다 훨씬 적극적인 창작욕을 보여준다.
특히 백병전 PVP <프로젝트 HP>는 본지에서도 직접 체험, 리뷰했다. 플레이해본 소감을 가장 보수적으로 말하더라도 ‘구색 갖추기’에 불과한 타이틀은 아니다. 장르에 대한 이해, 완성도와 디테일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프로젝트 D>는 어떨까. 자사 게임인 <서든어택> 외에도 <배틀그라운드>, <발로란트>, <오버워치> 등 여러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 게임은, 현재 바로 그 ‘유사성’ 외에는 아직 특별한 단점 언급이 없다. ‘어디서 본 듯한’ 요소들이 즐비해 독창성은 아쉽지만, 그만큼 검증된 재미를 잘 배합했다는 평가가 실제 플레이해본 유저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물론 기업의 갑작스러운 체질 변환에 리스크가 따르는 것은 당연지사다. 특히 확률형 BM의 제작비용 대비 수익성은 다른 BM을 압도하기 때문에 타 장르에만 ‘올 인’ 한다면 수익성 이슈가 발생하기 쉽다. 대기업인 만큼 인건비 등 고정비 지출이 많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코어 게이머에게 소구할 이미지 제고용 타이틀과 높은 수익을 올리는 캐시카우 타이틀을 동시에 운영한다면 리스크를 크게 경감할 수 있다. 실제로 3N의 차기작에는 이들이 이미 익숙한 개발 스타일과 BM을 적용할 만한 MMORPG 등 장르 타이틀이 하나 이상씩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방면에서는 적절한 해외 벤치마킹 사례도 있다. EA는 현재 패키지형 게임, 라이브서비스형 게임을 동시 개발, 운영하는 문어발 전략을 펴고 있다. 그중 과금형 게임인 <피파> 시리즈는 EA의 최근 몇 년간 실적 보고에서 ‘실적 견인차’로 계속 이름을 올리는 중이다.
그러나 <피파>는 평론, 대중, 정계에서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 지 오래다. 시리즈를 거듭하면서도 발전과 혁신이 거의 없는 게임 콘텐츠, 그리고 거액의 과금을 요구하는 ‘카드 뽑기’ 시스템 때문이다. 독일 등 유럽 여러 국가에서는 <피파>를 도박으로 분류해 규제하려는 시도가 이뤄졌을 정도.
반면 2021년 최고의 게임으로 뽑힌 <잇 테이크 투> 역시 EA 산하의 게임이라는 사실은 시사점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다이 폴른 오더>, <어 웨이 아웃>, <스타워즈 스쿼드론> 등 호평받았으나 흥행은 그에 못 미쳤던 게임들도 다수 출시해왔다. 덕분에 2012년, 2013년 연이어 ‘미국 최악의 기업’으로 꼽힌 바 있는 EA의 부정적 이미지는 당시 대비 희석된 상황이다. 세간의 평가처럼 EA가 ‘돈이 되는 게임’에만 투자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현상이다.
EA의 문어발 전략은 이미지 제고에 그치는 것만도 아니다. <잇 테이크 투>는 총 500만 장 판매고를 올렸다. EA가 개발사 헤이즈라이트와 체결한 계약에 따르면, 개발비에 상당하는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수익은 EA의 몫이 될 예정이다.